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9> 지겐발크와 트랑케바르 선교

2021. 1. 27. 21:59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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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선교사들이 타밀나두(Tamilnad) 지방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 같은 타밀나두 에 인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은 18세기 초반 무렵입니다. 17세기 동안 포르투갈을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의 무역 회사들도 인도에 근거지를 설립해 왔습니다. 새로 인도에 온 이들은 대부분 개신교도였고 그들이 정착지는 대부분 인도 동해안 지역이었지요.

네덜란드는 풀리캇(Pulicat, 1609), 사드라스(Sadras, 1647) 그리고 나가빠탐(Nagapatam, 1660)에, 영국은 마술리빠탐(Masulipatam, 1622), 마드라스(Madras, 1639, 현재의 첸나이), 쿠딸로르(Cuddalore, 1683)에, 그리고 프랑스는 폰디체리(Pondicherry, 1674)에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덴마크는 인도교회사에 그 이름이 잘 알려진 두 곳에 정착지를 세웠는데, 하나는 마드라스주 탄조르 구역 안에 있는 트랑케바르(Tranquebar, Tarangambādi)이며, 또 하나는 뱅갈만 캘커타 근처에 위치한 세람포르(Serampore, 1976)였어요.
 

개신교 선교의 여명


로마 가톨릭 교도들인 프랑스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개신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개신교 선교는 그들의 정착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인도인들에게 개신교를 전파하려는 어떤 정책도 없었고, 그런 의도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역과 거기에서 오는 이득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었죠. 그들은 자국민을 위해 일할 목사(Chaplain)들을 데리고 왔지만, 그 목사들 역시 그들이 접촉한 일부 인도인 가운데 어떤 이들이 곳곳에서 스스로 관심을 갖기 전까지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대부분의 다른 개신교도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유럽 개신교회가 16세기 초반 이후로 존재해 오기는 했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늦게야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교황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유럽 개신교회들은 주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을 계속해야 했고,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국가의 지지를 받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 다른 개신교 분파들과 서로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논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로마교회는 비기독교 지역들을 향한 선교사역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지평은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즉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인 유럽 문명의 기독교 국가들에 오랫동안 제한되어 있었지요. 서로 다른 유형의 개신교파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수의 사람들이 그 책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1698년, 영국에서 잉글랜드국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에 의해 ‘기독교지식진흥회’(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SPCK)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조직의 목적은 영국과 웨일즈에서 자선학교를 유지하고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문서들을 보급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으로 국내와 세계의 다른 지역에 기독교의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1701년에는 ‘기독교복음선포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SPG)의 해외분과가 설립되었습니다. 잉글랜드국교회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고 왕의 특허장에 의해 설립된 이 협회는 해외에 있는 영국 사람들에게 잉글랜드국교회의 돌봄을 제공하는 동시에 세계의 비기독교 종족들을 복음화하는 것을 목표로 천명했습니다.

인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


하지만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들을 인도로 파송할 생각을 품은 사람은 루터교도인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 4세(Frederick IV)였습니다. 그는 궁정 목사에게 적합한 인물을 찾도록 명했지만 궁정 목사는 덴마크에서 그에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한 채 독일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부탁합니다. 이에 지겐발크(Bartholomew Ziegenbalg)와 플루차우(Henry Pluetshau)라는 두 젊은 신학생이 인도에 가기로 동의합니다.

이들은 17세기 마지막 4반세기에 독일 루터교회 안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부흥 운동이 낳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경건주의는 루터교회가 경직된 교리에 주요 강조점을 두는 데 반하여 개인적인 헌신에 초점을 두고 있었어요. 이 경건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프랑케(A. H. Franke) 교수였습니다. 이 두 젊은 신학생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할레대학교(Halle University)에서 그의 지도로 공부하게 되지요.


많은 루터교회 성직자들이 경건주의를 비판했지만, 독일 루터교 감독은 그들이 덴마크에 가서 안수를 받는데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이 두 사람은 왕의 개인적인 후원으로 ‘왕정 선교사’로서 트랑케바르(Tranquevar)에 파송되었습니다. 따라서 인도 최초 개신교 선교사는 덴마크왕에 의해 보내진 독일 루터교도들이었죠. 그들은 1706년 7월 9일에 트랑케바르에 도착했습니다.

