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12> 링겔타우베와 베다마니깜의 아름다운 동역

2021. 3. 3. 00:01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728x90

남인도 트라방코르 최초의 선교사 링겔타우베와 그가 건축한 교회


세람포르에서 캐리를 포함한 삼총사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초창기에 인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트라방코르(Travancore, 현 타밀나두 깐야꾸마리 관구)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동인도회사는 공식적으로 여전히 선교사들의 입국에 반대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지요. 트라방코르에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빠르게 큰 규모로 성장했고, 풍성한 선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링겔타우베의 소명과 남인도 정착

이 트라방코르 선교의 개척자가 바로 모라비안 유형의 경건주의 성향을 가진 독일 루터교도 링겔타우베(William Tobias Ringeltaube)인데요, 그는 1770년 8월에 실레시아의 브르제그 근처 쉐이델비츠(Sheidelbitz)의 대목이었던 고틀리프 링겔타우베(Gottlieb Ringeltaube)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그는 이후 할레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18세에 링겔타우베는 도보순례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796년에는 안수를 받고 이듬해에 캘커타(꼴까타)에 와서 1798년까지 영국 기독교지식진흥회(SPCK)에서 몇 달 간을 지내게 되었지만 결국 실망하여 유럽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링겔타우베는 1804년에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파송으로 다른 두 명의 런던선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다시 인도에 들어왔습니다. 이 때는 덴마크의 배가 그들을 트랑케바르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두 명의 선교사들은 마드라스로 가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비자가파탐(Vizagapatam)에 정착하게 됩니다. 링겔타우베는 트랑케바르에 잠시 머문 뒤 탄조르에서 슈바르츠의 후임자로 와 있던 콜호프(J. C. Kohlhoff)의 제의에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됩니다. 콜호프가 그에게 선교사가 없던 틴네벨리(Tinnevelley) 관구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돌보도록 요청했기 때문이죠.

베다마니깜과의 만남과 동역


이때 링겔타우베는 마하라산 베다마니깜(Maharasan Vedamanikam)이란 이름의 최근 트라방코르에서 개종한 타밀인을 만나면서 일정 부분 희망을 갖게 되는데요, 베다마니깜이 코모린 곶(Cape Comorin) 근처에 있는 자기 고향 마을 마일라디(Mayiladi)에 가면 약 200여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베다마니깜(Vedamanikam)

베다마니깜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삼바바르(Sambavar)라고 불리는 카스트의 아디 드라비다(Adi Dravida)였지만,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부터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믿던 힌두 신들을 향한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베다마니깜은 자신이 믿는 신을 예배하기 위해 남인도의 유명한 시바종파 성지 중 하나인 치담바람(Chidambaram)으로 자기 조카와 함께 긴 여정의 순례를 떠났는데요, 안타깝게도 그 여행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영적인 경험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꿈에 한 덕망 있는 노인이 나타나 자신에게 열매 없는 수고를 해 온 것에 대해 책망하면서 당장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호통 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허탈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두 순례자는 탄조르에 있는 친척집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친척들이 기독교인이었어요. 그들은 이 두 순례자에게 기독교에 대해 설명했고, 그들을 교회로 데려가 콜호프 선교사에게 소개했습니다.

치담바람에서 실망을 맛본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얼마 후에 세례를 받게 됩니다. 몇 주간을 탄조르에서 더 지낸 후에 마일라디로 돌아간 베다마니깜은 그곳에 있던 자기 친척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을 계속하여 전했습니다. 그는 그들 중 한 그룹에게 우상숭배를 포기할 것을 가르치고 기독교적인 이름들을 지어주었는데, 이 일로 인해 그는 상당히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탄조르에 방문하고 나서 얼마 후 베다마니깜은 콜호프로부터 새로운 선교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 선교사가 머무는 곳을 물은 후 링겔타우베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갔고, 트라방코르에 와 줄 것을 간청한 것이지요.

