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6> 디암페르의 정복자 - 알렉시스 드 메네제스

2020. 11. 16. 10:45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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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교회 역사, 특히 2천년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말라바르 시리아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바로 1599년에 디암페르(Diamper, 현재 지명 Udayamperur)에서 열린 총회(syno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총회를 통해 대다수의 말라바르 시리아교회와 도마 기독교인들이 로마 가톨릭의 고아 대주교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자신들의 동방 시리아교회 예전과 교리를 포기하고 라틴예전과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적인 장면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포르투갈 출신 신부이자 고아의 대주교였던 알렉시스 드 메네제스(Alexis de Menezes, 1559-1617)였습니다. 필자가 번역한 《인도교회사》(CLC, 2019)에서는 그의 이름을 프랑스어식 발음으로 '메네즈'로 표기하였으나, 여기서는 그의 모국어인 유럽 포르투갈어 발음규칙에 따라 '메네제스'로 호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메네제스, 인도의 대주교가 되다


알렉시스 드 메네제스는 1559년 1월 25일에 포르투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초교육을 마친 후 15세에 그는 성 어거스틴 수도회에 가입했으며, 코임브라대학에서 철학과 수사학, 신학,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한 때 메네제스는 코임브라대학으로부터 학장직을 제안 받았지만 겸허히 거절하였고,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는 포르투갈 궁정사제로 임명되었으며, 성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불과 35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인도 고아관구의 대주교로 서임되었습니다.

메네제스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


1595년에 인도에 도착한 메네제스는 가장 먼저 마르 아브라함을 소환하여 그에게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상세하게 조사하고 유죄로 판명될 시 구금해두라는 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t VIII)의 지시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메네제스는 사실 그 일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지요. 당당한 성격에다 매사에 단호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동방교회의 전통에 대한 지식이나 동정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시아 교회의 문제들을 포르투갈의 방식과 로마 가톨릭의 권위로 해결해야 한다는 분명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포르투갈의 지배구조에 복종하지 않고 서방 가톨릭교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말라바르 교회의 모습은 동방 시리아 교회와 교황과의 관계가 무엇이었든지 그저 비정상적으로 간주될 뿐이었지요.

결과적으로 마르 아브라함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이제 시리아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고대관습으로부터 분리시켜 서방교회에 연결하는 정책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도에 있던 포르투갈 성직자들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교회의 주교가 온다는 사실이 그 정책을 추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마르 요셉의 죽음 이후 마르 아브라함이 30년 동안의 긴 주교직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페르시아와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라!


메네제스는 먼저 그 후계자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오는 것을 막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당시 포르투갈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항구마다 포고령을 내려 감시를 강화하자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총대주교에게 주교를 보내달라는 메시지를 전할 사절을 보내려고 해도 아무도, 심지어 변장을 하고서도 항구를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1597년 12월, 메네제스가 교황청의 고위관료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는 말라바르 시리아교구의 주교로 예수회원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편지 속에서 메네제스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들이 붙들고 있던 이단적인 것과 오류들로부터 모든 교회들을 정화하고, 순수한 가톨릭 신앙과 교리들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이단적인 문서들을 빼앗고 … 나는 그(주교)가 자연스럽지 않은 시리아어 사용을 점차 줄여가도록 지시할 것을 겸허히 제안합니다. 시리아어는 모든 이단 사상들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이므로 그의 사제들은 라틴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시리아어를 라틴어로 대체할 좋은 관리자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주교가 현재 코친의 주교이자 그 가까운 이웃인 이 도시(고아)의 부주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리아교회의 주교 임명은 메네제스의 권한이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마음속에 후보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회원인 프란시스 로즈 신부(Fr. Francis Roz)로서 시리아어와 말라얄람어 모두를 잘 아는 경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이 죽자 메네제스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당장에 로즈 신부를 관리자로 집어넣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아에 있는 포르투갈 당국자들로 인해 그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회원을 시리아교회 부주교의 상급자로 둘 경우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극도로 반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시리아교회 성직자와 평신도의 모임에서 시리아 주교가 올 경우 그에게 복종할 것이며, 라틴주교가 올 경우는 어떤 방침을 택할 것인지 고려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조지 부주교와의 줄다리기

 