독일의 할레대학교(Halle University)
 

환영받지 못한 선교사들


트랑케바르의 덴마크 성채(Denish Fort)

하지만 트랑케바르 당국자들은 그들이 오는 것에 대해 아무런 통지도 받지 못했고, 그들을 싣고 온 배의 선장은 당국자들에게 그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장은 개인적인 이유로 이 두 사람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두 선교사는 그 배에서 해안까지 이동할 보트를 얻기까지 3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육지에 상륙했지만 덴마크령 정착지로 들어가는 성 입구에서 임명장을 제시하고 덴마크 사령관의 허락을 얻기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사령관 하시우스(J. C. Hassius)는 몇몇 위원들과 두 명의 덴마크 종군목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이 두 선교사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런 억지스러운 입국허가를 받은 후 두 선교사는 시장의 공식 파티에 참석하러 갔지만 그들은 파티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거리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한 젊은 관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자기 처가로 데려가기까지 그들은 온 밤을 그 시장 거리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 그 관원의 가족은 그들을 위해 포르투갈인 구역 안에서 집을 구해 주었습니다.
 

첫 개신교 선교사들, 사역을 시작하다


인도 동부해안 트랑케바르의 덴마크인 정착지 풍경

지겐발크와 플루차우는 포르투갈어와 타밀어를 배우기 위해 준비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어는 남인도 유럽 무역 근거지에서 사용되는 통상언어였고, 타밀어는 그 지역 사람들의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덴마크 동인도회사의 부대에 근무하는 많은 독일 출신 군인들 가운데서 사역 분야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를 집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사역 분야는 유럽인들의 하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인들이 매일 2시간 정도 기독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러 갈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사령관을 설득하였습니다. 아마도 부분적으로 그 명령이 허락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처음 예비자(교리교육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사람들과 함께였습니다.

1706년 11월, 지겐발크와 플루차우는 포르투갈인 주거지에서 그 다섯 명의 예비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다음 해 5월에 덴마크교회 전체신조를 점검한 후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은 고아들의 후견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고아를 입양하곤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작은 고아원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였으며 독일어도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들은 포르투갈어와 타밀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지겐발크는 언어를 습득한 후 힌두들과 타밀어로 종교적인 토론을 시작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타밀어로 말하고 힌두들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토론하는 데 관심을 가진 유럽인이 매우 드물었기에 그는 많은 청중을 얻게 됩니다.

지겐발크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와 대화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규모 회중이 형성되었고, 1707년 초가을에 작은 선교교회가 성 밖에 세워졌고, 첫 번째 타밀개종자들 아홉 명이 그 다음 달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행스럽게 지겐발크는 언어를 배우는 데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 은사와 치밀한 습관들 덕에 지겐발크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타밀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겐발크가 플루차우보다 언어습득 진도가 빨랐기 때문에 타밀인 사역에 집중하고 플루차우가 포르투갈인 사역에 집중하게 된 것은 당연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인의 도움 없이 타밀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지겐발크는 어린이 문답 교육에 사용하기 위한 루터의 소요리문답 번역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설교와 소책자, 그리고 학교 교재들을 차례로 번역합니다.

도착한 지 2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인도인들의 언어로 시도해 보지 못한 사역, 즉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도서와 소책자의 출판은 1712년, 유럽에서 들여온 인쇄기 덕택에 더욱 쉽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책의 사본들을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들어야 했지요. 남은 생애 동안 지겐발크는 부지런히 글을 쓰고 번역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신약성경의 번역을 마치고, 구약의 룻기까지 번역을 마쳤습니다. 또한 타밀-독일어 사전을 편찬했고, 남인도 힌두교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독일어로 집필하였습니다. 그 독일어 원고들은 한 세기 이상 지난 다음에야 출간되었습니다.

사령관 하시우스와의 갈등


이 두 선교사가 극복해야 할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령관 하시우스의 적대감이었습니다. 그와 선교사들 간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하시우스는 두 선교사가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아니 전혀 동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선교사들이 왕의 직접적인 권위로 파송을 받아 온 것과 그에 근거하여 어떤 독립적인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분개했습니다. 하시우스는 그들이 쓸데없이 참견하며 복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선교사들은 그를 악의가 있는 사람이요 독재자라고 보았습니다. 때로는 지겐발크와 플루차우가 너무 솔직했기 때문에 자주 충돌이 있었겠지만, 어떤 도전이건 간에 하시우스는 분명히 그들을 폭압적으로 다루었지요.

