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8> 베스치 신부와 예수회 선교의 쇠락

2021. 1. 3. 16:09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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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 드 노빌리가 세상을 떠난 후 18세기까지 마두라선교회의 사역은 마두라에서 벨로르까지, 또한 탄조르에서 사띠야망갈람까지 타밀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대체로 드 노빌리가 시작했던 선교방법을 고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마두라선교회에서 사역했던 예수회 선교사는 한 번도 10명을 넘은 적이 없을 정도로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드 노빌리의 계승자들과 예수회 선교의 확장


그들 중에는 상층 카스트 힌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브라만 사냐시들도 있었지만
, 대다수는 수드라 및 하층카스트를 대상으로 사역한 빤다라스와미들이었습니다. 소수의 사제 선교사들이 방대한 지역을 담당하면서 이들은 현지인 교리교사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드 노빌리가 그토록 세우고 싶어 했던 브라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학교는 결실을 맺지 못했고, 인도 현지인 사제의 부재는 18세기에 이르러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 노빌리가 세상을 떠나던 시기 마두라선교회 관내 세례자 수는 4,016명이었으나,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1700, 그 수가 8만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사역했던 예수회 신부들은 드 노빌리와 마찬가지로 금욕과 고난의 삶을 살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도적인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1693년에 순교한 포르투갈 귀족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성 요한 드 브리또(St. John de Britto)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692년, 마라바 왕국의 타디아 테바르라는 왕자를 비롯하여 그 해에만 4천여 명에게 세례를 줄 정도로 성공적인 복음전도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드 브리또는 세례를 받은 왕자에게 첫 번째 아내만을 남기고 그가 취한 아내들을 돌려보내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왕족 출신의 한 아내가 앙심을 품고 왕에게 이를 탄원하면서 드 브리또와 그의 일행은 체포, 투옥되었습니다. 그들은 타디아 왕자의 구명활동으로 인해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추방당해 유배되었으나, 유배지에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타밀문학의 선구자, 조셉 베스치 신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마두라 선교회의 또 한 사람의 유명한 인물은 1711년부터 1742년까지 그곳에서 사역했던 이탈리아인 신부 콘스탄트 조셉 베스치(Fr. Constantine Joseph Beschi)입니다. 드 브리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고난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특히 사역의 초창기에 적대적인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여러 지역들을 유랑하며 생활했지만, 후기에는 무굴제국 장군인 찬다 사힙(Chanda Sahib)의 신뢰를 얻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트리치노폴리를 통치(1736-1741)하던 찬다 사힙은 베스치 신부를 재무장관으로 삼기까지 했는데 특정 마을들의 세입을 베스치에게 할당해 주기도 했습니다. 베스치는 그 세입원을 선교를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베스치는 1717년부터 주로 트리치노폴리 지역과 카우베리 삼각주 지역에서 자신의 사역을 진행하였는데, 콜레룬(Coleroon) 강의 북쪽 강변에 자리한 옐라쿠리치(Yellakurichi)가 그 사역의 주요 거점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기념하고 있는 피난처의 성모 마리아(Our Lady of Refuge)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이는 당시 기근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그곳 가톨릭교도들이 트랑케바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개신교 선교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결집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스치와 그의 동년배 이탈리아인 신부 베르톨디(Fr. Bertoldi)는 그곳에서 40년을 사역하였으며,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근거하여 교리교사들과 지도자급 그리스도인들에게 피정(避靜)을 주곤 했습니다.

마두라이에 인도전통양식으로 건축된 베스치 기념교회


그러나 베스치 신부가 유명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남긴 문학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타밀어의 대가였으며, 외국인이었지만 현지인들에게까지 고전으로 간주될만한 장편 서사시를 기록함으로써 특출하고 놀라운 업적을 남겼습니다. 「템바바니」(Thembvani), 즉 「시들지 않는 면류관」(the Unfading Garland)이란 이름의 세련된 고급 타밀어로 기록된 이 작품은 4행으로 이루어진 36편, 3615연의 대서사시로서, 구약성서에서 시작하여 주님의 탄생과 사역, 수난과 부활로 완성되는 성경의 구속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서사시의 방식으로 수많은 에피소드와 예언, 가르침이 인위적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가족이 이집트로 향하는 여정 동안에 성 미카엘이 나타나 이를 출애굽의 역사와 연관짓고, 돌아오는 길에 모리아 산 근처를 통과할 때는 아기 그리스도가 이삭의 희생을 회상하고 자신의 희생을 예언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베스치 신부는 이런 시문학 작품 외에 산문도 기록했는데요, 그 당시는 트랑케바르에서 개신교 선교가 막 시작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마두라선교회의 지도부는 개신교의 가르침과 문서들이 교구 내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베스치 신부에게 그에 응답하는 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에 부응하여 쓴 작품이 「베다 빌라깜」(Veda Vilakkam), 즉 「종교해설」입니다. 그는 또한 교리교사 교육을 위해 「베디아르 올루깜」(Vediar Olukkam), 즉 「교리교사들을 위한 규칙」을 썼습니다. 이 외에도 베스치는 타밀어 사전과 문법서들을 제작했습니다.

