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5> 시리아교회 수호를 위한 몸부림 - 마르 아브라함

2020. 11. 9. 23:03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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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은 인도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고아와 코친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자신들의 정착지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와 더불어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파드로아도(Padroado)에 힘입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교와 교세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주로 프란시스교단과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신부와 수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지요. 이들과 주로 네스토리우스파에 속한 시리아교회와의 만남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양자 모두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형제들로 여기며 좋은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로를 알아감에 따라 서로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지요. 특히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들의 존재에 대하여 교황청에 보고했고, 교황청에서는 인도에 있는 시리아교회를 교황에게 복종하는 가톨릭교회로 만들려는 시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군사력과 해상지배권을 가진 포르투갈의 정치적인 힘과 더불어 인도 시리아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압력과 회유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시리아교
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과, 시리아교회의 전통을 지켜가는 일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요.

네스토리우스파의 마지막 주교, 마르 아브라함


오늘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자신의 지위와 시리아교회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을 투쟁했던 한 인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르 아브라함(Mar Abraham, ?~1597)입니다. 마르 아브라함은 당시 바빌로니아의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 갈대아 총대주교로부터 남인도 말라바르 지역에 파송된 많은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이 인도에 주교로 파송되어 오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는데요,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동방교회와 로마가톨릭의 관계에 대한 선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동방교회의 분열과 말라바르교회 관할권


1551년에 네스토리우스파인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지역의 동방교회(통상 시리아교회, 또는 페르시아교회로 불림)에서는 총대주교 시몬 6세(Simon VI)의 사후 총대주교 계승문제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동방교회에서는 총대주교가 세상을 떠날 경우 그 직이 총대주교의 조카에게 승계되어왔습니다. 이에 따라 그의 직분은 조카인 시몬 7세에게로 승계되었는데요, 주교들 중 일부 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다시 총대주교를 선출하였는데 이 때 뽑힌 인물이 요하난 술라카(Yohanan, Sulaqa, John Sulakar)였습니다. 그 결과 동방교회의 총대주교가 두 명이 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지요.

이 싸움에서 아무래도 정통성이 약했던 요하난 술라카는 당시 그곳에 있던 로마 가톨릭의 프란시스 교단 주교들의 권면에 따라 로마 교황의 인정을 받는 절차를 밟게 됩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에 가서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제출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 후 당시 그곳에 있던 세 명의 로마주교들로부터 재서임을 받습니다. 그는 교황 율리우스 3세(Julius III)로부터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로 인준을 받은 후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왔습니다.

이로 인해 동방교회는 기존의 네스토리우스파 전통을 고수하는 총대주교와 로마 가톨릭에 복종하는 갈대아 총대주교로 분열되었고, 전자는 쿠르디스탄(Kurdistan) 산지에, 그리고 후자는 티그리스 강변 모술 인근의 평원에 총대주교좌를 설치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의 총대주교가 모두 인도 말라바르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는 1557년에 인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를 파송하였고, 갈대아 총대주교 역시 1555년에 요하난 술라카의 친동생인 마르 요셉(Mar Joseph, Joseph Sulakar)을 말라바르의 주교로 파송하였습니다.

마르 요셉 vs 포르투갈인들


문제는 술라카를 인준한 로마교황청이 명시적으로 말라바르에 대한 술라카의 관할권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인들이 이 마르 요셉을 비롯하여 교황의 인준을 받고 말라바르에 온 갈대아의 주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말라바르에 가지도 못하고 고아의 프란시스 교단 수도원에 구금당한 채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라틴예전에 따라 미사집례법을 익힌 후, 1558년에야 말라바르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말라바르 시리아교회에 도착했지만, 시리아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체포되어 포르투갈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마르 요셉은 포르투갈에서 그곳 왕비와 섭정의 호의를 얻고 로마교회 당국자들의 심사를 통과한 후 다시 인도에 돌아왔고, 그 후로는 시리아예전에 로마의 복식과 성만찬 방식을 접목하면서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2,3년 후 새로운 이단혐의가 제기되는 바람에 다시 로마로 추방되었는데, 거기서 재판을 받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의 도착과 갈등의 시작


