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4> 열정의 개척자 - 프란시스 사비에르

2020. 10. 28. 14:08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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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해안에 상륙하는 포르투갈 함대

 

포르투갈의 인도진출과 파드로아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한 후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무역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고아에 거점을 확보한 후 다마운, 살세떼, 봄베이, 크랑가노르, 코친, 퀼론 등 서해안은 물론 동해안의 투띠코린, 네가파탐, 마일라포르에 이르기까지 정착지를 확대하였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에 이어 두 번째 총독으로 부임한 알부케르케(1509-1515)는 정착지의 포르투갈인들과 인도인들 사이에 혼혈결혼을 장려하였습니다.

인도에 진출한 포르투갈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교역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포르투갈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들어온 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려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15세기의 몇몇 교황은 새로 확보된 영토들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권과 상업적인 독점권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교황에게 무슨 그런 권한이 있는가 의아해할 수 있지만, 중세 유럽에서 교황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는 1493년에 공표된 칙령에서 당시 두 식민제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경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조레스 제도(Azores Islands) 남쪽으로 두 나라가 차지할 영토가 표시되도록 대서양의 지도에 선을 그었습니다. 그 선 서쪽의 발견되었거나 앞으로 발견될 이교도 영토는 스페인에, 그 동쪽의 모든 땅은 포르투갈에게 속하도록 정한 것이지요. 이 칙령에서 교황은 양국의 왕에게 그 땅에 신앙과 훈련이 잘 된 지도자들을 보내 그곳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과 도덕을 가르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동시에 다른 나라는 이 두 나라 왕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그 영토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인도에 온 포르투갈 함대에는 항해사와 군인들, 상인들 외에도 사제와 수도사들이 타고 있었는데요, 그들은 단지 채플린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선교사역도 감당하였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첫 발을 디딘 후 1500년에 도착한 첫 번째 함대에는 여덟 명의 프란시스 교단 수도사들과 여덟 명의 세속 사제들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아에 포르투갈 행정부의 조직과 함께 교회, 수녀원 및 자선 단체들을 세웠고, 1534년에는 그곳에 인도와 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관할하기 위해 주교좌를 설치하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포르투갈 왕의 선교 열정을 고려하여 1514년에 그와 후계자들에게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 이미 정복한 지역, 앞으로 정복할 지역에 대한 교회후원의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도교회 역사에 큰 영향을 준 후원권(right of patronage), 즉 ‘파드로아도’(padroado)가 생겨나게 되었지요. 파드로아도는 주교직을 비롯한 교회의 직책에 후보자를 추천하고 그것을 유지하며, 필요한 사역을 준비하고 그것을 제공하는 권리였습니다.

이처럼 포르투갈의 영향 아래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질적으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상당수의 인도인, 그리고 혼혈 기독교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포르투갈의 왕 요한 3세(John III)는 급격히 팽창하는 식민지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진전을 고려하여 교황과 새로 조직된 예수회에 인도로 보낼 사제들을 청원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선택된 사람이 바로 아시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름, 프란시스 사비에르(St. Francis Xavier)입니다.

사비에르와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예수회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스페인 태생으로 피레네산맥 근처의 작은 왕국인 나바르(Navarre)의 귀족 출신이었고, 그 가문은 나바르와 프랑스의 왕족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열아홉 살에 파리대학교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그 대학에서 교수로 11년간 재직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비에르는 훗날 성 이그냐티우스 로욜라(St. Ignatius Loyola)로 알려지게 될 한 인물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 역시 자신처럼 스페인 태생이며 그 대학의 일원이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훈련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이끈 열정의 사람이었고, 자신이 거쳐 온 회심과 영적투쟁을 기초로 그 과정을 수행했습니다. 

그 과정이 바로 “어떤 결정에 있어 지나친 집착의 영향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정복하고 삶을 질서정연하게 하는” 그 유명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입니다. 그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훈련은 참여자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했던 이그냐티우스 자신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 창안되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이그나티우스가 1534년, 파리의 한 작은 예배당에 모여 의형제가 되기로 서약했던 여섯 명의 젊은이 중 하나였지요. 그들은 스스로 독신과 청빈의 삶을 살기로 서약했고, 예루살렘으로 첫 번째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터키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팔레스틴에 머물든지, 아니면 유럽으로 돌아가든지 결정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팔레스틴으로의 여행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가 투르크인들의 땅과 기독교에 적대적인 나라들을 포함한 세상 어느 곳이든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로서 교황의 명령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야 했습니다.