메네제스는 계획을 변경하여, 마르 아브라함의 조카이자 시리아교회 부주교인 십자가의 조지(Archdeacon George of the cross)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주교직을 허락하되 로즈 신부와 예수회 신학교의 학장을 동료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습니다. 작고한 마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미 주교로서의 권한을 인정받은 조지는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했지요, 이어 메네제스가 두 예수회원들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 수정제안을 했지만 역시 이를 거절했습니다. 당시에 조지는 시리아 기독교인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고, 고아 대주교의 고압적 제안에 분노를 느낀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교구 내 기독교 마을들을 방문하고 있던 몇몇 라틴 사제들을 추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메네제스는 계속 편지로 압력을 가했고, 애초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조지는 점차 굴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최대한 신앙고백서의 서명을 미루었지만, 어쩔 수 없이 코친 인근의 바이핀(Vaipin)에 있던 프란시스 교단 교회에 출석하여 서명해야 했습니다. 조지는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자
신의 서명에 대해 설명하고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조지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여긴 메네제스는 과감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데요. 스스로 말라바르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시리아 교구를 자신의 책임 아래 두기로 한 것입니다. 공석이 된 안가말리의 주교 관구에서 고아의 대주교이자 ‘인도제국의 대주교’인 자신이 그 일을 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고, 자신이 가진 직위의 힘으로 포르투갈 영토 안에 있는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서 작고한 시리아교회 주교에 대해 제기된 혐의를 조사함과 동시에 교구행정을 위한 임시적인 조치를 수행하는 임무를 교황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법한 강탈 행위였습니다.

고아에 있던 포르투갈인들조차도 파생될 결과를 염려하며 충고했지만 메네제스는 이 시리아교회 문제를 끝내기로 결심하고 밀어붙였습니다. 1598년이 저물어갈 무렵 고아를 떠난 메네제스는 1599년 1월 26일, 수행원들과 함께 코친에 도착합니다. 그는 말라바르 지역 대부분의 통치자들과 포르투갈의 협력자인 왕의 우려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방문목적을 알리고 큰 액수의 돈으로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고 부주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를 초청하였습니다.

샅바싸움의 주도권을 쥐고


막상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조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대주교의 계획에 공개적인 반대보다는 조만간 그가 고아로 되돌아가고 기다리던 자신들의 주교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다시 올 것이란 희망을 갖고, 최소한 메네제스가 교회들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설교하게 하는 등 따르겠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후 조지는 3천 명의 무장한 호위 군중을 동반하고 자기 성직자 몇 명과 함께 코친에 스스로 출두하였습니다. 양측은 논의 끝에 바이피코타(Vaipicota)에서 만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다음날 메네제스는 몇 척의 배에 탄 포르투갈인들을 동반하여 수로를 이용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까지 행진해 가는 동안 호기심과 존경에 찬 군중들이 뒤를 따랐고, 메네제스는 그들을 향해 말라바르에서 자신의 첫 번째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본문은 요한복음 10:1이었는데, 설교의 핵심은 로마교회만이 유일한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참된 문이고, 총대주교들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도둑이요 강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후에 메네제스는 다음 날 교회에 와서 견진성사(당시 시리아교회에는 없었던 예식)를 받으라고 사람들을 초청했고, 그 견진성사를 마친 후에는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끝나기까지 부주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메네제스는 그들이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조지에게 자신의 장래 계획들에 대해 말했고 그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조지의 굴복과 시리아 기독교인들의 반발


