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7> 토착화를 위한 과감한 시도 – 로베르토 드 노빌리

2020. 11. 25. 20:56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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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기독교사상 세 번째 연재, 로마 가톨릭 전통에서 이미 드 노빌리의 시도에 대해서 다룬 바 있습니다. 거기서는 주로 드 노빌리의 선교방법론과 신학적인 시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지요. 이번 인물열전에서는 드 노빌리의 삶과 사역을 중심으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탈리아 귀족 출신 사제, 마두라에 오다


1605년에 인도에 도착한 로베르토 드 노빌리(Roberto de Nobili)는 이탈리아 귀족혈통의 예수회 신부입니다. 날카로운 지성과 불타는 열정을 가졌던 그는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놀라운 업적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유교의 고전들에 능통했고, 기독교를 중국의 지성인들에게 중국의 형식으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고아에 잠깐 머문 후 코친으로 이동한 드 노빌리는 그곳에서 병에 걸려 몇 개월간 고생을 했습니다. 병에서 회복되자 당시 예수회 말라바르 관구의 관구장이었던 알베르트 라에르지오(Albert Laerzio) 신부는 그를 어부들의 해안선(the Fishery Coast) 사역에 합류하도록 파송하게 됩니다. 드 노빌리는 그곳에서 7개월을 머물며, 빠라바(Parava)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타밀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라에르지오 신부의 목표는 내륙사역을 개척하는 것이었고, 이 일을 위해 드 노빌리를 점찍었던 것이지요. 그를 위해 선택된 장소는 당시 인도대륙 남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나야크왕국의 수도 마두라(Madura, 현재의 마두라이)였습니다. 이곳은 또한 힌두철학과 학문을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있던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마두라에는 연로한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인 페르난데스 신부(Fr. Fernandez)가 맡고 있는 가톨릭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1595년부터 거기서 가끔씩 오는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빠라바 공동체에서 온 회중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마두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착지인 해안선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페르난데스는 마두라인들과 포르투갈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역에 있어 유능한 중재자였기 때문에 나야크의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힌두교사 한 사람을 채용하여 소년들을 위한 초등학교와 소규모의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전도자로서는 마두라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도 주지 못했습니다.

드 노빌리, 사냐시의 길을 택하다

 

1606년 11월, 드 노빌리는 관구장과 페르난데스 신부와 함께 해안선을 방문하고 난 후, 일상적인 검은 사제복을 입은 평범한 예수회 사제로 마두라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페르난데스와 함께 선교관에 거주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때 이미 드 노빌리는 선교방법론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속한 카스트에서 작은 구루로 인정받고 있던 나야크인 힌두교사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그를 통해 드 노빌리는 힌두들의 삶과 사상 속에 들어가는 통찰력을 얻었으며, 인도인이든 포르투갈인이든 카스트 힌두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거대한 장벽에 대한 그의 안목이 활짝 열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법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당시 기독교는 힌두교 내에서 보다 존경받는 계층들과 어떤 접촉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라바르에는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기독교는 말 그대로 포르투갈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믿는 종교로 소개될 뿐이었지요. 인도 그리스도인들은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피난처를 얻었던 하층 카스트 사람들이거나 포르투갈인들의 방식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힌두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기독교는 프랑크인들, 또는 ‘파랑기들’(Parangis)의 종교였습니다. 파랑기라는 말은 특히 포르투갈인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그들뿐 아니라 모든 다른 유럽인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칭찬하는 의미가 아니었어요. 이 용어는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시며 문란한 생활을 하는 거만한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그들의 매너는 인도인들의 예의범절과는 너무 멀리 동떨어진 것이어서 그들과 사회적으로 교류한다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페르난데스 신부는 ‘파랑기 마르감’(parangi margam), 즉 파랑기의 길로서의 기독교에 대해 말했지만 힌두사회 주류를 형성하는 카스트 힌두들에게 추천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드 노빌리는 만일 이들을 얻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인도에서 뿌리내리게 하겠다는 희망은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반드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하는데 기독교의 외래적 측면이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면, 그 파랑기의 길은 명확히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접근은 반드시 외부로부터가 아닌, 인도 사회 내부로부터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여기서 인도사회는 브라민들(Brahmins)을 그 머리로 하는 카스트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드 노빌리는 스스로를 인도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탈리아 귀족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이 인도 카스트 중 크샤트리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제의 신분으로서 그의 지위에 가장 부합하는 삶의 형태는 아마도 사냐시-구루(sannyasi-guru)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교에게 이 생활방식을 채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라에르지오가 마두라이의 관할권을 갖고 있는 크랑가노르의 대주교 프란시스 로즈(Francis Roz)에게 자문을 구하는 동안 드 노빌리는 브라민 요리사를 고용하고 인도 스타일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 페르난데스는 일시적으로 해안으로 부름을 받고 떠나 있었습니다.