이 훈련에서 그들은 후자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유럽을 가로질러 베니스 항구까지 걸어갔지만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배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니스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그 도시의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허드렛일이나 더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낮은 자세로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그곳에서 프란시스와 이그나티우스는 사제로 안수를 받았지요.

더 이상 팔레스틴으로 갈 희망이 없어지자 그들은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추상적인 형제애보다 더 분명하고 조직적인 단체를 위한 규약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에게 제출된 이 규약은 오랜 세월 처리되지 못하다가 1540년에 가서야 승인되었고, 비로소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 예수회는 순종을 서약하고 세상에 사는 동안 사냐시들처럼 일하면서 고행하는 사제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 회원 중 한 명이 ‘총장’(General)으로 선출되는데, 한번 선출되면 평생 동안 그 회의 수장으로서 그 직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회원들은 서약에 따라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서약한 또 한 가지는 바로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서, 누구든 교황이 맡기는 사명이나 과업은 그것이 어떤 종류든, 아무리 멀고 위험한 일이든 즉각적으로 수행할 것에 대한 맹세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첫 번째 선출된 총장은 이그냐티우스 로욜라였습니다.

인도로 향하는 긴 여정


예수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기 전 이 소식을 들은 포르투갈 왕은 로마에 있는 자신의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이 그들 중 일부를 인도에 보내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인도에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다른 사제인 카메리노의 바울(Paul de Camerino) 역시 자원했는데 그는 그 당시 예수회원이 아니었지만, 후에 인도에서 예수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1541년 4월, 그들은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새로운 총독 드 소우사(De Sousa)가 이끄는 함대에 올라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왕은 이 두 사제를 접견하고 총독에게 그들을 추천함으로써 그들이 왕의 후원을 받아 파송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비에르는 또한 자신을 인도와 인도양의 다른 모든 나라에 대한 교황의 대사(Apostolic Nuncio)로 임명한다는 교황의 친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16세기에 인도로의 항해는 아무리 빠른 배라고 할지라도 5-6개월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출발이 늦어지고 바람이 좋지 못해 사비에르가 탄 배가 인도에 도착하기까지는 무려 13개월이나 소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모잠비크에서 몬순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6개월여의 시간이 포함됩니다. 만일 총독이 본 함대에 앞서 소형 함선에 사비에르를 태우고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기간은 아마 더욱 길어졌을 것입니다.

리스본을 떠날 당시 승선인원이 7백여 명에 이르렀고, 기나긴 항해 기간 동안 물과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배 안에서는 여러 차례 질병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가 없이 항해가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때로는 사망자가 1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비에르가 탄 배에도 수많은 환자가 있었습니다. 긴 항해 동안 사비에르는 그 환자들을 돌보며 헌신적으로 봉사했는데, 심지어 청소부 일과 생존해 있는 환자를 위한 봉사는 물론, 죽어가는 이들의 죽음을 준비하고 그들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일까지도 감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1542년 5월 6일, 고아에 첫발을 딛을 때에 이미 그는 성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고아에서 사비에르의 사역


그 시기에 고아에는 주교와 성직자, 교회와 병원들이 있었습니다. 불과 한해 전에 디오고 드 보르바(Diogo de Borba) 신부는 고아의 기독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포르투갈 남성협의회를 조직하였고, 다양한 종족 출신의 비유럽인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추후 아시아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로 발전하였는데, 성바울대학(the College of St. Paul)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속물근성과 나태함으로 쩔어 있었고, 혼혈결혼의 결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훈련이 결여된 수많은 인도-포르투갈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주교와 인사를 나눈 후 사비에르는 병원에 있는 환자들과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방문하고, 기초적인 기독교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비롯한 사람들을 한 교회에 모으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거리로 나가 벨을 울리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친구들이여, 여러분의 자녀와 하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거룩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도록 보내주세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고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그 신기한 행진으로 인해 수많은 군중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그는 그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그는 운율을 가진 교훈들을 노래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아이들이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도록 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그 교훈들을 보다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젊은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만을 사용하여 각각의 요점들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동남부 해안의 빠라바들을 위한 사역   

