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11> 윌리엄 캐리와 그의 동료들

2021. 2. 19. 08:35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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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교의 세기의 문을 연 현대선교의 아버지, 열정적인 사회개혁가, 뛰어난 번역가, 저명한 식물학자, 박식한 문화인류학자..., 구두수선공이었다가 인도선교사가 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를 묘사하는 수식어들입니다. 윌리엄 캐리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리지만, 여기서는 인도교회사의 저자 C. B. Firth의 기록을 재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캐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주로 그가 서구 제국주의적이고 물량주의적인 선교, 빼내오기식 선교, 그리고 현지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기독교 우월주의 선교 등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대두되고 있는 중요한 이슈들이 대부분 그에게서 출발했다는 데 집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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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상황


먼저 우리는 캐리가 인도로 향하기 전에 인도의 상황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영국의 인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설립된 동인도회사는 개신교 선교 초기에 남인도에 온 독일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여러 독일 선교사들이 그 회사의 상선에 무료로 승선하여 인도에 도착하였구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지겐발크는 트랑케바르의 덴마크 당국자들보다 마드라스의 영국 당국자들이 훨씬 협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드라스의 영국 당국자들은 트랑케바르 선교회의 슈바르츠를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뱅갈에서도 역시 스웨덴 선교사인 키에르난데르(Kiernander)가 1758년에 쿠딸로르에서 캘커타로 이동할 때 동인도회사 당국자들은 그의 캘커타 정착과 사역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점차 선교사와 인도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는 이들도 늘어갔습니다. 특히 18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선교사들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점점 더 차가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1793년, 런던 의회에서 열린 동인도회사 헌장 갱신 토론회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지요. 이 토론회에서 복음주의적 사회개혁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동인도회사가 인도 국민들의 영적인 복지를 증진시킬 책임이 있으며, 이를 위해 그들 가운데서 일할 수 있는 교사와 목회자들을 파송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의회에서 동인도회사 이사들과 그 후원자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인도에서 몇 가지 사역을 후원하는 것 정도는 간단한 문제였지만, 동인도회사가 대규모의 선교사역을 준비하라고 강요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죠. 그들은 인도인들의 신앙문제에 간섭하려고 하면 그들의 불만을 자극하게 되어 마침내 영국의 지배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논쟁이 과열되면서 지금까지 동인도회사가 보여 온 선교사들에 대한 호의는 사라져 버렸고, 결국 윌버포스의 제안이 거부되었을 뿐 아니라 영국과 인도 모두에서 선교사들의 출입까지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이 정책은 거의 20년 동안 유지되었어요. 동인도회사는 어떤 경우에도 회사의 영토 안에 허가받지 않은 유럽인의 거주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 정책을 큰 어려움 없이 강행할 수 있었지요. 이런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만일 인도를 지배하려면 인도인의 영적인 복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은 영국사회 안에서 점점 힘을 얻게 됩니다. 나아가 동인도회사 자체 안에도 그런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이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꼽자면, 먼저 뱅갈의회의 의원으로서 나중에 동인도회사의 감독이 된 찰스 그랜트(Charles Grant), 뱅갈에 있던 소규모 시민 그룹과 인도 주재 일부 동인도회사의 목사들, 특히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 클로디우스 뷰캐넌(Claudius Buchanan), 다니엘 코리(Danial Corrie, 나중에 마드라스 최초의 주교가 됨), 헨리 마틴(Henry Martyn), 그리고 토마스 토마슨(Thomas Thomason)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에 머물던 유럽인들을 위해서 성실하게 사역했을 뿐 아니라, 인도인들을 향한 선교적인 아이디어도 부지런히 개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음번 헌장을 개정할 때 동인도회사는 이를 어느 정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윌리엄 캐리가 소명을 받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인물이 벵갈지역에 도착하는데,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입니다. 인도에 오기 전에 그는 영국의 마을학교에서 가르치는 일과 구두 수선을 통해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면서도 독학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추후 캐리는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하는데 있어 정신적 구심점이 됩니다. 그가 한결같이 그의 동료 봉사자들에게 강조했던 생각이자, 특별히 그 선교회를 설립한 소그룹 사람들을 감동케 했던 설교는 이사야 54:2-3을 본문으로 하여 두 가지 강조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캐리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문구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이 설교 후에 그는 스스로 그 선교회가 파송한 첫 번째 두 명의 선교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존 토마스(John Thomas)라고 불리는 열성적이지만 변덕스러운 의사였습니다. 그는 이미 인도에 온 적이 있는 인물로서 벵갈에서 찰스 그랜트의 보호 아래 복음전도를 위한 몇 가지 사역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침례교선교회가 벵갈을 첫 번째 사역지로 정한 것은 그의 설득을 통해서였다고 합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인도 정착과 마드나바티 사역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허락을 얻는 일이 거의 절망적이 되어가면서 영국 배에 승선하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그들은 덴마크의 배를 타고 인도에 오게 됩니다. 캐리는 아내와 네 자녀, 그리고 그의 처제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캐리 일행을 태운 배가 후글리(Hooghly)강에 들어선 후 그들은 작은 배로 옮겨 타고 1793년 11월, 캘커타에 조용히 상륙했습니다.