바이피코타에서 머무르는 동안 대주교는 매일 시리아어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는 몇몇 기도문에서 바빌론의 총대주교가 ‘온 세상의 목자’로서 기도를 받고 있음을 발견하기까지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메네제스는 이 호칭은 오직 교황에게만 적합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크게 분노했고, 사적인 모임에 부주교와 핵심 성직자들을 불러 격한 어조로 이를 비난하면서 총대주교는 파문된 이교도임을 선언하고 기도문 가운데서 그에 대한 모든 언급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작성하여 조지 부주교와 두 원로성직자에게 이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그들은 억지로 서명해야 했고, 그 통지문이 교회의 정문마다 부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리아교회 신도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엄청난 소요가 발생하였습니다. 조지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서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가까스로 그들을 진정시켰지요. 나아가 포르투갈의 무력을 고려하면 군중들을 해산해야 할 현실적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메네제스와 포르투갈인들이 경고를 받았다고 여기고, 코친으로 가서 위험을 피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메네제스는 이를 거부하고, 교회방문 여정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이피코타에서의 사건이 알려지자 메네제스는 그 다음 방문한 세 곳에서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빠루르(Parur)에서는 남자 회중들만 무장한 채 교회에 왔으며, 그들은 견진성사 받기를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다음 장소에서는 사람들이 적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가 오는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부주교의 집이 있던 세 번째 장소에서 그는 며칠 그 집에 머물도록 초청을 받았지만 교회가 폐쇄되었음을 알고 스스로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부주교조차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회유와 협박, 그리고 외곽부터 허물기


이 시점에 메네제스의 포르투갈인 동료들은 다시 계획을 포기하고 코친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고, 그는 다시 이를 거절했지만 만일 그 사람들이 그런 적대감을 계속 보인다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메네제스는 조지에게 그 문제에 대해 와서 대화하자고 회유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받은 조지는 무장한 한 사람의 수행을 받으며 찾아왔고, 메네제스의 보트 위에서 회담이 열렸습니다. 많은 논쟁 후에 연내에 교리 문제 해결을 위한 총회를 개최하기로 동의했으며, 그 동안에 메네제스는 교회들을 방문하여 설교와 강복은 하되, 견진성사를 비롯한 주교로서의 다른 어떤 행위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 협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교회에 함께 방문했을 때, 메네제스가 설교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반-네스토리우스적인 주제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조지는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함과 동시에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메네제스는 조지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고 있거나 정치적인 문제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을 피하면서 퀼론까지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좀 더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몇몇 소도시 통치자들이 메네제스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들이 자기 영토의 시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 일부 지역에서 이미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행에서 반응이 호의적이라고 느낀 그는 그곳 교회들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견진을 시행하는 모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물론 부주교와의 협약에 위배되는 일이었지요. 메네제스는 조지가 자신을 떠남으로써 먼저 협약을 깼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수난주간의 대결과 최후결전을 위한 준비


수난주간과 부활절이 가까워오면서 메네제스는 다시 코친 왕이 지배하는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 메네제스의 행로에 대해 듣고 깜짝 놀란 조지는 공지문을 보내 시리아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저항하도록 독려하고 메네제스에게 복종하는 이들은 출교시키겠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동시에 왕에게는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점점 확대되는 대주교의 영향력을 점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험을 느끼고 불편해하던 코친 왕과 몇몇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를 등지게 하려고 노력했고, 그의 방식에 장애물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메네제스가 그 공격을 견디면서 그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포르투갈 정부의 힘을 빌어 불쾌감을 표시하자 그들은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한편 메네제스는 그 동안에 사제직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이던 후보자들을 자신이 안수해 줌으로써 자기 추종자를 얻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마르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부터 그 때까지 안수식이 없었기 때문에 안수를 기다리는 많은 젊은 부제들이 있었던 것이죠. 수난주간 전 토요일에 조지와 코친 왕, 그리고 기독교인 무사 그룹인 나야르들, 일단의 지역 시리아 기독교인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38명의 부제가 디암페르에서 메네제스로부터 라틴예전에 따라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총대주교를 부인하고, 교황 비오의 신조를 고백하는 것을 전제로 대주교인 메네제스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메네제스로서는 자신에게 충성할 많은 우군을 확보한 셈이었죠.

메네제스가 카두뚜루띠(Kaduturutty)에서 보낸 수난주간은 대립으로 시작되었지만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사람들은 코친에서 온 합창단과 더불어 완벽하게 진행되는 로마식 예전에 매료되었고, 수난주간 토요일에는 또 다른 많은 사제 후보자들이 서품을 받았습니다. 부활절 아침 예배 후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현관에서 자신들의 관습인 네르차(nercha), 즉 애찬을 실시했는데, 메네제스는 이 자리에 주교로 초청받아 애찬음식을 성별하였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순회하면서 환자들을 위로하고 선물과 돈으로 그들의 마음을 샀고, 동시에 시리아교회 주교들이 목회자로서 이런 일들을 너무나 무시해왔다고 유감을 표했습니다.