사비에르는 5개월 동안 이런 방식으로 사역했으며, 그 후 총독의 요청으로 실론 섬 맞은편 인도 남동부 해안에 살고 있던 빠라바(Paravas) 개종자들 가운데서 사역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세 명의 인도 기독교인 조력자가 그와 동행했는데 그 중 둘은 부제였고, 한 사람은 하급 성직자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따라 여행하여 현재 틴네벨리(Tinnevelly)로 불리는 지역으로 갔는데, 거기서 코모린 곶과 투띠코린(Tuticorin) 사이에 흩어져 있는 30여 개의 마을에 사는 빠라바인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란 이름은 가졌지만, 신앙에 대해 무지했고 어떤 종류의 교회예배도 드리지 않고 있었다. 사비에르는 즉시 마을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만난 세례 받지 못한 모든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사비에르는 투띠코린에 도착하여 그곳에 앉아 작전계획을 수립했는데요, 그는 고아에서 사용했던 그 방법을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다만 그곳 언어가 따밀어인데, 그는 따밀어를 전혀 몰랐고, 충분히 배울 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자신의 편지 중 하나에서 자신이 어떻게 일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포르투갈어를 자기 타밀어처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며칠 동안 여러 번 모인 후에야 우리는 성삼위 가운데서 오직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십자가 성호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하여 기도를 타밀어로 드렸다. 그 후 우리는 같은 언어로 신조와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Salve Regina) 및 고백의 기도(Confiteor)를 타밀어로 옮겼다. 그런 다음 나는 가슴으로 그 번역된 문구들을 익혔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종을 울리면서 마을을 지나갔다. 청중들이 모여들면서 매일 두 차례씩 한 달 동안 그들에게 기도문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부모와 형제자매, 이웃들에게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일요일에는 남녀노소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그들 자신의 언어로 기도문들을 반복하도록 했다 …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시작한다. 내가 먼저 우렁찬 목소리로 신조를 말하면 그들이 큰 소리로 따라 합창한다. 다음에는 신조의 각 항목을 하나씩 이어나간다. 그들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고백하자 나는 신조의 각 항목 하나하나에 대하여 확실히 믿는지 말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두 팔을 십자가 형상으로 가슴위에 접고서 크게 소리를 모아 대답했다 … 내가 첫 번째 계명을 먼저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반복한다. 그 다음에 함께 이렇게 기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모든 것 위에 높으신 당신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주기도문(Pater Noster)을 암송한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거룩하신 마리아여! 우리가 첫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로부터 은총을 얻으소서!”

그런 다음 우리는 아베 마리아를 찬양하고 같은 방식으로 남은 아홉 개의 계명들을 차례로 계속한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특히 곧 세례를 받을 이들에게 고백의 기도를 드리도록 요구하며, 그 후에 신조를 암송한다. 나는 세례후보자들에게 각각 그 신조의 몇 가지 항목을 확실히 믿고 있는지의 여부를 질문한다.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나는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세례를 베푼다.

 

이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 거칠지만 준비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효과적인 것은 사비에르라는 사람의 실재였습니다. 4개월 지난 후 투띠코린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의 마을에 이와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각 마을마다 그들 가운데서 좀 더 지성을 갖춘 그리스도인 한 명을 교리교사로 임명하여 이 훈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훈련교재의 사본들을 주었습니다. 교리교사는 포르투갈 정부에서 지원하는 수당을 받았고 투띠코린에 있는 관리자로부터 행정지시를 받았습니다.