구루가 되어 제자들을 얻다


드 노빌리가 채택한 방식에 대한 소문이 도시에 확산되면서 많은 현지인들이 관심을 갖게 됩니다. 1607년 2월에 이미 그는 일단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이 일에 학교 교장도 함께합니다. 그는 교장과 더불어 힌두교와 기독교의 대조적인 가르침들에 대한 긴 토론에 들어갔습니다. 무려 20일 동안 매일 네 시간 혹은 다섯 시간씩 토론을 거듭하였습니다. 마침내 교장은 스스로 결신했음을 선포하고 드 노빌리를 자기 구루로 받아들인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도화에 대해 언급한 후에 그 교장이 알버트(Albert)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는 사실은 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 명의 다른 나야크인 젊은이도 곧이어 그의 뒤를 따랐고, 드 노빌리가 마두라에 간 지 1년 이내에 열 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1607년 11월, 드 노빌리는 자신의 검은 사제복을 까비(kavi) 가운으로 대체하고, 가죽신을 나무 샌달로 바꾸었으며, 신실한 사냐시가 되도록 허락받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해안선에서 돌아와 자신에 대해 못마땅해 하던 페르난데스 신부와 결별합니다. 그는 영향력 있는 힌두 친구의 도움으로 그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일할 현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진흙으로 벽을 바른 작은 집과 예배당을 만들고 거기서 엄격한 금욕주의 식이요법을 준수하면서 구루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 드 노빌리는 브라만 요리사와 하인의 시중을 받았으며 쌀과 채소, 과일과 우유만으로 생활했고 하루에 한 끼만 먹었으며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드 노빌리는 종종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 페르난데스 신부를 방문했을 뿐, 외국인 사냐시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왔지만, 가급적 사람들과 접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문자들은 아이야르(Aiyar)가 목욕 중이거나 묵상 중이라는 말을 듣곤 했으며, 몇 차례나 요청을 해야만 그와의 만남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야 그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그는 단상에 앉았고, 그들은 인사례(namaskarams)를 한 후 바닥에 펼쳐진 카페트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품격 있는 타밀어와 적절한 인용문들, 마음을 꿰뚫는 말로 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평판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는 찾아오는 사람들과 종교와 철학에 대해 토론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가 강조한 가르침의 요점 중 하나는 구루의 필요성이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드 노빌리의 위험한 시도


한편 드 노빌리는 쉬브다르마(Shivadarma)라는 이름의 텔루구 브라만 성직자(빤디뜨)와 친분을 갖고 그에게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1608년에 이르러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말하게 되었으며, 그 빤디뜨에게 베다경전 원문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 원문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는 오직 브라민들만 베다경전을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통상적으로 이 모든 것은 암송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베다경전을 필사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위험을 무릅쓰고 권위 있는 힌두경전들을 배우면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브라민들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드 노빌리와 교제하던 그 빤디트는 1609년에 마침내 세례를 받았으며, 그 해에 개종자의 숫자는 63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 카스트에 속해 있었는데, 일부는 나야크 왕족이었고, 일부는 경작자들, 그리고 일부는 브라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일반적인 라틴 예전에 따라 물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우상숭배의 문제를 제외하고 그들에게 카스트를 떠나거나 복장, 음식 또는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가 빠라바 회중에 참여하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사를 착용하고 꾸두미를 한 브라민 사제의 모습


