페트라 - 신비로운 붉은 장미빛 고대도시에 가다

2015. 5. 10. 05:57세상의 모든 풍경/Jor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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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붉은 장미빛의 고대도시 페트라...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속에 이 도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한 선교대회에 초청을 받게 되었고,
그 프로그램에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성지순례가 포함되어 있었다.

앞으로 틈틈이 성지에 관련된 사진을 포스팅하겠지만
사실 이스라엘 성지에 관한 자료들은 조금만 검색해도
몇 천 건에 이르는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내가 하는 포스팅이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페트라는 다르다.
이곳 만큼은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포스팅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늘 내 마음을 채근하곤 했다.
먼저 페트라에 대한 소개의 글을 살펴본 다음
페트라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812년 어느 날, 말을 탄 한 무리의 아랍인들이 뜨거운 요르단 광야길을 통해 이집트로 향하고 있었다. 쉽게 구별되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는 한 명의 유럽인이 끼어 있었다. 스위스의 육군 대령의 아들이었던 27세의 이 젊은이는 시리아에서 아랍어를 배웠고, 아랍식 옷을 입고, 아랍식으로 분장한 채 대상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이집트로 향하던 중, 그는 아랍상인들로부터 세일 산 근처의 장엄한 폐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8월 22일에 마침내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그 도시의 최초의 서양인 방문자가 되어 말을 타고 그곳을 가로질렀다. 그의 이름은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였다.

그를 통해 전설로만 회자되던 페트라가 서방세계에 알려졌고, 1916년에 독일과 터키 문화재보호단의 조사를 거쳐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198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대도시 페트라는 기원전 2세기 이후 나바테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전형적인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교역을 통해 풍부해진 수입과 헬레니즘 문화와의 만남, 그리고 로마와의 접촉 등을 통해 도시건축술을 배워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이곳 세일산 자락의 협곡을 중심으로 찬란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들을 통해 이 계곡분지에는 독특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생겨났는데, 이는 신과 죽은 이들을 위한 것들이었다. 

페트라가 위치하고 있는 세일산은 본래 에돔족속의 거주지였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최초로 거주했던 곳이며,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 세일산을 중심으로 유목생활과 정착생활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에돔족속은 출애굽시기에 애굽에서 나온 유대인들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아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고 예언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는 오늘날 페트라의 폐허에 남은 주거지역의 모습과 연관된 매우 중요한 예언을 하였다.

"에돔아 이제 내가 너를 세계 만민 가운데서 가장 하찮은 자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게 하겠다. 네가 바위 틈 속에 자리잡고 살며,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산다고, 누구나 너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한 너의 교만은 너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네가 아무리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네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아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내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49:15,16)

이 예언처럼 에서의 후손들은 나바테아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세일산을 떠나 네게브지역으로 쫓겨가게 되었고, 나바테아인들은 이 협곡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이집트와 아랍세계, 시리아와 터키에 이르는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특히 페트라 협곡 입구에서 캐러반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고 시내에 대규모 시장을 개설함으로써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협곡 입구에서 시내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의 틈새로 난 좁은 길은 햇볕이 들면 붉은 빛으로 빛나면서 계곡 전체를 황홀한 장미빛으로 물들인다.


 

수천년 전 동안 대상들의 무역로였던 이 길이 지닌 황홀한 매력은 이 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갑자기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그것이 점점 가까워오자 사진가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든다.


입구에서부터 곳곳에 사람들의 거주 흔적과, 무덤, 창고 등으로 사용된 사암동굴들이 눈에 띈다.


절벽틈새로 빛이 찾아들면 그 빛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길을 걸어보기 위해 암만에서 5시간의 버스길을 달려왔다.


이 무역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던 나바테아인들은 로마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결국 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비잔틴시대에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왔고, 로마식의 시장과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무너진 비잔틴시대의 교회유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아름다운 장면들을 불과 두 세 시간만 보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양쪽 다 절벽에 둘러쌓여 있을 때에도 내 길을 비춰주는 빛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모든 인생에게 빛을 비추시는 그분을 찬양한다.