메네제스는 때로는 겸손하게, 그러나 때로는 공격적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상황을 주도했고, 성직자와 사람들 위에 점차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면서 친 포르투갈 세력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부주교는 멀리 떨어져 메시지로 비난하고 그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면서 최선을 다해 주민들과 통치자들에게 호소했지만, 능수능란한 대주교의 면전에서 감히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했습니다.

조지의 굴욕적인 항복


얼마 후 부주교가 낙심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메네제스는 그에게 항복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편지를 썼고, 결국 조지는 자신의 반대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유화적인 답변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네제스는 그에게 20일 이내에 직접 와서 자신의 면전에서 서명하라는 요구와 함께 합의서 초안을 보냈는데, 이는 결국 전적인 항복을 의미했습니다.

조지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부인해야 했고, 나아가 교황 비오의 신조를 고백해야 했으며, 시리아교회와 로마교회가 하나였고 동일하다는 교의를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한편, 바빌론 총대주교를 저주하고 더 이상 그와 어떤 소통도 지속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황이 보내고 고아의 대주교가 승인한 주교 외에 다른 어떤 주교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고, 메네제스를 자신의 주교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교구내의 시리아교회 서적들을 모두 가져와 조사한 다음 오류를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태워야 한다는 데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나아가 소집된 지역총회의 부름에 협력하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해야 했습니다.

조지는 코친 왕과 안가말리 관구 내에 있는 소집단 지도자들의 지원에 의지하면서 할 수 있는 한 그 일을 지연시켰지만, 마침내 메네제스는 그를 소환하는데 성공했고 바이피코타에 와서 서명해야 했습니다.
 

지역총회(Synod) 개최를 위한 준비


이제 남은 것은 지역총회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지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교회의 센터가 있는 섬인 안가말리에서 모여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메네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총회는 포르투갈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장소로서 코친 남동부, 수로 다른 편에 위치한 디암페르(우다얌뻬루르)에서 1599년 6월 20일에 모이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메네제스는 이 내용을 모든 교회에서 낭독하고 교회정문에 부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부주교를 비롯한 모든 시리아교회의 사제들은 물론, 각 지역교회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평신도 대표 4명씩을 선정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통지문이 발송되자 총회를 위한 준비가 세심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총회에서 통과시킬 ‘선언문’(decree)은 메네제스와 로즈가 작성하고 말라얄람어로 번역되었으며, 몇몇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회유와 왕의 지지를 확고히 하는 절차가 수행되었습니다. 이어서 메네제스는 삼위일체 주일에 후보자가 최소한 50명 이상으로 알려진 빠루르(Parur)에서 또 한 번의 안수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이제 총회에 모이는 새로운 성직자들 수가 기존 성직자 수를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디암페르 총회와 비극의 서막

미니어쳐로 재현한 디암페르 총회의 장면 (디암페르박물관, 께랄라 우다얌뻬루르)


1599년 6월 20일,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에 엄숙하게 시작된 총회는 26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시리아교회 쪽에서 133명의 사제와 20명의 부제 및 부보제들, 660명의 평신도 대표를 포함하여 총 813명이 참석했습니다. 대표단을 보내지 않은 교회는 단 두 곳뿐이었고, 이는 곧 완벽한 대표단이 모였다는 의미였지요. 메네제스는 포르투갈인 성직자들과 코친의 포르투갈인 정착지에서 온 선장과 관리들,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였습니다. 이들은 총회가 끝나고 선언문의 서명이 완료될 때까지 전원이 디암페르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동의해야 했고, 총회의 성공을 위해 로마와 시리아 양측의 예전으로 매일 예배를 드리되 대주교의 동의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모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인도 시리아교회의 운명을 가름하는 이 총회에서 고압적이기는 했으나 심한 저항 없이 포르투갈인들의 성직체계 및 교리, 서방교회의 많은 관습과 규칙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충성을 바쳐야 했던 총대주교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으며, 자신들의 여러 전통적인 관습들을 버리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전 언어로 사용되었던 시리아어와 약간의 수정을 거친 예전 자체등 주요한 몇 가지는 남겨졌지만, 전반적인 결과는 이제 그들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할 뿐 아니라 포르투갈 주교의 지배 아래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순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교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무지와 부도덕의 결말