그들은 성사(聖絲)를 몸에 두르고 꾸두미(kudumi) 또는 머리다발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신중한 고려가 필요했는데요, 수년 전 고아의 총회에서 그런 상징들을 금지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주교 메네즈의 지원을 받은 대주교 로즈는 이를 허용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의식적인 목욕과 끈의 착용, 그리고 타밀의 뽕갈(Pongal)의식(1월 중순, 태양신에게 드리는 추수감사축제) 등도 유지되었으며, 힌두교의 만뜨람(Mantrams, 주문)은 기독교의 기도문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개종자들은 자기 가족 가운데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드 노빌리는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될 때 자기 카스트나 삶의 자리를 떠날 필요가 없다고 믿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카스트를 유럽의 계급과 계층구분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회적인 관습이며, 인도인의 삶의 방식에서 피할 수 없는 특징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들이 노예제도를 로마제국에서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삶의 특징으로 취급하고 이를 반대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런 관점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시리아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무까바르들(Mukkavars)이 특별한 공동체로 형성된 말라바르에서 이미 인정되어 왔습니다. 드 노빌리는 1609년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카스트나 고결함, 또는 관습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그런 문제들에 개입한다는 생각은 사단이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이며,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것이 바로 페르난데스 신부의 사역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게 상처를 입힌 주범이다. ( J. S. Chandler: The History of the Jesuit Mission in Madura, S. India,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p.14)

 

강력한 반대와 갈등을 넘어서다


드 노빌리는 자신이 이룬 성공적인 사역과 개척자로서 자신이 습득한 힌두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내적인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해 함께 일할 동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1609년에 파송을 받고 온 라이타오 신부(Fr. Leitao)는 그런 혹독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 후 1610년에 온 비코 신부(Fr. Vico)는 그곳에 머물면서 헌신적인 동료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요. 때때로 마두라에서 강한 반대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그를 추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브라민들이 대규모로 모여 드 노빌리를 불러 공개적인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또한 투르크인이란 오해를 받아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드 노빌리를 돕던 빤디뜨는 폭력을 동반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드 노빌리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자주 던진 비난은 그가 사실상 파랑기라는 것이었습니다.

1610년에 이 사실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 빠라바 기독교인이 드 노빌리의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기 카스트를 잃고 파랑기가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의심하기 시작했고 일부 제자들은 그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드 노빌리는 공적인 선언서를 만들어 답변합니다. 자신은 파랑기가 아닌 로마에서 온 사냐시이며 자기 가족은 그곳에서 인도의 왕과 상응하는 지위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이 가르치는 종교는 신자에게 자기 카스트를 부정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파랑기들 특유의 그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내용을 행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야자수 잎에 기록하여 나무에 고정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파랑기가 아니라고 한 말의 의미는 자신이 포르투갈인이 아닐 뿐 아니라,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사용하던 나쁜 의미에 있어서 파랑기도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사제들은 이 이탈리아인이 그렇게 예리하게 스스로를 자신들과 구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페르난데스와의 갈등


그 선언문은 제자들을 결집시키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종류의 반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이는 페르난데스 신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그는 드 노빌리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 문제에 대해 고위 성직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하지만 관구장과 대주교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드 노빌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라에르지오는 1608년에 사냐시의 복식을 갖추고 식이요법을 같이하면서 한 달 동안 그와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에 대해 만족해했습니다. 따라서 라에르지오가 그 직책에 있는 동안 페르난데스의 불평은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두라에서의 낯선 행위들에 대한 소문이 고아의 성직자들 사이에, 해안선을 따라서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다수가 페르난데스의 입장을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 문제는 1610년에 표면화됩니다. 새로 지명된 감찰관 니콜라스 피멘타(Nicholas Pimenta)는 페르난데스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페르난데는 그에게 장문의 고소문을 써 보냅니다. 그 요지는 드 노빌리가 파랑기라는 이름을 부인하면서 거짓으로 속이는 죄를 짓고 있고, 힌두의 관습들을 기독교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를 타락시키고 있으며 그의 개종자들을 따로 관리하면서 분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피멘타는 고아의 신학자들과 상의하여 로마 예수회 본부의 총장에게 마두라 선교사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드 노빌리도 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해 로마에 보냅니다. 여기서 그는 고소 내용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하고 자신의 ‘순응’(accommodation)의 방법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으로 논박했습니다. 당시 정보통신은 무척 느려서 1613년까지도 총장의 답변이 인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답변에서 총장은 문제가 제기된 몇몇 관행에 대해 정죄하면서도 자칫 선교를 망칠 수 있는 그런 변화는 추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 와중에 드 노빌리를 강력히 반대하는 페로(Pero) 신부가 라에르지오의 후임 관구장으로 부임하였고, 그는 총장의 답변에 따라 드 노빌리에게 그 방법들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이 일이 마무리되기까지 드 노빌리와 비코가 더 이상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도록 금지했습니다. 드 노빌리는 그러나 그 명령의 단서에 근거하여 총장의 편지를 해석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따라서 이후 로마와의 서신왕래가 계속되면서 논쟁 또한 계속 이어지게 되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쟁점은 네 가지로 좁혀지게 됩니다. 상층 카스트 개종자들이 끈(성사)을 착용할 수 있는지, 머리다발(꾸두미)을 묶는 것, 샌들 착용, 그리고 그들의 관습인 목욕을 계속할 수 있는지 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카스트에 기초한 사회적 구별의 몇몇 척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허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1615년에 페로가 세상을 떠난 뒤 인도 내에서 드 노빌리를 향한 호의적인 반응도 약간 있었지만, 고아 대주교는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는 교황 바오로 5세(PaulⅤ)에게 강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드 노빌리의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온 답변은 그 문제를 재조사하고 그 논쟁적인 관습들이 미신적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개종을 촉진하기 위해 지속될 수 있는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드 노빌리의 방식에 대한 교황청의 결정