당시 정책은 선교사들이 가능한 한 빨리 자신들의 생활비를 버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첫해에 사용할 경비를 마련하도록 상품들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상품들을 팔아 재정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품을 팔아 얻은 돈은 토마스의 방만한 운영 때문에 어떤 다른 계약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단 두 달 만에 모두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캐리는 자신과 가족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캐리의 아내와 장남은 이질에 걸렸고, 캐리가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는 동안 그들은 초라한 집에서 한 친절한 힌두교도의 동정심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캐리는 2월에야 캘커타 남동쪽 순다르반스(Sundarbans)에 약간의 황무지를 임대하여 농사를 짓기 위해 정글을 제거하고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캐리가족이 생활했던 선교 초창기의 집

 

한편 토마스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뱅갈 북부 말다(Malda)에 있는 동인도회사 지부의 조지 우드니(George Udny)와 이전의 친분관계를 복원했습니다. 우드니는 그들을 돕기 위해 자기 구역에 있던 두 곳의 새로운 ‘인디고 농장’의 관리자 자리를 제안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캐리가 1794년 6월, 말다 구역에 있는 마드나바티(Madnabati)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이 일을 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생계는 안정되었지만,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드나바티에서의 첫해에 전염병이 그 가족을 다시 덮쳤고, 아이 중의 하나가 죽고 말았습니다. 캐리의 아내는 낯선 땅에서 겪는 이 모든 어려움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그 문제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말았고,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캐리의 가족은 마드나바티에서 5년 반을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에 캐리는 인디고 농장의 일을 보면서 벵갈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그 지역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학교를 열었습니다. 또한 캐리는 토마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 힌두 사제와 함께 신약성경 및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벵갈어로 번역했습니다. 우드니는 이런 기독교적인 활동들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캐리는 우드니를 통해 앞으로의 선교사역에 사용할 인쇄기를 확보했습니다. 처참한 홍수로 인해 그 공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캐리는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또 하나의 인쇄기를 구입했습니다.


세람포르 이주와 초기사역

 

침례교선교회(BMS)가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기로 하자 캐리는 모라비안 형제들의 방식을 따라 그곳에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선교 커뮤니티를 계획하였습니다. 1799년에는 네 가정이 미국 상선을 타고 후글리(Hoogly)에 도착했습니다. 동인도 회사로부터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하자, 그들은 캘커타로부터 15마일가량 상류에 있는 세람포르(Serampore)에 있는 덴마크인들의 정착지로 곧장 가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트랑케바르에서 일하면서 슈바르츠와 친분이 깊었던 덴마크의 총독은 그들을 환영했고, 그들을 추방하려고 했던 영국 당국자들의 노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몇 번의 협상 후에 평화롭게 떠났지만, 영국 당국자들은 그들이 캐리와 합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캐리에게 전해지자 캐리는 그렇다면 자신이 그들에게 가서 합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에 따라 캐리는 공장을 팔고 1800년 초에 세람포르로 이동하게 됩니다. 얼마 후에 토마스 역시 그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드디어 세람포르 선교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들은 강 근처에 큰 집과 부지를 구입했고, 거기서 캐리가 계획했던 공동체가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교는 수년이 지나자 깜짝 놀랄 만한 규모의 활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새로 온 이들 가운데 일부가 세상을 떠나 수가 줄긴 했지만 두 사람, 즉 학교교사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과 인쇄기술자 윌리엄 워드(William Ward)는 살아남아 캐리와 함께 유명한 세람포르 파트너십을 구축했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신약성경을 뱅갈어로 인쇄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설치된 캐리의 인쇄기는 워드가 맡았습니다. 선교는 자비량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마쉬맨과 그의 아내는 영국-인도 혼혈아동을 위한 학교와 학비를 내는 부모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이 학교들은 금방 유명해졌고, 그들에게 수입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인쇄기 역시 외부로부터 주문을 받으면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개종자와 카스트 규정 거부