동방교회의 하나로 존재해 온 그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인 사건들에 의해 로마교회와 동맹을 맺고 서방교회 조직의 일부가 되도록 강요받게 된 것이지요. 이는 메네제스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사실상 가장 강압적이고 부도덕한 절차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메네제스와 포르투갈인들은 말라바르교회를 완벽하게 로마 가톨릭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안녕을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기록한 로마 가톨릭 역사가들도 인정하듯이 그들이 이기심과 지나친 열심, 동방교회 방식들에 대한 무지와 공감 부족으로 인해 도를 넘은 부정행위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말라바르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디암페르 총회 포고문에 의해 부정하도록 강요당한 총대주교가 그 당시 로마 교황과 소통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총회에서 얼마나 강압적인 일들이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총대주교는 술라카(Sulaka)의 편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마르 요셉과 마르 아브라함 역시 그 총대주교 밑에서 인도에서의 공무를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네제스는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와 갈대아 총대주교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고, 상당수 시리아 기독교인들도 그 점에서 그에게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는 교황이 인정한 사람을 사실상 정죄한 것이지요. 비록 이전 교황들이 서방교회 조직 외곽에 있는 동방교회의 합법적인 영역으로서, 말라바르 및 말라바르교회 자체에 대해 술라카 편에 있는 총대주교들의 관할권을 인정해 왔다고 할지라도, 포르투갈인은 마르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비난하고 그를 이단으로 고발함으로써 결국 인도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교황청에 이해시켰고, 모든 상황을 포르투갈인의 관점으로 돌려놓았던 것입니다.
 

왜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왜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온순하게 복종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다지 저항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부주교를 지원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포르투갈인들의 고압적인 태도만큼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총회에서 그들이 침묵한 직접적인 이유는 메네제스가 이미 많은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시리아교회에는 주교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공격에 대응할 조직 자체가 미약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전통과 관습에 미련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들의 교리를 확고하게 수호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이미 여러 해 동안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고, 프란시스 교단 수도사들과 예수회원들을 비롯한 다른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통해 그것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했을 뿐 아니라, 이전에 자신들의 주교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교회와 시리아교회 사이의 차이점을 날카롭게 분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럽 개신교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황은 그들에게 최대의 적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로마 교황청을 음녀(Scarlet Woman)로 생각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지요. 나아가 때때로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포르투갈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그들에게 버거운 형제였지요. 문제의 핵심은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입니다. 포르투갈인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후추교역에 절대적인 힘과 능력을 갖고 있었고, 후추무역에 종사하던 많은 시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문제들이 그들의 통제 아래 있었던 것이죠. 그들이 가진 돈과 영향력은 힌두 통치자를 뛰어넘었고, 해상을 통제함으로써 시리아 기독교인들을 메소포타미아의 총대주교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도에 온 메소포타미아 주교들을 이단으로 고소하여 고아의 종교재판소에서 재판한 뒤 유럽으로 추방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말라바르에서도 소수 공동체인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포르투갈인들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역으로 포르투갈인들의 도움과 보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이점들 또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굴복했고, 차례로 포르투갈인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은 매년 교구 사제들에게 교구 유지비로 많은 돈을 주었고,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와 어떤 문제가 생길 때 포르투갈 권력의 지원을 받았으며, 후추 무역은 계속 번창했습니다.