이에 부응하여 1619년에 고아에서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드 노빌리와 이제는 연로해진 그의 후원자 로즈 대주교가 참석했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드 노빌리와 로즈가 쓴 글을 회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마음을 바꿔 노빌리의 ‘순응이론’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은 로마에 달려있었지요. 신학자위원회가 보고를 마친 후 최종적으로 1623년, 교황 그레고리 15세는 드 노빌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결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브라만과 다른 상층카스트 개종자들이 그들의 귀족 계급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식들(끈, 머리다발, 샌들 착용)을 사용할 수 있지만 힌두의례와 그 의례들에 관련된 주문들(mantrams)은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성사(聖絲)는 반드시 기독교 사제로부터 기독교 기도문들과 함께 받아야 한다. 목욕과 샌들 착용은 반드시 주술적인 목적이 아닌 청결과 개인적인 장식품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이 답변은 1624년, 인도에 도착했고 드 노빌리는 14년 만에 비로소 소송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유롭게 아무 제한 없이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 금지 역시 해제되었습니다.
선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요소들이 사라지자 드 노빌리는 사역을 다른 곳들로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드 노빌리의 개종자 중 일부는 왕의 신하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왕이 탄조르(Tanjore) 왕국에 맞서 군사작전을 위한 본영을 설치하기 위해 트리치노폴리(Trichinopoly)로 옮겨갔습니다. 1617년에 이미 드 노빌리는 그들을 두 차례 방문했습니다. 1623년에 드 노빌리는 비코에게 마두라 교회를 맡겨두고, 다시 트리치노폴리로 떠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렘(Salem)으로 갔는데 처음에는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 중 한 명이 그를 자기 집에 머물도록 초대했고, 마두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토론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확장되는 드 노빌리의 사역


드 노빌리는 이후 수년 동안 살렘, 트리치노폴리, 모라망갈람 지역에서 지냅니다. 1625년 성탄절에 그는 센다망갈람의 퇴임한 통치자인 티루망갈라 나야크(Tirumangala Nayak)와 그의 아내,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같은 해에 엠마누엘 마르틴스 신부(Fr. Emmanuel Martins)가 그의 사역에 합류하기 위해 도착했습니다.

이 기간의 사역은 마두라에서의 초기에 비해 브라만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의 비중이 작았습니다. 그때부터 수드라 카스트를 대상으로 한 사역이 더 많이 이루어졌고, 심지어 타밀나두의 불가촉민인 아디 드라비다들(Adi Dravidas)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놀랄만한 발전이었습니다. 이는 한 명의 아디 드라비다 빤다람, 즉 2천 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구루이자, 링감(lingam)을 입은 힌두 탁발수도자의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아디 드라비다는 물론 수드라 카스트도 있었습니다. 드 노빌리의 책을 읽고 난 후 이 빤다람은 드 노빌리를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드 노빌리는 그에게 깊이 감동하여 그를 가르쳤고, 몇 달 후 무띠우데얀(Muttiudeyan) 또는 힐러리(hilary)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힐러리의 영향력으로 그를 따랐던 많은 제자들이 교리문답 공부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두라선교회처럼 카스트 체계를 고려하는 선교에 있어서, 이들을 보살피는 일로 한 가지 당혹스러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동안 선교사들은 낮에는 상층 카스트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밤에는 그 외 계층을 대상으로 사역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특정 선교사들을 임명하여 하층 카스트들 사이에서 일하도롞 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빤다라스와미’(pandraswamis)라고 했는데, 그 지위는 타밀왕국에서 빤다람(pandram)으로 알려진 비브라민 종교 탁발수도자들의 그것에 상응했습니다. 그들은 사냐시로 살았고, 그 때문에 상층계급들로부터 존경받았으며 어느 정도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된 임무는 하층 카스트와 아디 드라비다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브라민 사냐시로 알려진 다른 신부들은 브라민의 삶의 방식을 따랐으며, 주로 브라민과 ‘재생’(twice-born) 카스트를 대상으로 사역했습니다.