이처럼 마르 요셉이 유럽으로 떠나 있는 동안 시리아교회는 메소포타미아의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시므온)에게 다른 주교를 보내주도록 요청했는데, 이 때 인도에 온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마르 아브라함(Mar Abraham)입니다. 그는 로마교회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네스토리우스파였죠. 하지만 그가 인도에 들어오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의 삼엄한 감시를 뚫기 위해서 변장을 하고 말라바르에 들어왔고, 마침내 시리아교회에서 자신의 직무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마르 요셉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라이벌이 되어 서로 경쟁하며 불화할 수밖에 없었죠. 더 큰 문제는 포르투갈인들이 이 두 사람을 모두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마르 아브라함을 체포하여 유럽으로 보냈고, 얼마 후 마르 요셉 역시 지위를 박탈하고 로마로 추방하였습니다.

탈출, 변절, 그리고 귀환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르 아브라함은 자신을 태운 배가 모잠비크에 정박해 있는 동안에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로 가서는 자기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가 아닌 갈대아의 총대주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한 다음 재서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자기 입지를 굳히기 위해 로마에 가서 교황 비오 4세(Pius IV)에게 신앙고백서를 제출하고 자신의 직책과 관련된 모든 절차를 다시 밟아 재서품을 받았습니다.

1565년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안가말리 대주교(Archbishop of Angamali) 임명장과 고아의 대주교 및 코친의 주교에게 보내는 교황의 친서를 받아들고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 친서에서 교황은 “우리는 그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안가말리 교구에서 자신의 총대주교가 맡긴 직책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교황은 또한 총대주교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인도의 시리아교구를 둘로 나누어 마르 아브라함과 마르 요셉이 각각 관할하도록 조언하였습니다.

또한 교황은 총대주교에게 갈대아 동방교회가 합동동방교회(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교회로서 귀일교회라고도 함)의 일원으로서 로마교회의 신앙에 동의함을 보여줄 것을 권면하면서 고대 로마교회와 이루어진 합의에 따라 동방시리아교회의 예전과 의식을 분명하게 인정한다는 점을 적시하였습니다.

예전과 의식들에 관해서 … 비록 그들(말라바르 시리아교회)도 동의해주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우리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관습과 오랜 예전들을 지속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물론 그 관습과 예전들이 우리 로마교회에서 필수적인 신앙과 그에 연관된 성례전 및 다른 예식들을 제공하고, 여러분이 따르는 구원에 필수불가결함을 (합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마르 아브라함, 이 남자가 사는 법


따라서 교황이 말라바르 시리아교회를 ‘합동동방시리아(또는 갈대아)교회’의 교구 중 하나로 인정하고, 마르 아브라함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달랐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이 가져온 문서들을 진본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에서 그 진위를 확인하는 새로운 편지가 도착할 때까지 도미닉 교단 수도원에 연금시켰습니다. 

하지만 마르 아브라함이 누굽니까? 그는 자신이 늘 사용하던 수법대로 관리인을 매수하고 설득하여 그곳을 탈출, 무사히 말라바르에 돌아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 때 마르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부터 마르 아브라함은 1597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30년 동안 안가말리의 대주교로서 직무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네스토리아 주교였을 때 서품했던 성직자들은 다시 로마식으로 재서품하는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교황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관습을 지킬 권리를 가진 동방교회의 주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마르 아브라함의 이런 노력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말라바르 시리아 기독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관할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마르 아브라함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처음부터 마르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진 포르투갈인들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이 내륙까지 확장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마르 아브라함은 가능한 한 내륙에 거주하면서 회피와 순응을 적당히 결합하여 그들의 압력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인도에서 포르투갈인들과의 일,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이지요.