1708년 11월에 최악의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지겐발크는 한 과부가 연루된 사건을 정의롭게 처리해 주도록 편지를 썼는데, 이에 대해 하시우스가 격분하여 그를 체포했고, 4개월 동안 성안에 있는 독방에 그를 감금했습니다. 또한 플루차우와 그의 조력자들, 그리고 회중 중의 몇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결국 여론은 사령관에게 반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하시우스는 자신이 너무 심하게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령관과 그의 부인이 독방에 갇힌 지겐발크를 방문해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지겐발크는 석방 요청 탄원서에 서명하며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 재판에 자진 출두하여 진술하겠다고 한 후에야 풀려나게 됩니다.
 

조직적인 선교동원과 협력


지겐발크와 플루차우가 받은 인상들과 앞으로의 사역 계획을 기록한 편지들은 독일에서 출간되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1707년에 그들이 프레드릭 왕에게 쓴 편지, 즉 사령관의 행위에 대해 고발하는 편지는 여기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하시우스가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보이며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그 편지를 부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세 명의 새로운 선교사의 도착이란 결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루엔들러(Gruendler)와 조던(Jordan), 그리고 뵈빙(Boevingh)이 1709년에 트랑케바르에 도착한 것이지요. 그들은 많은 선교비와 선교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과 함께 프레드릭 왕이 하시우스 사령관에게 선교사들에게 모든 필요한 지원과 보호를 제공할 것을 명확히 지시한 내용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이 돈으로 넓은 집을 마련하고 모든 선교사들, 그리고 타밀어, 포르투갈어, 덴마크어의 세 학교가 사용하기에 넉넉한 부지를 구입했으며, 선교사역은 보다 더 견고하고 조직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선교의 거점이 되었던 포라이야(Poraiyar) 마을에도 농장을 구입했지요.

유럽에서의 관심이 더 커지면서 이는 영국에도 확산됩니다. 영국의 기독교지식진흥회(SPCK)는 선교사들을 파송하지는 않았지만 후원금을 모금해 주고 인도에서 사용할 포르투갈어 신약성경 같은 책들을 인쇄하여 보급하는 등 값진 도움을 주었습니다. 1712년, 트랑케바르에 세워진 인쇄소 역시 그 선교회의 선물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덴마크 왕은 연중 세입에서 매년 2,000달러를 따로 구분하여 선교사역을 위한 항구적인 재정으로 만들었습니다. 1714년에는 코펜하겐에 선교부를 설립함으로써 서구에 선교조직이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주목할 만한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요,

첫째, 덴마크에 있는 선교회는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둘째, 대부분의 선교후보생은 독일에 있는 할레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셋째, 영국의 기독교지식진흥회는 선교비와 물품들을 추가로 지원했습니다.
 

트랑케바르 선교회의 사역내용


트랑케바르의 선교 정책과 일상적인 사역들은 1713년, 그루엔들러의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민족의 언어로 기도하고 복음을 설교한 후에 그가 주로 강조한 점들은 다가오는 세대에게 기독교 교육을 해줄 자선학교의 설립 및 교회와 학교를 위한 사역자들을 준비하는 일, 기독교 문서의 출판과 보급, 가가호호 방문하며 가르치는 인도인 교리교사들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교육하는 일, 그리고 사역내용 보고와 새로운 지침을 주기 위한 선교사들과 인도 사역자들의 주간 모임 등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의 목적은 단지 숫자를 늘리거나 표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기독교 진리를 내면화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트랑케바르에서 주목할 만한 개종 사례 하나를 들자면 1709년에 세례 받은 카나바디 바티아르(Kanabadi Vathiar)라는 이름의 젊은이입니다. 그는 지겐발크의 현지어 교사(munshi)의 아들이었는데 지겐발크는 그에게 자신의 언어 학습을 돕게 했으며, 교리서와 다른 기독교 소책자들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이 청년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일을 통해서입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부터 학교 교사로 고용되었으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시적 재능을 교리문답서와 복음 이야기를 타밀어 운문으로 옮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이것을 아이들에게 노래로 가르쳤습니다. 무겁고 서구적이었을 요소들을 인도적인 느낌의 즐거운 노래로 가르친 것이지요.