첫 번째 빤다라스와미는 1640년에 선교사역에 합류한 포르투갈인 신부 발타사르 다 코스타(Fr Balthasar da Costa)였습니다. 그는 트리치노폴리 지역에서 유랑생활을 했으며, 대체로 한 번에 같은 지역에서 두 달 이상을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디 드라비다와 수드라 계층에서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었습니다.

박해와 투옥, 그리고 은퇴 이후의 삶


이때쯤부터 외국인 사냐시들에 대한 통치자들의 태도는 마두라의 티루말라 나야크와 포르투갈인들 간의 전투(1635-1639)를 비롯한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드 노빌리 자신은 티루말라 나야크와 좋은 관계에 있었지만, 그 나야크가 출타 중일 때 그의 속관인 벤카타라야 필라이(Venkataraya Pillai)의 박해로부터 신부들을 방어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1640년에 마르틴스는 트리치노폴리에서 추방되었고 드 노빌리 자신도 마두라에서 다시 한 번 체포되어 비코의 후계자인 마야(Maya)와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교회와 집은 약탈당했고, 심지어 1년 쯤 후 신부들이 석방되었을 때도 그 건물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1644년에 트리치노폴리에서 또 다른 박해가 있었는데요, 마르틴스와 다른 신부가 체포되어 족쇄에 채워졌고 교회는 몰수당했습니다.

이제 드 노빌리는 늙어가고 있었고 거의 앞을 보지 못합니다. 관구장의 명령에 의해 1644년에 그는 사역을 그만두고 실론의 자프나(Jaffna)로 가서 그곳의 예수회선교회의 수도원장으로 2년을 보냅니다. 그 후 그는 마일라포르로 파송을 받아 1656년, 7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마일라포르 외곽에 있는 오두막에서 사냐시로서 은퇴 이후의 삶을 살았습니다.

드 노빌리의 저술활동과 작품들


드 노빌리는 50년의 사역 기간 중에 타밀어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중 최고의 작품은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스콜라 신학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논술, 『그냐노파데삼』(Gnnopadsam)입니다. 다음으로 영혼의 기원, 본질, 종국에 대해 쓴 『아뜨마 니르나얌』(Atma Nirnayam),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에 대한 대화인 『아그나나 니바라남』(Agnana Nivranam), 『뒤샤나 디까람』(Dshana Dhikkram)과 『뿌나르잔마 아크쉐빰』(Punarjanma Aakshpam) 등 변증학적인 저작물들과 기타 작품들이 있습니다.

드 노빌리는 또한 산스크리트 운문으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삶』(a Life of the Blessed Virgin Mary)을 기록했으며, 같은 언어로 마두라의 브라민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식과 장례식에 사용하기 위한 찬송가를 작곡했습니다. 그 외에도 따밀어와 뗄루구어로 찬송시들을 기록했으며. 기독교 교리개요를 백 개의 산스크리트어 슐로카들도 기록했다고 합니다.

드 노빌리 이후 예수회의 선교


17세기 말과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예수회 선교는 남인도 내륙지역에서 드 노빌리가 시작한 방법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구 마두라 선교회의 정착지는 마두라로부터 벨로르까지, 그리고 탄조르부터 사띠야망갈람까지 타밀 전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648년, 고아에서 온 이탈리아인 신부 레오나르도 친나미(Fr Leonardo Cinnami)에 의해 마이소르(Mysore)에서 다른 선교가 시작되는데, 이는 현재 마이소르 주 남동부 지역과 살렘 및 코임바토르(Coimbatore)에 인접한 타밀 주들에서 실시됩니다. 그 후 1689년, 폰디체리에서 온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카르나틱(Carnatic)의 선교를 시작하는데, 그들은 본래 마두라선교회(북부 및 남부 아르코트)의 북쪽지역을 인수했으며, 또한 뗄루구 지역을 관통하여 더 북쪽으로(오늘날 안드라 쁘라데시) 나아갔습니다.