크리슈나 빨에게 세례를 주는 윌리엄 캐리


이런 일들이 차츰 자리를 잡자 선교사들은 세람포르와 인근의 마을들을 순회하며 설교하고, 토론하고, 인쇄물들을 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캐리는 마드나바티에서 5년 반 동안 사역했지만 그곳에서 어떤 개종자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람포르에서는 첫 해에 한 명의 개종자를 얻게 됩니다. 180012, 크리슈나 빨(Krishna Pal)이 총독과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후글리 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목수였던 그는 토마스로부터 탈구된 팔을 치료받으면서 선교사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와 처제, 그리고 이웃하여 사는 가족들 역시도 세례를 받게 됩니다.

소규모로 시작된 이 그룹에 다른 카스트로부터 다른 개종자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추가되었고, 세람포르로부터 몇 사람, 그리고 다른 곳들로부터 몇몇 사람들이 더해졌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카스트 규정의 준수를 명확히 거부했습니다. 크리슈나 빨과 그의 이웃들은 선교 공동체에서 그들이 세례를 받기 전부터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브라만이었던 크리슈나 쁘라사드(Brahmin Krishna Prasad)는 첫 번째 성찬에 참여하면서 수드라인 크리슈나 빨이 먼저 잔을 받아 마신 다음에 그 잔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크리슈나 빨의 딸을 자신의 신부로 맞아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대학교수가 된 윌리엄 캐리


벵갈어 신약성경의 인쇄는 1801년 초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성경의 출판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캐리는 이를 계기로 포트윌리암대학(College of Fort William)에서 벵갈어 교수 자리를 제의받게 됩니다. 이 대학은 총독이자 장군이었던 웰레슬리 경(Lord Wellesley)이 동인도회사의 초급 장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그해에 세운 학교였습니다.

캐리는 동료들과 상의한 다음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세람포르와 캘커타로 자신의 시간을 나누어 사용하게 됩니다. 캐리는 교수직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게 되었고, 벵갈어와 더불어 산스크리트어와 마라티어 교수가 됨으로써 더욱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기금으로 출연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에 따라 캐리는 충성스럽게 그 돈을 일반 기금에 납부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그들은 스스로 자급했을 뿐 아니라, 선교를 위한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직책은 넓은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초창기의 그 대학은 3대 관구, 즉 봄베이와 마드라스, 캘커타 지역 학생들 모두를 교육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온 교사들은 캘커타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한때는 50명의 교원이 그 대학에서 일했는데, 그들 중 열두 명이 캐리의 학부에 재직했습니다.

 

동양의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리라!


이런 언어학적인 재능을 통해 그는 성경을 더욱더 많은 인도의 언어들로 번역하기 위한 엄청난 기회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캘커타가 항구이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연결하는 관문도시였기 때문에 그 사역을 비인도권 언어들에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803년 말 무렵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자원들을 이 일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는 15년 이내에 하나님의 말씀을 동양의 모든 언어로 번역하고 인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각자의 상황에서 최상의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여러 나라의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필요한 모든 유형의 서로 다른 인물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과업을 완수하는 데는 약 700루피의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우리는 이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J. Hough, A History of India vol.IV (1845), p.131)


클로디우스 뷰캐넌(Claudius Buchanan) 역시 캐리의 의견에 동의했고, 웰레슬리 경(Lord Wellesley)은 자발적으로 그 프로젝트를 후원했습니다. 뷰캐넌이 작성한 프로젝트 제안서에는 그와 세람포르의 선교사들이 서명했습니다. 동양의 열다섯 가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자 하는 이 프로젝트의 개요는 총독이자 장군이었던 웰레슬리 경에게 제출되었으며, 단체장과 감독들, 영국에 있는 대학과 다른 영향력 있는 기관들에도 회람되었습니다. 이에 화답하여 많은 기부금이 접수되었습니다.