카나바디 바티아르 역시 다른 많은 개종자처럼 같은 인도인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그들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감언이설로 회유 당했으며, 독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한동안 트랑케바르를 떠나,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난 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1710년에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힌두교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트랑케바르 사역의 확장


1709년에 세 명의 선교사와 선교비와 후원물품이 도착한 후 지겐발크는 트랑케바르의 경계를 벗어나 덴마크 당국자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사역의 중심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가파탐(Nagapatam)을 방문했고, 북쪽으로는 마드라스까지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 번 이상 그곳에 방문했고 ‘기독교지식진흥회’(SPCK)와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 궁정 목사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트랑케바르에서는 사령관의 적대감과 그 배후의 의심스럽고 제한적인 동인도회사의 정책이 여전히 계속되었고, 오해를 제거하고 문제들을 더 나은 기반 위에 놓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어떤 조치가 이루어지기까지 선교사역은 결코 완전한 자유를 갖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겐발크는 1709년에 덴마크에 가려고 계획했으나 하시우스가 덴마크로 가는 배에 승선을 금지했습니다. 플루차우는 1711년에 덴마크에 가긴 했지만 어떤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편 그 와중에 하시우스가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1714년에 지겐발크와 마지못해 화해합니다. 그 해에 지겐발크는 덴마크로 가는 배를 타게 되죠.

덴마크에 도착한 지겐발크는 자신이 선교 감독으로 임명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왕을 알현하고 트랑케바르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왕과 다른 관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보고 외에 다른 보고 역시 이미 덴마크 왕에게 도착해 있었습니다. 격렬한 논쟁 후 동인도회사 책임자는 선교 활동에 장애가 되었던 모든 명령을 철회했고, 하시우스는 다른 사령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지겐발크는 독일로 여행을 했고, 이 기간 중 아내와 결혼을 한 다음 영국을 거쳐 마드라스로 항해하는 영국 배를 타고 인도로 돌아옵니다. 그가 다시 트랑케바르에 도착한 것은 1716년 8월 말경이었지요.

일련의 새로운 사건들을 축하하듯, 그가 돌아온 후 수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새 예루살렘교회’(New Jerusalem Church)였습니다. 같은 해 추진된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교사와 교리문답 선생을 양성하는 훈련학교였습니다.
 

선교부 총무 벤트와의 갈등 


불행히도 그 다음 4, 5년 동안은 벤트(Wendt)라고 부르는 코펜하겐의 선교부 총무와의 논쟁으로 어두워졌습니다. 벤트는 지겐발크의 사역비가 늘어나는 것을 경고했고 지겐발크와 그루엔들러를 압박하는 강경한 입장의 선교정책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이 서구에서 보낸 돈으로 부동산을 취득하고 집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짓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선교사들이 부득이하게 인도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야 했던 재정적인 도움도 반대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은 전적으로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영적인” 일에만 헌신해야 하며, 인도교회는 스스로의 책임아래 자신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이제 막 결혼한 지겐발크와 그루엔들러의 급료 지급까지 반대했습니다. 이런 그의 비난 중 몇 가지는 아마 18세기 말엽 선교사 중 한 사람이 “트랑케바르 선교는 거대한 빈민구호소(almshouse)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던 언급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외국 돈을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을 인식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벤트는 실제 상황에 전혀 접촉할 수 없는 단지 이론가일 뿐이었습니다. 지겐발크는 자신들이 돌보던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해서 심지어 세례 받는 아이들에게 입힐 흰 천 조각 하나도 구입할 여유가 없다는 것과, 그런 상황들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음을 그에게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벤트는 선교비를 중단시켰습니다.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그 후의 트랑케바르 선교


이 논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지겐발크는 마침내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719년 2월, 서른여섯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루엔들러 역시 13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자 선교사역을 담당할 책임이 이제 인도에 온 지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세 명의 선교사에게 넘겨졌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덴마크 본부에 있던 이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덴마크 왕은 벤트를 그 직위에서 해임하였습니다.