디암페르 총회 후속작업, 그리고 인도판 분서갱유


총회 후에 메네제스는 시리아교회들을 방문하는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는 4개월 반 동안 인상적이고 장엄한 의식과 함께 넉넉한 기부금을 뿌리면서 말라바르 지역 교회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깔보르카트(Kalborkat)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콜루까따’(kolukatta)라고 부르는 일종의 사탕을 나눠줬는데, 아이들은 그 안에서 금화를 찾아내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고, 대부분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디암페르의 포고문을 시행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총회에 출석하지 않은 사제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교구사제들을 세우고 오랫동안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각 교회마다 네 명씩 집사(oeconomi)를 임명하였습니다. 각 지역에서는 포고문의 일부를 낭독하고 설명했고, 그 중 하나에 근거하여 결혼한 성직자들은 자기 부인들과 결별하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사역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다른 조항에 근거하여 시리아교회 문서들을 수집하여 검토하고, 이단적인 요소를 제거하거나 너무 멀리 나갔다고 판단이 내려지면 불태웠습니다. 총회는 몇몇 네스토리우스파 문서들을 거명하여 명확히 정죄했으며, 이 문서들은 발견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 즉시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서들, 예를 들어 시리아역 성경의 교정 같은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로즈 신부와 바이피코타의 예수회원들이 수행했는데요, 총회는 예전집들을 파기하기보다는 활용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기존 시리아어 예전은 총회에서 명한 수정을 거쳐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네스토리우스파 성자들의 이름을 제거하는 것, 총대주교의 이름을 교황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 빵과 잔을 축성한 후에 성체를 높이고 무릎을 꿇고 절하는 로마식 예전의 추가, 니케아 신조의 도입과 로마의 형식에 순응하는 성직 수임의 말들, 성찬 빵을 포도주에 적시는 의식을 미사집전 신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빵 조각만 나누어 주는 로마식 성찬 분배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 행정용어를 로마식 용어로 사용하는 것, 실제로 혹은 어쩌면 네스토리우스가 말했을 문구들을 수정하는 일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로즈 신부는 또한 라틴어 절기미사와 다른 성사의 예전들(신품, 세례 등)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여 기존 시리아교회의 예전들을 대체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메네제스가 말라바르교회에서 시리아어 사용을 억제하고 대신 라틴어를 소개하고 도입해야 한다고 했던 초기 주장을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가말리에 있는 성 조지 대성당 (St George Basilica Angamali)


한편, 시리아 주교의 주교좌가 있는 안가말리에는 다른 곳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과 문서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방문한 메네즈는 이런 대부분 책과 문서들을 모아 불태움으로써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가 다른 여러 곳에서도 자행했던 이 분서(焚書) 행위로 말미암아 오늘날 16세기 이전 인도 시리아교회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긴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문서들이 그곳에 존재했다고 가정하면, 메네제스 일행이 범했던 파괴행위는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밍가나(Mingana) 박사가 열거한 소실된 문서 목록이 안가말리에 소장되어 있던 대표적인 문서들의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의 애석함은 좀 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한 문서목록은 대부분 인도 밖에서 기록된 시리아교회의 책들이고, 지금도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중에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담고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통탄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지요.
 

시리아교회의 첫 번째 라틴주교, 프란시스 로즈


이 여행에서 메네제스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을 굴복시킨 것과 더불어 때때로 힌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얻었으며 그들 중 일부를 설득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코친에 방문했을 때는 심지어 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의 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과 자신이 고아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메네제스는 여행을 중단하고 다시 코친으로 돌아와 자신이 떠난 후에 말라바르 교구 운영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합니다. 그는 당분간 교구를 책임지도록 조지를 부주교로 임명하고, 주교가 임명되기까지 두 예수회 신부들, 즉 로즈와 신학교의 학장이 그를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후에 포르투갈 왕과 교황에게 누구를 그곳 주교로 임명해주도록 요청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지체 없이 그 후보로 메네제스를 제안했지만, 메네제스는 자신의 고아 대주교직 사임이 허락되지 않는 한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결국 그들은 토의 끝에 프란시스 로즈(Francis Roz)를 주교로 허락해 줄 것을 왕과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코친을 떠나는 메네제스


이 일련의 업무는 그가 코친에 돌아온 후 왕과 접견을 마친 후 결정되었고, 그는 항구까지 함께 온 부주교와 많은 시리아 그리스도인들과 작별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메네제스가 떠나는 것을 기뻐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모든 존경의 표시를 보였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단순히 아부라고 치부하기는 쉽지만 이제 그를 진실로 자신들의 강력한 후원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일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메네제스는 자신의 온갖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고,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코친항을 떠나 1599년 11월 16일에 고아에 도착합니다. 도착한 후 그는 자신이 고아를 떠나 있던 중에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0여 년간 대주교와 총독의 두 가지 직무를 겸하여 수행합니다. 그 후 1609년에 메네제스는 자신의 고국인 포르투갈로 소환됨으로써 마침내 인도교회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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