이 웅대한 계획을 위해 캐리와 그의 동료들은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세람포르에 있는 선교 기지는 거의 번역 공장이라고 불릴만한 작업본부가 되었습니다. 워드는 1811년에 사촌에게 보낸 편지에 그 장면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너는 들어오자마자 작은 방 안에서 하얀 재킷을 입고 읽거나 쓰고 있는, 그리고 때로는 50미터가 넘는 긴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는 네 사촌을 보게 될거야. 그리고 거기서 인도인들이 성경을 다른 방언들로 번역하거나 교정지를 수정하고 있는 것도 보겠지. 또한, 아랍어, 페르시아어, 나가어, 텔루구어, 펀잡어, 마라티어, 중국어, 오리야어, 버마어, 까나레스어,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영어의 활자들이 담긴 상자들이 진열된 장면을 만나게 될 거야.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그리고 크리스천 인도인들이 부지런히 조판하고, 교정하고, 분류하고 있겠지. 다음 장면에서는 네 사람이 성경 인쇄용지에 각기 다른 언어들로 찍어내고, 다른 사람들은 그 종이를 접어 다른 큰 창고로 옮기고 있을 거야. 그리고 여섯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제본하는 장면, 사무실 너머에서 일하고 있는 활자 주물공들과 그 외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잉크를 만드는 장면을 보게 되겠지. 그리고 넉넉하게 열린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자체적으로 종이를 제조하기 위해 설립한 제지공장을 볼 수 있을 거야. (S. Pearce Carey, Willam Carey, p.283)

 


성경번역의 성과와 한계


몇몇 번역들은 힌두 학자들(pandits, 빤디뜨)의 도움을 받아 선교사들에 의해 완료되었습니다. 캐리 자신은 이런 방법으로 뱅갈어와 힌디어, 산스크리트어와 마라티어의 번역책임을 맡았습니다. 다른 번역들도 그의 감독 아래 빤디뜨들에 의해 인도의 역본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번역함으로써 만들어졌습니다. 외국인들에 의해 진행되는 또 다른 언어들은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협력하여 작업했습니다. 일부 번역은 어떤 곳으로부터 인쇄를 위하여 세람포르로 가져와서 채플린 또는 관리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1834년, 캐리가 죽던 해에 여섯 가지 언어로 신구약 전권 역본이 출판되었고, 23개의 신약성경, 그리고 10개의 다른 언어로 된 부분 역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언어들 가운데는 인도에서 사용되는 주요 언어와 부족 언어는 물론 버마어와 자바어, 말레이어, 중국어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많은 번역본들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역본은 얼마 안 가서 대체되어야 했고 심지어 가장 잘된 역본조차 전반적인 수정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캐리 자신도 그 번역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벵갈어 역본을 여러 차례 개정했는데 구약은 세 차례, 신약은 여덟 차례나 개정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역본들이 불만족스러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세람포르 선교공동체 건설


캐리와 마쉬맨, 그리고 워드는 또한 세람포르를 선교를 위한 기지로 만들 것을 계획했습니다. 즉 서구에서 선교사가 도착하면 그 신임선교사를 목적에 따라 인도 각 지역 및 그 너머의 나라들로 파송함과 동시에 그 선교사의 자녀와 인도인들, 그리고 앵글로 인디언(Anglo-Indian)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지요.

