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13> 여성해방과 사회개혁의 선구자 빤디따 라마바이

2021. 8. 3. 12:40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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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인도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인도여성의 해방과 인권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했던 평신도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빤디따 라마바이 사라스와띠(Pandita Rama Bai Sarasvati, 1858-1922)이다. 라마바이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특별하고도 특이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남부 까나라(현 까르나타카)의 서부 산악지대에 정착한 마라타 브라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내에게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칠 만큼 독립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와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라마바이가 태어난 후 유년 시절에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들은 한 성지에서 몇 달을 보낸 후 다른 성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다시 몇 달을 보내는 삶을 계속했다. 그들은 종교 의식을 행하고 공공장소에서 뿌라나(Purana, 힌두신화)를 암송함으로써 생계를 꾸려야했는데, 이런 삶은 라마바이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라마바이가 어느 정도 성숙했을 때 그녀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독송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다시 관례를 무시하고 라마바이로 하여금 종교적인 삶에 헌신하게 하면서 결혼을 시키지 않았다. 1876년에 남인도 지역은 대기근으로 황폐해졌다. 이 기근을 만난 라마바이와 가족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라마바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가 모두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마바이는 남동생을 데리고 방랑생활을 계속하다가 1878년에 캘커타에 도착했다.

캘커타에서 산스크리트로 뿌라나 구절들을 능숙하게 암송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힌두교 빤디뜨들 가운데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라마바이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 및 브라흐모 사마즈와 접촉하게 되었고 자신이 지금까지 자라온 배경인 정통 힌두교 신앙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남동생마저 세상을 떠난 후 라마바이는 브라흐모들과 교류하던 중에 22살의 나이로 자신의 카스트가 아닌 뱅갈어 전공자와 정통적이지 않은 결혼을 했다. 그러나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죽고 말았고, 그녀는 결국 과부로 남고 말았다. 라마바이는 막 태어난 어린 딸을 데리고 마하라슈트라로 돌아가 뿌나(Poona)에서 한 해를 보냈다.

시골 마을들에 성경을 배포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 여성들


뿌나에서 라마바이는 쁘라트나 사마즈(Prathana Samaj)와 협력했으며 사회개혁, 특히 교육 및 소녀 과부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대변자가 되었다. 그녀는 또한 성공회 신부였던 느헤미야 고레(Fr. Nehemiah Goreh)와 기독교 선교사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라마바이가 꿈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그녀가 영국에 가서 훈련을 쌓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영국에 간 라마바이는 당시 함께 생활했던 동정녀 마리아 수녀단(Sisters of St. Mary the Virgin)의 가르침 및 본보기에 감동을 받고, 인도의 고레 신부와 긴 편지를 주고받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녀는 영국에서의 학업을 마친 뒤 미국에 가서 3년을 더 보내면서 유치원 교육 및 다양한 수공예품 제작 훈련을 받았으며, 인도에서의 여성의 삶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강연을 했다.

라마바이는 미국에서 행한 강연들과 자신이 저술한 책, 「상층카스트 힌두여인」(The High Caste Hindu Woman)으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녀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이 그녀의 사역을 돕기 위해 라마바이협회(Ramabai Association)를 결성하여 기금을 모금했다. 라마바이는 협회로부터 10년 동안 미망인의 집에 대한 비용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인도로 돌아왔다.

소녀 미망인들을 돌보는 묵띠선교회의 사역


인도에 돌아온 라마바이는 1889년에 봄베이에서 마하데브 고빈드 라나데(Mahadev Gobind Ranade)와 쁘라트나 사마즈의 다른 저명한 인사들의 협력을 얻어 사라드 사단(Sarada Sadan)이란 이름의 ‘가정과 학교’(The home and school)를 개설했다. 이 기관은 다음 해에 뿌나로 이동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힌두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되었다. 이는 그 집이 기독교 전도를 위해 사용되고 있고 라마바이가 자기 후원자들과 함께 힌두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는 이유였는데, 그 정관에 종교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소녀 미망인들은 라마바이가 자신의 딸과 함께 드리는 가족기도에 참여했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그녀를 후원하던 힌두들 대부분과 미국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후원을 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드 사단은 계속 되었다. 당시에 그 집에는 약 40명의 소녀 미망인들이 살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재정 가운데 일부는 농장을 시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뿌나 지역의 케드가온(Kedgaon)의 부지 구입에 사용되었다.

가톨릭 정신을 가진 성공회 신자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은 라마바이 자신은 이제 부흥운동에서 궁극적인 영적인 고향을 찾기 위한 감정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배경과 함께 그녀는 중국내지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를 이끈 허드슨 테일러와 브리스톨(Bristol)의 조지 뮐러(George Mueller)의 삶을 읽은 후 영감을 받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 들었다.

케드가온에 설립된 묵띠 미션홈

바로 그 시기는 1896년, 인도 중부지역의 기근이 있던 때였다. 그 당시 라마바이는 기근 지역을 순회하고 푸나에 있던 자신의 부지가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고아소녀들을 구조했다. 라마바이는 그 소녀들 중 일부를 다른 곳에 있는 선교회 기숙사에 보내기도 했지만, 더 많은 소녀들을 자신이 거두었다. 그녀는 친구나 지지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케드가온에 구입해 놓은 부지에 묵띠(Mukti)라고 불리는 정착지를 조성했다. 미국 여성인 에이브람스(Miss Abrams)가 라마바이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1898년, 협회에서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10년의 기간이 끝나자 라마바이는 다시 미국을 방문했고, 사라드 사단과 묵띠 사역을 함께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더 많은 미국 여성들이 케드가온(Kedgaon)에서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 필요한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이듬해에는 매우 큰 기구가 조직되어 천명 이상의 고아 소녀들과 소녀 미망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고, 놀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직업훈련이 이루어졌다.

미국인과 인도인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직원들이 야외작업과 우유농장, 직조, 재봉, 로프 만들기 등을 관리 감독했고 라마바이는 1922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스스로 이 모든 사역들을 주도하였다. 이 사역은 지금까지도 라마바이 묵띠선교회(Ramabai Mukti Mission)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도 이어오고 있는 케드가온의 라마바이 묵띠미션센터



라마바이의 생애 동안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는 놀라울 만큼 크게 변화되었다. 후진 계층들(backward classes) 가운데서는 과거의 열악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일들이 여전히 보이고 있지만, 여아들에 대한 교육은 이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일이 되었으며, 졸업생들 중에 여학생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공공생활에 있어 여성들이 차지하는 영역이 갈수록 더 커져가고 있다.

이런 현상이 전적으로 기독교선교회들의 사례와 업적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바이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여성해방을 위한 운동을 선도해 온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 학교와 대학들이 미친 영향 역시 현저했다. 이처럼 여성의 인권과 해방을 위한 기독교의 지지와 옹호는 인도 사회에서 여성의 삶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회적 입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도 여성 근로자, 선교사, 교사, 의사, 간호사, 전도부인들의 봉사와 교회 내 여성단체들의 섬김은 인도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생활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교회를 둘러싼 비기독교 사회를 향한 교회의 증언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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