그가 저술한 좀 더 가볍고 흥미로운 작품이 있는데, 「뻐럼아르뜨 구루빈 까데이」(Paramartha Guruvin Kadey), 즉 「구루 뻐럼아르뜨의 이야기」란 책입니다. 이 책은 「덕망있는 구루 어수룩(Simple)과 그의 다섯 제자, 멍텅구리(Noodle)와 바보(Doodle), 안단이(Wiseacre), 엉뚱이(Zany), 그리고 얼간이(Foozle)의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들」이란 제목을 단 영문번역서로 출간되어 비타밀인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인도인 교리교사들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번역된 이 작품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의식논쟁과 예수회의 긴 투쟁


이 시기에 세례 통계를 보면 많은 이들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부들의 수가 너무 부족하고 그들이 담당해야 할 지역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때로는 그 지역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세례가 자주 이루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여러 해 동안 사제들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소요사태가 발생하거나 적대적인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사냐시 선교사는 자신의 방문을 감추기 위해 길에서 벗어난 인적이 없는 곳에 머물렀고, 사람들은 밤이 되어야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물론 좀 더 안전한 곳에서는 교회가 건축되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했지요.

한편 드 노빌리 시대 마두라의 페르난데스 신부에 의해 시작된 비판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1623년의 교황의 약식교서가 논쟁을 일단락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은 이를 ‘말라바르 의식’(Malabar rites)으로 알려진 것에 대한 결정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예수회원들이 ‘순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기독교를 힌두교에 너무 가깝게 동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회원들은 이에 대해 최소한 교회가 견고하고 광범위하게 세워지기까지는 그 나라의 관습과 편견들을 상당부분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힌두들은 기독교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이런 유사한 논쟁은 중국에서도 일어났는데요. 17세기 말 이 두 나라에서 많은 분량의 고소장이 교황청에 접수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위 말하는 ‘의식논쟁’(rites controversy)의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순수하게 선교방법론에 관한 문제 뿐 아니라, 예수회에 대한 반감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이 문제는 폰디체리의 카푸친수도회(프란시스 교단의 한 분파)가 로마로 보낸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서면 기소로 인해 제기되었습니다.

1703년에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이 문제들을 한 번에 모두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안디옥의 로마 가톨릭 총대주교 드 뚜르농(Patriarch de Tournon)에게 중국과 인도의 현장에 관련된 전권을 주고 특사로 파견하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드 뚜르농은 젊고 다소 충동적인 사람으로서 두 나라 중 어떤 나라도 경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문제를 깊이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남인도 폰디체리에 8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 때 불행하게도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1704년에 드 뚜르농은 예수회원들을 고소한 이들을 소집하여 회의하고, 몇몇 선교사들과 인터뷰를 한 후, 고소가 이루어진 16가지 ‘순응’의 관습들을 정죄하는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그 관습들은 당장 폐지되어야 했으며, 출교의 아픔을 겪은 선교회 지도자들은 그 포고령이 집행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누구든 이에 거부하는 선교사들은 파면되었습니다. 이때 금지된 주요 관습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례 받을 때 사제가 세례후보자에게 입김을 불어넣고, 입에 소금을 넣어주면서 윗입술과 두 귀를 침을 묻힌
    엄지손가락으로 접촉하는 예비의식의 생략

   * 이는 로마에서 예비신자들을 위한 고대 의식으로 사용된 축사행위의 유물로서 힌두들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짐.
② 힌두식 이름을 주는 것
③ 아동 결혼(조혼)
④ 행운을 가져오고 불행을 막기 위해 코코넛을 깨뜨리는 것
⑤ 여성이 생리기간 중 고백성사 또는 예배당에 오는 것을 금하는 것

   * 예수회원들은 이를 금한 적이 없다고 주장
⑥ 여자 아이에게 사춘기(첫 생리)가 왔을 때 공적으로 축하하는 것
⑦ 병에 걸린 하층 카스트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할 때 그들의 오두막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것
⑧ 그리스도인 음악가들이 힌두 축제에서 연주하고 춤추는 것을 허용하는 것
⑨ 카스트의 상징들을 사용하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힌두들의 책을 읽는 것

 