마두라 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코베리 삼각주의 남쪽 지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방대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수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마두라 선교회에서 일하는 선교사의 수는 열 명 또는 열두 명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초기에 그들은 상층 카스트 가운데서 사역하는 브라민 사냐시와 수드라 및 최하층 카스트에서 사역하는 빤다라스와미로 구분하여 사역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라민 사냐시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그들 중 마지막 선교사는 1670년에 사망한 아르콜리니 신부(Fr Arcolini)였고 그 후로는 그 구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드 노빌리와 비코는 브라민 기독교인들이 사제로 훈련받을 수 있는 대학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인도인 성직자는 전혀 세워지지 못했고, 이로 인해 훗날 심각한 결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수의 신부들이 방대한 지역들을 순회해야 했고, 그곳에 있던 많은 인도인 교리교사들에게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 특출한 교리교사들을 꼽는다면 전임 빤다람이었던 무띠우데반(Muttiudevan, Hilary)과 사바리 라얀(Savari Rayan, Peter Xavier), 그리고 이전에 요기였던 다이르얌(Dhairyam, Constant) 등입니다. 어떤 교리교사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많은 지역을 여행했고, 어떤 이들은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맡아 돌보았습니다.

노빌리의 초기사역 후에는 브라민 개종자들은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수드라와 최하층 계급으로부터 개종했기 때문이죠. 이 두 그룹의 기독교인이 모두 존재하는 곳에서는 한 교회나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렸지만 카스트 힌두에 속한 이들과 불가촉민들을 각각 별도의 영역으로 나누어 예배하도록 좌석이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연례보고서에는 수백 혹은 수천의 세례자들이 보고되었지만, 실제 그 공동체의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페롤리 신부에 따르면 드 노빌리가 세상을 떠나던 시기에 다섯 개 지역의 총수는 4,016명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후페르트 신부(Fr. Houpert)는 1700년 마두라선교회의 그리스도인 총수를 8만 명으로 추산하였습니다.

이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카스트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힌두 이웃들과 잘 어울려 그 공동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때때로 박해에 노출되어야 했습니다. 드 노빌리 이후 남인도에서의 예수회 선교는 콘스탄틴 베스치 신부(Fr. Constantin Joseph Beschi)를 비롯한 몇 사람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이후 포르투갈의 몰락과 교황청에서 예수회의 퇴조로 인해 소멸되어 가던 중 파리외방선교회의 아베 드보아(Abbé J. A. Dubois)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됩니다.

드 노빌리의 삶과 사역에 대한 평가와 의의


결론적으로 드 노빌리와 그의 계승자들은 용기 있는 실험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의 용기와 헌신, 인내를 평가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은 험한 길을 선택했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와 관련된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외래성에 대한 비난에서 기독교를 해방시키려고 했던 그들의 목표에도 마땅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비난은 선교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멀리 나갔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카스트 제도를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은 가장 큰 약점이었다는 데 대부분의 역사가와 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17세기에 드 노빌리의 방법과 드 노빌리가 피하려고 했던 일명 ‘파랑기교회’(Parangi Church) 사이에서 중도적인 길이 가능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실험을 한 것에 대한 명분으로 설득력은 갖겠지만, 결국 당혹스러운 유물로 로마교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개신교회와 선교회들 역시 경멸의 손가락질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카스트 구분을 허용해야 했고,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부인하면서도 그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들 때문에 당혹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스트는 카스트가 지배하는 환경에 살고 있는 교회에 특정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 영향이 모두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해롭지 않은 사회적 관습, 또는 피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하는 어떤 요소 사이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작업이 우리시대에 좀 더 수월해졌다면 그것은 세대가 흘러감에 따라 교회에서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갖고 있는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의식이 점차 약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현대교육과 도시생활이 좀 더 분명한 문화적인 차이들을 감소시켜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드 노빌리의 시대에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그 필요를 보았고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의 방법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한 기독교의 인도화를 위한 유일하고도 철저한 시도였음이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마땅히 그에게 존경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

 

** 본 게시물은 필자가 번역한 도서 <인도교회사>(C. B. Firth 저)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 발췌한 것입니다. 전제를 금하며, 인용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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