1543년에 사비에르가 고아를 방문한 후 두 명의 유럽인과 두 명의 고아인 사제가 그 사역에 합류했는데요, 그들은 여행과 교리교육, 세례, 환자 방문, 반대자들에 대한 대처, 빈민구제 등으로 바쁘게 일했고, 흙과 초가지붕으로 된 단순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그 선교사들이 있을 때는 그들이 사람들을 모아 매일 기도회와 강론을 했고, 그들이 없을 때는 교리교사가 이를 대신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원하여 몰려왔는데요, 이는 자신들이 세례받은 교회로부터 처음으로 목회적인 돌봄을 받는 것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 습관들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술 취하고 싸우는 것은 물론 다양한 이교적인 관습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악랄한 포르투갈인들의 손에 학대를 당하거나 전쟁 중인 왕의 군대로부터 급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쳐서 코모린만 근처 바다에 있는 몇 개의 바위섬으로 피난해 있던 기돆인들에게 사비에르가 보트로 음식물을 가져다주려고 구호대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이때 투띠코린의 포르투갈인들은 빠라바 종족의 적에게 말을 공급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 그 너머를 향한 꿈


한때 사비에르는 호전적인 마하라자 중 한 사람을 만나 화해하기 위해 트라방코르(Travancore)와 코친(Chochin)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행 중에 그는 트라방코르에 있는 무까바르(Mukkavars)라는 어부 계층에 속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의 조력자 중 한 사람은 마나르(Manaar)섬에서 다른 공동체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코친에서 한 여행자로부터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사역의 전망이 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서 두 명의 원주민 추장이 세례를 받고 자기 백성들을 지도할 사제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비에르는 인도 너머에 있는 땅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비에르가 더욱 그곳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인도의 상황에 대한 실망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는 힌두교 주류사회가 얼마나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사역해 온 기독교인들과 포르투갈 정착촌에서 사는 혼혈인들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기독교인이란 이름은 가졌지만 실제로는 전심으로 맘몬을 숭배하는 것이 자기 종교인 것처럼 살아가는 포르투갈인들의 행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더욱이 사비에르는 인도로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황의 대사로서 동부 아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예수회 선교의 개척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어부들의 해안선’(Fishery Coast)이라고 불리던 그가 시작한 사역들을 실행하기 위해 다른 돕는 이들이 도착하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헨리 헨리케스(Henry Henriques)는 그 지역에서 25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한동안 사비에르는 실론에서 사역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나르에서 새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프나(Jaffna)의 왕을 징벌하기 위한 원정을 그곳에서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도로 도망친 그 왕의 동생이 약속하기를 ‘만일 자신이 자기 형을 대신해 왕이 된다면 자신과 모든 신하가 다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했고, 사비에르는 이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공염불이 되었고, 사비에르는 결국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습니다.

1545년 중반쯤 사비에르는 배를 타고 마일라포르에서 말라카와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 때부터 약 2년 반 후에 사비에르가 인도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보다 먼 나라들에서의 선교사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말라카에 잠시 머무는 동안 사비에르는 안지로(Anjiro)라고 불리던 일본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사비에르에게 자신의 조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포르투갈의 정착지가 없는 그곳에서 아마도 기독교의 복음이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다시 고아로 - 선교사와 사제들의 멘토

안지로는 고아에 와서 1548년에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사비에르는 그와 함께 일본에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비에르는 먼저 인도에 있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온 선교사 신부들이 몇 명이 여러 기지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사비에르가 속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수도 점진적으로 늘고 있었는데, 1545년에는 3명, 1546년에는 9명, 1548년에는 10명이 사역했습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프란시스 교단 소속 신부들을 대체했습니다. 사비에르는 이들의 지도자요, 주교이자 상담자였습니다.