지겐발크와 그룬엔들러의 죽음으로 인한 위기 속에서 사역의 즉각적인 확장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다른 위기도 있었습니다. 신임선교사 중 리더로 추정되는 슐츠(Schultze)는 타밀 회중들의 소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소요는 비록 선의의 말이었지만 그가 교회 안에 존재하던 카스트에 대해 성급하게 공격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 즉 그들 이전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개종자들 가운데 다양한 수드라 카스트들로부터 개종한 이들과 지금은 ‘지정(scheduled) 카스트’로 알려진 불가촉천민에서 개종한 이들 사이의 구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형태로 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 교회’ 예배당에서 수드라 남자들은 본당 회중석의 한 편에 앉았고, 지정 카스트의 사람들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수드라 여인들 역시 십자형 교회당의 한쪽 날개 부분에 앉았고 지정 카스트의 여인들은 그 반대편에 앉았습니다.

성찬식 때는 모든 수드라 카스트의 남자와 여자들이 먼저 성찬에 참여하고, 지정 카스트의 사람들은 그 다음에 참여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차별이 학교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선교사들이 아디 드라비다(Adi Dravida) 어린이 중 좀 더 총명한 아이들에게 포르투갈어를 가르치고 서양 옷을 입히며 이런 차별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포르투갈인’(Portuguese)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슐츠는 규칙을 통해 이런 차별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그 결과는 반대와 불평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트랑케바르를 떠났고 1725년에 도착한 신임 선교사 왈터(Walther)와 프레시어(Pressier)는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회복시킴으로써 평화를 찾았습니다.

트랑케바르 선교회의 탄조르 진출과 인도인 지도자들


그 다음 해, 트랑케바르선교회의 영향력은 인접 지역인 탄조르 왕국에까지 미쳤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예수회 선교 결실로 많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트랑케바르선교회에서 발간한 책을 읽었거나, 이미 개신교도가 된 이들의 설득으로 개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중 유명한 인물인 라자나이켄(Rajanaiken)은 아디 드라비다(Adi Dravida) 출신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탄조르 왕국의 군대에서 하급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읽는 법을 배웠고, 자신이 접한 기독교 서적들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지겐발크의 신약성경과 교리서를 읽고 개신교의 가르침에 흥미를 갖게 된 그는 트랑케바르에 방문하여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고, 마침내 그들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큰 열정을 가졌는데 힌두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업무상 탄조르와 람나드(Ramnad) 지역에 파견되었을 때 두 곳에서 역시 열정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탄조르에서 돌아온 후 그는 군대를 그만두고 교리문답 교사가 되었으며, 그 지역 개신교 신자들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은 가톨릭 교리문답 교사의 아들인 사띠아나덴(Sattianaden)입니다. 라자나이켄의 영향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개신교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로마교회로 돌아갔지만, 아들은 트랑케바르선교회의 교리문답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절은 자연스럽게 로마교회의 반감을 사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베스치 신부(Fr. Beschi)는 자신의 글 및 다른 방법들을 통해 트랑케바르 선교사들을 ‘루터파 무리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확산을 점검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고, 라자나이켄과 다른 이들도 폭력적인 반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탄조르 왕국에서의 이런 활발한 활동은 첫 번째 인도인 목사의 안수로 이어집니다. 그 첫 번째 목사는 선임 교리문답 교사 중의 하나인 아론(Aaron)이었습니다. 쿠딸로르(Cuddalore)의 힌두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지겐발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15년 동안 학교 교사와 교리문답 교사로 일해 왔습니다. 그는 1733년 12월에 안수를 받았고, 마야바람 교구의 목사로 임명되어 1745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목회했습니다. 다른 교리문답 교사였던 디오고(Diogo)는 원래 로마 가톨릭 가정 출신이었지만 트랑케바르의 미션스쿨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1741년에 안수를 받고 탄조르, 띠루빨라투르(Tirupalatur)와 꿈바코남(Kumbakonam) 지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간헐적으로 다른 목회자들의 안수도 이어졌는데, 모두 14명의 인도인 목사가 구 트랑케바르선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 이 포스팅은 필자가 번역한 "인도교회사"(C. B. Firth)의 내용을 발췌 재정리한 것으로서, 무단전재와 복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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