1806년에 링겔타우베는 트랑케바르를 떠나 팔람코따(Palamcottah)로 가게 됩니다. 그곳은 이후 3년 동안 그의 선교본부가 되었지요. 이 기간 동안 링겔타우베는 틴네벨리에 이미 세워진 기독교 공동체들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마일라디에도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에 200명의 세례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베다마니깜의 묘사는 과장된 것이었음이 밝혀졌고, 그 해에 약 20여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틴네벨리 지역에 대한 한시적인 임기가 끝나가던 1809년에 링겔타우베는 트라방코르로 사역지를 이동합니다. 그 해에 그는 영국 총독으로부터 그곳에 정착하여 예배당과 학교를 건축하는 일에 대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베다마니깜을 수석 교리교사로 임명하였는데요, 그가 가르친 기독교인들은 주로 베다마니깜과 같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1810년부터 나다르스(Nādārs)라고 불리는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이 세례받기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베다마니깜은 처음에 그들의 동기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여 거절했지만, 결국 그 이듬해까지 그들 가운데서 4백 명에게 세례를 주게 됩니다. 그때로부터 점진적으로 남부 트라방코르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부를 형성한 사람들은 이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틴네벨리에서 예닐곱 곳에 예배당이 건축되고 학교가 시작되자 링겔타우베는 자신이 교리교사로 훈련시킨 몇몇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그들과 함께 사역하였습니다.

링겔타우베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집에서 극도로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고독한 기인이었고, 화를 잘 냈지만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작은 봉급마저 거의 다 내어주면서 때로는 자신이 먹고 입을 음식과 의복도 부족한 상태에서 여행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례했습니다. 기근이 심할 때는 구호기금을 모아 분배했고, 그들의 자질에 대하여 거의 환상을 갖지 않고 무리를 향해 아버지처럼 훈계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1813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약 6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 그 중 서너 명은 아마도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나머지는 모든 종류의 동기들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우리가 수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그의 기록과 인용 가능한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우울증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는 실제로 약해져 가는 건강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1815년이 되자 그는 더 이상 다른 어떤 일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런던선교회에 자신의 선교 재정을 반납하고 은퇴한 후에 인도를 떠났습니다. 인도를 떠나면서 링겔타우베는 베다마니깜에게 자기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의 사역을 돌보기 위한 위임하였습니다.

링겔타우베는 비록 자신의 사역에 대해 호의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임편지에서 자신의 사역이 건강한 기초들을 닦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분명 근거가 있는 주장이었죠. 링겔타우베가 닦은 기초 위에서 그의 후임자인 찰스 미드(Charles Mead)에 의해 나다르스 계층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대규모 집단개종 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단개종운동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어 오늘날의 남인도교회(CSI) 깐야꾸마리(Kanyakumari) 교구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공동체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링겔타우베와 베다마니깜 기념교회 (CSI Kanyakumani Diocese)


링겔타우베와 베다마니깜은 인도 선교 초기역사에서 가장 바람직한 선교사와 현지리더십의 아름다운 동역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다마니깜이 아디 드라비다 출신의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링겔타우베는 그를 깊이 신뢰하고 동역자로 인정하여 자신의 사역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일들을 맡겼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은퇴해야 할 상황에서 그에게 자신을 대신할 리더십을 위임하였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트라방코르에서의 놀라운 기독교 부흥은 바로 이런 아름다운 동역을 통해 가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     *     *     *     *



* 이 포스팅은 필자가 번역한 C. B. Firth 저 <인도교회사>(CLC, 2018)의 내용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하고 편집한 것입니다. 무단전재나 출처를 밝히지 않는 인용은 저작권법 위반으로 법에 저촉됨을 알려드립니다.


□    ■    □    ■    □


인도교회사 인물열전 열 두 번째로 링겔타우베와 베다마니깜의 아름다운 동역을 소개했습니다.
유익하셨다면 가시기 전에 공감체크 ♡ 부탁드려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