최고책임자는 포르투갈에 있는 예수회 지부가 지명했지만, 인도에서 다른 직책들과 모든 사제들의 사역을 총감독하는 일은 사비에르의 책임이었습니다. 자신의 편지와 보고서를 유럽에 보낸 후 그의 첫 번째 관심은 어부들의 해안선(Fishery Coast)에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도에 15개월간 머물면서 이런 일들을 수차례 실시했는데, 교제와 상담을 위해서 모든 사역자를 중심지에 불러 모았고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다른 몇 곳을 여행하면서 사비에르는 바쎄인(Bassein)에 올라갔습니다. 새로 도착한 몇 명의 선교사들이 고아에 있는 성바울대학에 배정되었는데, 이 대학에는 약 60명의 학생과 인도, 동아시아 그리고 심지어 아프리카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소년들과 젊은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 모두는 전적으로 예수회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재능이 뛰어났지만 자기 의견이 강한 젊은이였던 안토니오 고메즈(Antonio Gomez)가 그 직전에 예수회 지부에 의해 학장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새로 온 신부들을 각 지역에 배정하고, 각 사역지마다 책임자를 임명했으며, 신부들이 사역을 수행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자세한 지침들을 작성했습니다. 그 지침들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지혜가 혼합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 자신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대의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대가 그대의 이웃들에게 많이 사용하는 그대 자신의 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겸비해지기를 배우고 겸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도록 비천하고 드러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민첩하고 열심을 다하라 … 병원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고해성사와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권면하라. 할 수 있을 때 그대 스스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우라. 또한, 그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선한 말씀을 심으라 … 가난한 자들이라고 해서 다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들 가운데서 악과 죄에 빠진 부랑자들을 골라내야 한다. 
‘자비의 형제단’(e Brothers of Mercy)은 이 무리를 잘 알고 있으므로 그대가 어떤 구호 물품을 분배하든지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형제단에 그것들을 주라. 그렇게 할 때 또 다른 이점은 영적인 것 말고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 돈만을 찾는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자주 설교하라 … 하지만 동시에 그대의 설교들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미묘한 신학적 질문들을 주제로 하는 설교들은 피하라. 매우 명확해야 하며,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를 가르치라. 악을 제거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스스로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떨어지도록 저주하는 것을 그대가 얼마나 슬퍼하는지를 보여주라 … 그대의 설교 가운데 특히 공적인 책무를 가진 어떤 사람을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만일 그를 설교단에서 꾸짖으면 그런 사람들은 개선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나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꾸짖으려면 그대가 그들과 친구가 된 다음 은밀하게 그들의 집안 또는 고해실에서 해야 한다. 그대가 더 좋은 친구가 될수록 더 바른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비에르는 예수회원들은 반드시 지략이 있어야 하며 세속 성직자 및 포르투갈 행정당국자들과 함께 그들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모욕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대는 모든 일에서 교구 신부(the father vicar)를 존중하고 그의 허락을 얻어 설교하고, 고해성사들를 듣고, 다른 성사들을 행하라. 늘 그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어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와 불화하지 말라 단장(Captain)에게 복종하라 그리고 심지어 그가 나쁜 짓을 꾸미는 것을 그대가 목격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곁에 붙어 있으라. 그가 자신의 영혼과 명예를 더럽힐 것에 대해 그대가 느끼는 슬픔을 큰 사랑과 겸손과 관대함으로 그에게 표현하기에 적당한 시간은 그대가 그와 친구가 되었을 그때이다모든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서 즐겁고 쾌활한 사람이 되라. 우울한 얼굴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대에게 접근하여 그대와의 상담을 통해 유익을 얻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집스러움과 무뚝뚝함을 피하라. 그러므로 그대의 외모와 말들이 모든 방문자를 환영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누군가를 책망해야 한다면 사랑으로 정중하게 하되, 그대가 그의 동료를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 이유를 제시하지 말라.

 

사비에르는 안토니오 고메즈(Antonio Gomez)를 성바울대학의 학장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총장을 교체할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사비에르는 고아를 제외한 장소에 있는 예수회원들이 그의 본래 여행 동료였던 카메리노의 바울(Paul de Camerino)을 그들의 상관으로 모실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 정도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한이 분산되어야 했습니다. 즉 고메즈는 대학 내부를 다스리고, 바울은 그 외의 곳들을 다스려야 했던 것이지요.

바울 신부는 특히 먼 곳에서 외로움과 고난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지고 한낮의 무더위를 견디고 있는 이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편지에 신속하게 호의적으로 응답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보급품들을 당국으로부터 조달받아서 아무 문제없이 보관하고 그들에게 전달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우리 예수회의 이 형제들이 언제든지그대에게 편지를 쓰면 그대는 즉시 전심으로 그들이 요청한 업무에 착수해야 한다. 어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총독에게 관심을 요청해야 하든지 아니면 주교에게 해야 하든지 그들의 지원이 형제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면, 또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어떤 다른 영적인 또는 일시적인 도움이나 원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일을 해야 한다. 고통과 탈진 속에서 그날의 무더위와 짐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가장 작은 한 방울의 쓴맛이 페이지를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 권위에 대한 강조는 오직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표현되도록 하라. 책망이나 나쁜 감정, 또는 그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비통함을 안겨주는 어떤 것의 기미나 그림자도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음식이든 의복이든 또는 건강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한 것이든 즉시, 친절하고 관대하게 공급하라. 그대는 이 땅에서의 위안을 받지 못한 채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의 위대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동정해야 한다.