약 1.5km 정도 걸어왔을까...
좁은 절벽 틈새 사이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하면 정면의 바위를 통째로 다듬어 만든 알렉산드리아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페트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기념비적 건물은 카즈네 피라운으로서 파라오의 보물창고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나바테아인의 선왕들이 묻힌 곳임과 동시에 나바테아의 주신인 돌의 신 '두샤라'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추정된다.


이 신전의 꼭대기에 있는 항아리는 실제높이가 9m에 이르는 방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파라오의 보물창고라는 별명도 아마 이 항아리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파라오의 공주가 이곳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가져간 광각렌즈 하나가 땅에 떨어져 종말을 고하는 바람에 보다 웅대한 스케일로 이 장면을 담아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아쉬운대로 어안렌즈로 담았는데 왜곡이 심하지 않고 보아줄만 하지 않은가?


바위를 통짜로 깎아만든 이런 거대한 건물들은 거의 예외없이 왕들의 무덤이다.
사람이 죽어서 땅에 눕는데 과연 저렇게 넓은 땅과 높은 건물이 필요할까?
두 평도 넉넉할텐데 말이다...^^


영혼불멸을 믿었던 나바테아인들은 아마도 저 위 계단을 통해 망자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도시를 어떤 모양으로 가꾸어 나갔을까?
아직도 미완성인 것 같은 도시의 분위기가 뭔가 아쉬움을 자아낸다.


철분이 섞인 붉은 사암이 마치 떡에 조청을 바른 것처럼 흘러내려 예술작품이 되었다.
창조주의 예술성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 11:23,33)

신약성경에도 나바테아의 왕이 등장하는데, 위의 고린도후서의 아레다왕이 이곳의 통치자였던 '아레타스 4세'를 가리킨다. 이는 사도 바울이 이 왕국에 와서도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이 왕국에 혼란을 가져올 것으로 여긴 아레타스 왕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추적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지금 발굴된 이곳의 두 배가 넘는 면적의 일반인 바위 동굴 거주지가 발견되었는데, 아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이 페트라를 제대로 보려면 5일 코스는 잡아야 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귀족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규모가 상당히 큰 바위 동굴이다.


한 때는 사람들의 거주지요, 사업장이요, 생존의 치열함으로 뜨거웠을 아름다운 사암동굴들...


세일산의 바위들은 붉은 사암이라 쉽게 가공할 수 있었고, 이것이 오랜 세월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이곳의 바위동굴들은 대부분 귀족 또는 여유있는 중산층들의 무덤 또는 거주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늘 죽음을 곁에두고 살았던 이들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로마인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던 대로의 주변에 마련된 원형극장,
처음에는 왕이나 귀족들의 장례를 치루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규모의 교역시장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지는 거리들이다.
약 1km 남짓한 이 거리에 세계 도처에서 온 진귀한 물건들, 향료와 약초, 보석과 장신구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사막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고,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공간으로 이 바위동굴만한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굴은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지 못하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운 바위들,
그 아름다움을 직각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으로 살려내어 생활공간으로 만든 나바테아인들....


빛이 들어오는 각도와 강도에 따라서 이곳 바위들은 수시로 색깔이 바뀐다.
새벽과 황혼이 되면 이곳의 바위들은 붉게 물들어 장미 빛으로 세상을 감싸준다. 


말과, 나귀, 낙타 등은 고대나 지금이나 인간들에게 무한한 충성심으로 봉사해왔다.
생각없는 짐승이지만 인류문명은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다.


세일산 자락에 형성된 나바테아인들의 도시유적 페트라....
이곳은 에서와 그 후손들의 터전이었고, 나바테아인들의 왕국이었으며, 지금은 요르단의 아랍계 주민들의 주요 관광 수입원이다.


황량하고 삭막한 광야 어딘가에는 이런 아름다운 풍경들이 숨겨져 있다.
사막처럼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 구석에는 이런 아름다움이 남아 있으리라.