선교공동체의 인도 기독교인들의 집단 거주마을


캘커타에서의 두 번째 해부터 캐리는 랄 바자르(Lall Bazaar)라는 도시 빈민가 중의 한곳에서 설교하면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순회설교여행은 덴마크 여권의 유무와 관계없이 중부 벵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웰레슬리 경(Lord Wellesly)이 총독이자 장군으로 있던 시기인 1803년과 1805년에 새로운 선교사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신임선교사들과 앵글로 인디언, 그리고 인도 전도자들의 사역은 디나지푸르(Dinajpur), 말다(Malda), 그리고 카트와(Katwa)까지 확장되었습니다. 1805년에는 여섯 명의 인도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자로 일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순회설교여행 중 한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는 윌리엄 캐리


1803년 새해 벽두에 캐리와 그의 동료들은 여러 곳에 선교지부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각 지부에는 한 명의 선교사와 한두 명의 인도인 협력자가 있어야 했고, 선교사는 자기 시간을 쪼개 생계비를 벌기 위해 어느 정도는 세속적인 일을 하고, 설교하고 성경과 전도지를 배포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일에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런 종류의 발전 계획은 1813년에 동인도회사의 헌장이 개정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웰레슬리 경에 이어 부임한 후임자의 재임기인 1806년, 벨로르 폭동(Vellore Mutiny)이 가져온 공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관리들의 태도가 보다 적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캘커타에서 설교하는 일이 금지되고, 새로 도착한 선교사들은 다시 멀리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1813년 이후 선교사들은 세람포르의 보호 아래 멀리 인도의 나그푸르(Nagpur), 델리(Dehli), 그리고 아즈메르(Ajmer), 인도네시아의 암보이나(Amboyna)까지 파송되었습니다. 캐리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 그 지역들에 파송된 선교사는 18명이었습니다.

 

침례교선교회(BMS)와의 갈등과 분열


캐리와 마쉬맨, 그리고 워드는 그런 모든 활동 및 세람포르 선교의 제반 업무에 대한 계획자이자 감독자였습니다. 이 사실은 인도에 있던 3인방, 즉 캐리와 마쉬맨, 워드와 영국에 있던 침례교선교회(BMS)의 위원들 사이에서 마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했고 독립적이었으며, 인도에서 규약을 만들고 부동산을 획득하고, 제반 업무를 스스로 감독하였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역 자금을 돈을 벌어 직접 조달하거나 그들 스스로 다른 방법으로 재정을 모금하였습니다.

그들은 침례교선교회에서 보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개인적으로 조달해 왔습니다. 초창기 침례교선교회 위원들은 그들을 신뢰했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회가 창립될 때 캐리와 함께했던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 유명한 세 명의 선교사가 진행하던 일들을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그들 위에서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그들은 세 선교사가 독재적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선교사들 그룹 일부를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자유를 포기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런 의견의 차이는 1816년에 최초로 신임선교사들이 세람포르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고국의 위원회와 길고도 지루한 대립을 가져오게 됩니다. 세람포르 3인방은 실제적으로 독립적인 선교 단체로서 자신들의 일을 수행했습니다. 1827년에 마쉬맨은 영국에 돌아가 위원들과 개인적인 관계들을 쌓고 오해를 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고 세람포르 3인방과 침례교선교회가 완전히 분리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세람포르 대학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이러한 논쟁 중에, 세람포르 3인방의 업적 가운데 영원히 기억될 만한 세람포르대학 프로젝트가 계획되고 실행됩니다. 남부에서 트랑케바르 선교사들처럼 그들은 이미 기본적인 학교의 체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1818년에 이러한 학교들이 이미 126개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기독교 및 비기독교 청년들에게 동양문학 및 유럽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대학이었습니다.

세람포르 3인방의 목표는 인도의 고전 문학과 그 시대 유럽의 최고 학문 모두에 정통한 계몽된 젊은이들의 그룹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목사로서, 교사로서, 또 다른 삶의 길을 통해서 인도교회를 섬기고 이끌어 갈 훈련된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이 제안한 계획은 신학부가 함께 있는 예술 및 과학 대학이었습니다. 이는 기독학생들과 비 기독학생들이 서로 어깨를 부대끼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방향성 아래 그들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그 외의 비용들을 충당하기 위하여 인도와 영국, 덴마크와 미국에서 기금을 모금했습니다. 대학건축은 1818년에 시작되었고, 19명의 거주 그리스도인 학생과 18명의 비거주 비그리스도인 학생들을 포함, 37명의 학생들로 1819년에 학과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교육과정에는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벵갈어, 영어, 자연과학과 의학이 포함되었고, 대학의 초창기 몇 년 동안 이런 대부분의 과목들은 벵갈어로 가르쳤습니다. 1827년에는 덴마크 왕이 그 대학에 학위 수여 면허를 줌으로써 기독교 대학의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한 사회계몽 활동