 일본선교와 혼란의 수습


사비에르는 비록 인도를 떠났어도 인도의 사역과 인도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그는 1549년 4월에 일본인 개종자 안지로(그때부터 바울이라고 부름)와 두 명의 예수회원, 즉 토레스의 코스마스 신부(Fr. Cosmas de Torres) 및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 형제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프란시스 사비에르


그곳에서의 그들의 사역과 그들이 설립한 교회들에 대해서, 16세기 후반 동안에 얼마나 그 교회들이 성장했는지, 그리고 그다음 세기에 박해 때문에 그 불꽃이 사그라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2백 년도 더 지난 1865년에 지하에 살아남아 있는 기독교의 여러 흔적이 발견되었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모든 교회들을 돌봐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사비에르 자신은 1552년 초에 인도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그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로부터 자신을 인도와 동양을 담당하는 예수회의 지회장(Provincial of the Society of Jesus)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사비에르가 돌아온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 있던 2년 9개월 동안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득이하게 고메즈와 카메리노의 바울 사이에 권한을 나누도록 했던 어려운 결정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메즈의 지배적인 성격을 상당히 견디기 어려워했는데, 고메즈는 달가워하지 않는 자기 동료들에게 매우 강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계획을 밀어 붙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성바울대학의 학생들을 모두 비우고, 그 학교를 포르투갈인 가정의 아들들을 위한 종합대학으로 만들려고 계획했습니다. 고메즈는 코친에 다른 대학을 세우고자 계획하면서 ‘자비의 형제단’(e Brothers of Mercy)에 속한 교회를 빼앗아 예수회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의 그런 고압적인 행위는 예수회원들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과 불화를 일으켰고, 심지어 총독까지도 성바울대학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하여 항의했습니다. 결국 고메즈는 학장직을 사임하게 되지요.

이런 사건들은 여러 곳에 있는 예수회원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고 그들의 규율에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비에르는 이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이 달갑지 않은 임무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몇 사람을 예수회에서 해고해야 했는데,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사비에르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함”(speaking in truth in love)을 써 보냈습니다.

가스파르 베르제(Gaspar Berze)는 오르무즈(Ormuz)에서 소환되어 성바울대학의 학장과 부지회장을 맡게 되었다. 고메즈는 처음에는 디우(Diu)섬에 있는 멀리 떨어진 기지로 강등되었고 또한 훗날 예수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코친에 있는 그 교회는 다시 자비의 형제단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중국으로의 마지막 여정, 그리고 죽음


석 달 동안 이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나자, 사비에르는 다시 한 번 인도를 떠나 그의 마지막이 될 여행을 시작합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사비에르는, 거대하고 유서 깊은 나라이자 일본인들이 자기 문명의 빚을 졌다고 여기는 중국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여행 중에 한 상인 친구로부터 중국 황제가 어떻게 외국인들이 그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을 죽음의 고통이나 종신형에 처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갔다가 붙잡힌 포르투갈 무역 상인들이 어떻게 광동(Canton)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중국에 가고자 하는 열정에 붙잡혔고, 만일 가능하다면 그 황제를 개종시키는 일을 시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계획은 그 무역 상인이 직접 공식 대사로 중국 법정에 파송을 받아서 죄수들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하고, 사비에르가 그와 함께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비에르는 베르제에게 자신의 대리자로서 지회의 모든 업무를 처리하도록 맡기고 1552년 4월에 고아를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대사로 가고자 하는 계획은, 항해를 통제하던 말라카에 있는 포르투갈 지구대장의 방해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사비에르와 그의 친구에 대해서 원한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비에르는 그곳으로부터 여행을 계속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포르투갈 밀수꾼들의 배에 탄 한 개인 승객으로서였을 뿐 그들은 사비에르의 목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불법 무역은 중국 해안에서 6마일 거리에 있고, 광동강 남동쪽 약 50마일에 있는 섬 산시안(shangchwan, 上川)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포르투갈인들은 본토에서 온 중국 무역상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비에르는 이곳에 와서 당국자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자신을 광동으로 몰래 데려다줄 위험한 임무를 맡아줄 수 있는 몇 명의 중국인을 만나려는 희망을 갖고 기다리던 중에 병에 걸려 1552년 12월 2일에 선원들이 그를 위해 만들어 준 오두막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그 섬에 임시로 매장되었고, 산시안에서 돌아오는 배에 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말라카로 옮겨졌다가 그곳의 교회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약 5개월 후에 사비에르의 친구들이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파내어 마지막 안식처인 고아로 옮겼습니다. 사비에르의 유해는 지금도 그곳에 있으며, 교황 그레고리 15세(Gregory XV)는 1622년에 그를 성인으로 공표했습니다.