이 포고령이 발표된 후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회원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관습을 깨뜨리는 이 갑작스러운 시도가 강한 반대를 불러올 뿐 아니라, 자신들의 선교사역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확신하였으며, 포고령을 수정하거나 최소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호소하기 위해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교황의 특사가 자신들에게 연기에 관해 구두확인을 해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이 포고령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그 포고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포르투갈 주교들의 지원을 받아 싸우면서 처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논쟁이 갖는 또 하나의 복잡한 특징에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파드로아도를 무시하고 교황청이 인도에서 취한 조치에 대해 포르투갈인들이 갖는 분노와 억울함입니다. 포르투갈은 인도 전역에 걸친 교회의 관할권을 주장했지만 교황청은 특사의 임무에 대해 상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포고령을 재가했고 예수회 대표단은 어떤 공식적인 수정안도 얻지 못한 것이지요. 하지만 대표단은 교황이 자신들에게 가장 곤란한 조항들은 연기될 수 있음을 구두로 확인해주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도에서의 상황은 이전처럼 지속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30년 동안 그 논쟁은 이어졌고, 카푸친수도회원들과 그 외 사람들은 예수회원들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들은 파드로아도에 근거 예수회원들에 대한 징계시행을 꺼려했으며, 예수회들은 여전히 로마에서 자신들의 고발건을 압박하면서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734년에 클레멘트 12세는 이 중 몇 가지를 용인하고 표현을 부드럽게 수정했습니다. 즉, 침을 묻히는 의식의 생략을 10년 동안 허용하며 숨을 불어넣는 것을 개인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고령의 주요 항목들에 대해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1739년에 클레멘트 12세는 이에 대해 복종할 것을 선교사들에게 서약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교서들은 인도에서 공표되었으며, 이때까지 예수회원들은 자기 총장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일부는 서약했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연히 관습을 바꾸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포고령의 효과는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1744년에 베네딕트 14세(Benedict ⅩⅣ)는 그 문제에 대한 최종교서(Omnium Sollicitudinem)를 발표합니다. 이 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이전의 역사를 개괄하고, 이전의 결정들을 확정했으며, 예수회원들은 이를 따르든지 아니면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서는 두 가지 용인사항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필요한 곳에서 세례의식들에 대한 면제를 추가로 10년 동안 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더 놀랄만한 것으로서 특정 사제들이 억압받는 하층 계급들만을 위해 사역할 수 있도록 구별해야 한다는 제안을 승인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빤다라스와미들의 이전 사역이 좀 더 제한된 형태로 부활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후에는 더 이상의 반대가 없었습니다.

예수회의 몰락과 남인도에서의 시련


예수회 선교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서, 최종교서가 발표된 지 15년 후에 포르투갈 정부에서 한 가지 재앙이 인도에 있는 예수회원들을 덮쳤습니다. 수년 동안 유럽에서 다양한 이유로 인해 예수회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한 가지 사건이 공적인 문제들 가운데서 발생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예수회원들이 폭동을 교사하고 왕의 목숨을 노린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입니다. 1759년에 포르투갈 정부는 국내 및 해외 영토에서 예수회를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 1764년에는 프랑스에서, 1767년에는 스페인에서 같은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후 이 나라들은 교황에게 이에 대한 조치를 내리도록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1773년에 교황 클레멘트 14세가 전 예수회의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백러시아와 프러시아에서 통치자들의 보호아래 예수회가 존속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예수회가 재승인을 받기까지는 4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1759년의 진압 이후 포르투갈령 인도에 있던 예수회원들은 체포되어 강제 추방되었고 범죄자들처럼 투옥되어야 했습니다. 내륙에 있던 이들은 죽기까지 그곳에 남아있었지만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사람들도 오지 않았고 선교자금 역시 중단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예수회 선교사는 더 이상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사역을 심히 약화시켰고, 선교사들이 사라진 빈자리를 메울 인도인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타격은 더욱 컸습니다. 오직 교리교사들만 남아 사역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몇 명의 고아 사제들이 서부 해안에서 파송되었지만, 그들은 이런 종류의 사역환경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1776년부터 마두라와 마이소르, 카르나틱의 선교사역은 대부분 폰디체리에 근거지를 둔 파리 외방선교회에 위임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남아있던 이전 예수회원들이 파리선교회에 합류했지만, 선교회에서는 대목(vicas apostolic)과 5, 6명의 세속 사제들을 보내는 것 외에 그 자체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축소된 사역을 진행하기가 버거웠고, 문제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 마이소르 전쟁과 티푸 술탄(Tipoo Sultan)의 박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고 힌두교로 되돌아가거나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남인도에서 예수회 선교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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