척박한 광야에서도 물을 찾아내고, 그 물을 관리함으로써 문명을 일구어낸 사람들....
인간 종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성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일진대, 그것을 신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바위조각들을 잘게 부숴 관광객들에게 파는 이곳의 토착원주민....
저 작은 돌이 두 개에 1달러였다. 아내가 두 개를 사왔는데 사암이라서 그런지 오는 사이에 많이 부숴지고 떨어졌다.
하루종일 뜨거운 햇빛에 앉아 고생하는 모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나바테아가 멸망하고 기독교가 전래되기전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이 이곳에 세워졌다.


아마도 이곳은 마차의 통행이 금지된 로마의 관공서 거리였을 것이다.


가이드는 이곳에 묻힌 여러 왕들의 이름을 설명해주었지만 그 이름들은 내게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죽어간 왕들의 이름보다 가까이 있는 우리 친족들과 벗들의 이름을 외워두는게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영화 '인디아나 존스' 1편, 아라비아의 로맨스,
그리고 최근에 방영된 TV드라마 미생...
모두 이곳 페트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다.


지금이라도 고대인들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바위동굴과 상점들....


이 동굴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건축물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서의 편안함을 오늘날의 물질문명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반 역광으로 비취는 빛이 동굴의 라인과 색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사진가의 눈은 이런 색들을 결코 놓칠 수 없다.


이 문명을 오로지 정과 망치를 이용해서만 만들어 내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첨단기계를 통해서 일하는 현대의 건축가들에게 정과 망치만을 쥐어준다면 이런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1217년, 서구의 마지막 방문객이 이곳을 찾은 후 6백여년 동안 페트라는 역사속에서 잊혀진 도시였다.
20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인류에게 다가온 보석과 같은 도시이다.


예수님도 이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
무력과 힘을 자랑하는 왕들은 대체로 크고 날렵하고 잘생긴 백마를 탔지만,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기에 이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무슬림 젊은 여성 관광객 두 사람이 뜨거운 햇볕을 피해 페트라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관조하고 있다.


낙타가 보기엔 멋있지만, 처음타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허벅지의 통증을 야기한다는 사실...!
낙타를 탈 때는 청바지를 입지 마시라...! 피부가 물러져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낙타떼와 나귀들을 보니 이천년 전 이곳을 오갔던 대상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신전 우측 정면에 널찍한 동굴이 낮은 곳에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서 보는 파라오의 보물창고, 카즈네 피라운의 아릿다운 자태.


자,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왔던 길과 돌아가는 길은 또 어떻게 다를까.


사람이든 자연이든 보는 각도에 따라 새로운 아름다움이 느껴지곤 한다. 이 길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벽의 아랫쪽에 수평으로 깍인 부분은 물이 흐르는 수로였다.
아인무사에서 페트라의 계곡분지로 이 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들어 문명을 꽃피우게 했다고 한다.


렌즈를 통해 빛을 읽어낸다는 것은 참으로 순간적인 느낌과 감성 그 이상의 많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진기는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의 근사치를 찾아내기 위해 가장 적절한 노출값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정은 필수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어린시절부터 불러온 찬송가의 가사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좌우로 넓게 담는 것과 위 아래로 길게 담는 것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누군가 다시 이 빛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는 길은 아무리 길어도 멀지 않고,
아무리 험해도 힘들지 않다.


이 길을 내가 또 언제 걸어볼 수 있을까...
아내의 손을 잡고, 손자 소녀들의 사진을 담아주며 걸어볼 날을 꿈꾼다.


아무리 깊은 절벽에도 길이 있고,
아무리 험한 골짜기에도 빛이 찾아든다.


마차가 다가오자 홀로 다가오던 청년은 벽에 기댄 채 마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냥 지나치기만은 너무 아쉬운 장면 아닌가?


이곳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벽에 기댄 채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디서 왔는지 모를 견공께서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항상 행렬의 맨 끝에 가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인생에 햇빛을 비추시는 그 분을 찬양하라....!


페트라의 유적은 도저히 한 나절만으로 감상할 수 없는 방대함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내 인생에 이곳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날들이 다시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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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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