고아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사비에르의 미이라

 
불굴의 개척정신, 그리고 한계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삶과 사역을 정리해 볼 때, 그가 인도에 처음 도착한 지 불과 10년 만에 사망했다는 점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그 10년의 시간 동안 그는 극도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여행했으며 어느 한 지역에서 결코 2, 3년 이상을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불굴의 믿음과 소망으로 새로운 민족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오기를 독려하였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여러 섬에서 선교지를 개척했는데, 이는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개척자적인 열정뿐만 아니라, 지역과 마을보다는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거시적인 전략에 있어서,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위해 스스로를 던지는 지치지 않는 에너지에 있어서 사비에르는 오로지 사도 바울과만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비에르는 사도 바울처럼 특히 그의 편지들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방대한 양의 편지들은 사도 바울의 그것과 비교될 만큼 매우 매력적인 그의 성품과 동료 및 개종자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줍니다. 단지 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만 사도 바울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사비에르도 그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에 대해서 어떤 잘못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프란시스 역시도 종교재판의 부당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방법으로 비판받아 왔는데, 그럼에도 언어를 배우는 일이나 사람들의 문화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기억하는 일과 신앙의 언어적 표현들을 신뢰했으며 언제든 다른 한 가지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탐색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비에르에게는 분명히 성급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뒤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길을 열어주는 선도자(pathnder)가 동시에 하나의 특정 분야에 집중하고 그 삶의 방식에 자신을 담그는 전문인 선교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전자의 역할에 자신의 삶을 내던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도 바울에게 언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비에르에게 그것은 하나의 장벽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리스어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그가 방문했던 단 한 나라에서도 그들의 일상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통역에 의지해야 했고, 어느 곳에서도 아시아의 언어들을 수박 겉핥기 이상으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랐던 여러 사람들이 그 부족함을 보충했는데요, 그와 동시대 사람 중 일본의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와 인도의 헨리 헨리케스(Henry Henriques)는 자신들이 사역했던 곳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에 능숙했으며, 그 다음 세기의 예수회 선교사들 가운데 몇 사람은 능숙함을 넘어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현지에서 이미 시작된 일에 대한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적이 결코 없으며, 실제로 꾸준히 늘어난 동료 선교사들에 의해 그 일들이 계속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까지 ‘어부들의 해안선’에 살던 그리스도인의 후손들이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사비에르는 단지 한 사람의 고립된 선교사가 아닌 동양 전역에 걸친 예수회 선교의 선구자로서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가 그냥 인도제국의 사도(the Apostle of the Indies)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한편으로 그런 업적과 그 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 식민제국과 그들의 해양 지배력 때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얻은 것만큼의 손실 또한 있었습니다. 아마 사비에르 자신이 인식했던 것처럼, 그의 계승자들 중 일부도 이를 보다 깊이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서구로부터 인도로 수입된 기독교는 포르투갈과의 관계 때문에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곧 포르투갈인과 인도-포르투갈인, 그리고 주로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기 위해 기독교인이 된 많은 수의 하층 카스트 인도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더 당시 사회의 주류 계층, 즉 교양을 갖춘 계급들에게는 거의 접근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사실상 소외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인들의 종교로, 그리고 서양인들로부터 이익을 바라고 어슬렁거리는 이들의 종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일어난 모든 역사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힌두들의 마음에 이미 형성된 인상은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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