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2> 가나의 도마와 시리아교회 이민자들

2020. 10. 14. 11:15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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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서 사역하고 순교한 직후 첫 두 세기 동안 말라바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공백기의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18세기의 역사학자인 밍가나(Mingana)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 바는 사도 도마의 순교 후 인도와 말라바르에는 설교자나 지도자가 없었으며 목회자 없이 남녀 신도들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록된 말씀이나 예전, 신앙과 관습을 지도해줄 목회자나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교신앙을 가진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켜나가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 없이 방황하던 도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직자가 파송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주후 295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페르시아만 상단,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바스라의 주교였던 두디(Dudi, David)가 자신의 주교직을 버리고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디서 살았는지,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을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주교가 인도에 방문했다는 첫 번째 언급이고, 그가 다름 아닌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써 메소포타미아, 즉 동방 시리아교회와 인도교회의 초기 관계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니케아공의회(A.D. 325)에서 결의된 신조에 서명했던 주교들 가운데 ‘모든 페르시아와 대인도의 교회’를 대표하여 서명한 사람은 ‘페르시아의 요한’(John of Persia)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인도에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페르시아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입니다.

또한 주후 522년 경,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 무역상으로서 아라비아해를 둘러썬 여러 나라들을 방문했던 코스마스(Cosmas)의 기록에 의하면 실론섬과 말라바르 지역에 성직자와 신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있었으며, 칼리아나에는 페르시아에서 파송된 주교와 성직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 섬에 프톨레미 왕조 시절에 이주해온 헬라어를 사용하는 거주민들과 그 섬의 원주민들로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을 목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코스마스는 페르시아 제국 주변의 방대한 지역에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기록들을 살펴볼 때 당시 아라비아해 주변과 페르시아 제국 영토 내에 있던 모든 교회들은 페르시아교회, 즉 시리아교회의 관할 아래 있었고, 인도교회 역시 그 관할권 아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도마시대 이후 방치된 도마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시리아교회의 일부가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말라바르의 기독교 공동체가 시리아교회에 속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구체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페르시아교회의 주교와 성직자들을 포함한 집단이주 때문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주는 대략 주후 345년 쯤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가나의 도마(Thomas of Cana), 또는 가나안인 도마(Thomas the Cannaite), 예루살렘의 도마(Thomas of Jerusalem)으로 불리는 지도자와 성직자, 남녀, 아이들을 포함한 3백 내지는 4백 가정의 페르시아 기독교인들이 말라바르의 코친 북쪽 코링갈로르(Coringalore)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훗날 인도 시리아교회의 야곱파에 속한 마르 토마 4세(Mar Thoma IV)가 1721년에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도마의 순교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어느 날 사도 도마가 에뎃사(Edessa) 마을 대주교의 꿈속에 나타나 ‘그대가 인도의 성도들을 돕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사도 도마는 또한 시리아인들의 왕이자 에뎃사의 왕이었던 아브가르(Abgar)에게도 나타나 인도를 도울 것을 요청했다. 이후 왕과 대주교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이 있는 가나안에서 온 가나안 사람 도마의 지도 아래 어린이와 성인들, 성직자, 남여 신도들로 구성된 336 가정이 인도에 왔다. 이들은 모두 바다를 항해하여 코링갈로르에 들어왔으며, 당시 인도를 다스리던 쉬라몬-피루말(Shiramon-Pirumal) 왕으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거주했다. 이들은 주후 345년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때로부터 우리나라의 교회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 그 수가 72개에 이르렀다.”

 

시리아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크랑가노르에 ‘마하데바라빠뜨남’(Mahadevara-patnam)이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에 살던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는데요, 이는 그곳의 현지인들과 통혼했던 그룹과 순수하게 시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했던 그룹이 그것이었습니다. 전자, 즉 현지인들과 통혼하며 교류했던 이들은 주로 마을 북쪽에 살았기 때문에 북부인, 혹은 ‘노티스트’(Northists, Vadakumbagar)라고 불렀고, 반대로 시리아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킨 사람들은 주로 남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남부인, 혹은 ‘사우티스트’(Southists, Thekkumbagar)라고 불렀습니다. 이중 북부인들이 시리아인 공동체의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남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현지 인도인들은 물론, 심지어 북부인들과도 통혼을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가나의 도마’의 직계 후손이자 그에 속한 집단이라고 표현했고 심지어 각 가문마다 시리아 부족의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부인들은 활발하게 토착신앙을 가진 이웃 부족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통혼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적극적으로 기독교 공동체로 이끌어왔기 때문에 남부인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시리아 기독교인들의 이주로 인해 기존의 도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체계적인 신앙훈련과 목회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사도 도마시대 이후 그곳에 남아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시리아 공동체 안으로 흡수되어 동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리아 기독교인들의 두 번째 이주는 주후 823년 경에 이루어졌는데요, 이 때는 시리아인 주교 마르 사포르(Mar Sapor)와 마르 빠루트(Mar Parut)가 당시 유명한 상인이었던 사브리쇼(Sabrisho)의 인도로 상당한 규모의 이주민들과 함께 현재의 퀼론(Quilon) 근처에 와서 정착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페르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이 급격히 이슬람화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이주해왔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말라바르에서 당시의 지역 통치자들에게 환대를 받았고, 정착지는 물론 정착을 위한 보조금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고 살 수 있도록 후추 무역에 대한 전매권까지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당시의 지역 통치자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14, 15세기까지도 상당한 지위와 부를 누리며 말라바르 지역의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존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가진 신분과 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신앙을 계승해 나가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치우친 나머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선교적인 사명을 소홀히 하게 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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