세람포르 대학이 설립되던 그 해에 지칠 줄 모르는 이 3인방은 저널리즘, 즉 신문 잡지 분야에 뛰어들게 됩니다. 마쉬맨과 그 아들이 매주 뱅갈어로 「서마차르 다르빤」(Samachar Darpan)이란 이름의 신문을 제작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동양 언어로 인쇄된 최초의 신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매월 영문으로 「인도의 벗」(The Friend of India)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매체들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공적인 견해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갠지스 강에 유기되어 죽임 당하는 장면


1801년, 웰레슬리 경은 캐리에게 사가르섬(Sagar Island)에서 갠지스 강에 던져지는 아이들의 희생에 대해 조사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그 후로 캐리는 인도주의적인 개혁의 주창자가 되었고, 그의 보고에 기초해 그런 행위가 금지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다른 악습들 가운데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바로 ‘사띠사하가마나’(satisahagamana, 사티)였습니다. 이는 힌두 과부들을 그 남편의 장례식 때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산채로 태워 죽이는 풍습입니다. 캐리는 어느 날 이 소름 끼치는 의식이 진행되는 장면을 보았고 그날 이후 이 악습에 대해 끊임없이 항의했습니다.

과부를 그 남편의 시신과 함께 불태워죽이는 사띠 장면


「인도의 벗」 창간호에서 그는 사띠 관습으로 불태워지는 과부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그 내용을 ‘그 문제의 현실 및 배경에 대해 강하고 설득력 있는 진술’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문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실제 사례들이 보고될 때마다 공중 앞에 그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습니다.

그는 인도와 영국에서 동시에 이에 항의하는 힘을 결집했습니다. 과거 캐리의 학생들로서 강한 신념을 가진 일부 관리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자기 책임으로 그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고위 관리들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견해를 거스르는 일이 가져올 정치적 파급효과를 염려하여 행동을 취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를 비롯한 몇몇 계몽된 힌두들도 이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마침내 1829년, 윌리엄 벤팅크(William Bentinck) 경은 동인도회사의 영역 내에서 ‘사띠’를 금지하는 유명한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때 캐리는 정부에서 벵갈어 통역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명령서가 주일 아침 교회 사역을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서둘러 누군가로 하여금 그 일을 시행하도록 준비시키고, 자신이 지체함으로써 혹여 살 수도 있는 사람이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자기 빤디뜨들을 보내 즉시 그 문서번역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세람포르 3인방의 죽음과 그 의미


1823년, 워드가 콜레라에 걸려 죽고 말았는데 이는 세람포르 파트너십의 첫 번째 균열이었습니다. 이후 캐리는 1834년에, 마쉬맨은 1837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세상을 떠나기 훨씬 오래전에 이미 공인된 인물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인도의 많은 지배층 관료들이 캐리의 오랜 학생들이었고, 인도와 해외 모두에서 그는 산스크리트어 및 다른 동양 언어들에 대한 지식은 물론 탁월한 식물학 분야의 지식으로 인해 캐리는 심지어 기독교 선교사역에 호의적이지 않던 이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캐리와 그의 친구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원대한 규모의 개신교 사역에 대한 개척자로서, 그리고 기획가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선교사역에 대한 동인도회사의 적대감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충분히 불식시켰으며 그 뒤를 따라갈 후배들을 위한 길을 준비했습니다.

또한 캐리와 그 친구들이 가졌던 관심사의 범위, 자신들이 씨름하며 수행했던 모든 일에 대한 열정과 부지런함, 그리고 관대함,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추진해 나가는데 있어 보여준 정치가다운 자질 등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고 시도했던 모든 것들은 위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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