포르투갈인들은 1575년에 고아에서 열린 총회에 마르 아브라함을 초청했지만, 그는 자신을 끌어들여 체포하려는 고아 당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참석을 거절합니다. 이 총회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앞으로 말라바르 시리아교회 주교는 갈대아 총대주교가 아닌 포르투갈 왕이 지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시리아교회의 주교들의 고아 지역총회 참석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청원을 교황청에 보냄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르 아브라함은 교황 그레고리 13세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전적인 충성을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을 향한 포르투갈인들의 태도에 불평하면서 자신의 신변을 교황이 보장해 주지 않는 한 지역총회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마르 아브라함의 안전통행권을 약속하면서 지역총회에 참석할 것을 명하고, 고아 대주교와 포르투갈 왕에게 그 내용에 대해 친서를 보냈습니다.

고아 지역총회의 결정과 고조되는 갈등


마르 아브라함은 1585년에 고아에서 열린 세 번째 지역총회에 교황의 안전통행권의 보호 아래 참석하였습니다. 총회는 회기 내내 시리아교구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결국 마르 아브라함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내용들이 포함된 규정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총회의 결정은 코친 주교의 허락이 없이는 시리아교회 사제 후보들을 서임할 수 없으며, 그들을 교회에 배치하는 일 역시 포르투갈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말라바르 시리아교회를 섬기는 주교들은 포르투갈 왕이 지명해야 하고 고아에서 임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의 예전집을 시리아어로 번역하도록 결정했으며, 교회에서 사용되는 시리아교회의 문서들을 검토하고 교정하는 일을 포함하여 총회의 결정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기 위한 고문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 고문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예수회원인 프란시스 로즈(Fr. Francis Roz) 신부였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은 총회의 이런 결정문들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사실상 말라바르 교회와 그 주교를 포르투갈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명백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이때부터 마르 아브라함과 포르투갈인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최소한으로만 그들과 협력하기로 마음먹고 총회의 결정을 그대로 실행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로즈 신부에게 이런 마르 아브라함의 태도는 네스토리우스주의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은 교회의 문서들을 로즈가 검토하고 교정하도록 넘기지 않았지만, 로즈는 그 서적들 중 일부를 검토해 보고 그들의 예전에 여전히 남아 있는 네스토리우스와 그 학파에 속한 학자들의 이름을 발견하였습니다.

로즈 신부는 1586년 후반부터 다음 해까지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의 오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작성했고, 여기에서 마르 아브라함의 이단혐의를 명확하게 제기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르 아브라함은 1590년에 자신의 책임 아래서 예수회신학교 학생들을 라틴예전에 따라 서임하도록 되어 있던 일을 거부하였으며, 참석이 예정되어 있던 네 번째 고아 지역총회 참석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이 모든 일들이 교황청에 보고되자 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t VIII)는 1595년에 고아 대주교에게 마르 아브라함을 고아에 소환, 그에 대해 제기된 모든 문제들을 상세히 조사하고, 유죄가 확정되면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를 구금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마르 아브라함은 그 해부터 병세가 심히 악화되었고, 결국 건강상의 문제로 한 번도 재판에 불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1597년 초에 자신의 교구 행정권을 부주교였던 조지(George)에게 넘기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지는 사도 도마가 장로로 안수했다고 알려진 빠칼로마땀(pakalomattam) 가문에 속한 젊은 인도인이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말라바르 시리아교회의 불행한 역사는 다음 인물인 알렉시스 드 메네즈(Alexis de Menezes) 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마르 아브라함은 포르투갈의 힘과 권력에 대항해 말라바르 시리아교회를 지킬 수 있는 길은 로마 교황의 후원을 얻는 길 밖에 없다고 여겨 결국 명목상으로는 자신이 속한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를 배신하고 자신들과 적대관계에 있던 갈대아 총대주교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습니다. 나아가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자신의 지위와 말라바르 교회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나마 네스토리우스파의 신앙고백을 포기하고 로마교회에 신앙고백서를 제출하면서 로마교회로부터 다시 서품을 받고 라틴예전과 관습을 시리아교회에 도입해야 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마르 아브라함은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변절자요, 노회한 종교지도자라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는 말라바르교회의 전통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공로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겠지요. 여러분이 만일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무엇이 과연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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