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10> 크리스챤 F. 슈바르츠 – 통전적 선교의 모델

2021. 2. 5. 18:20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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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인 지겐발크와 플루차우에 의해 시작된 트랑케바르 선교사역은 탄조르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슈바르츠 시대에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크리스챤 프레드릭 슈바르츠(C. F. Schwartz)는 자신의 시대는 물론 그 이후의 시대까지 트랑케바르 선교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1750년에 트랑케바르에 도착하여 1798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긴 세월을 타밀나두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슈바르츠는 그 자신의 순전한 성품이 가진 영향력으로 인해 널리 존경을 받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우러러보게 만드는 넓은 마음과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트리치노폴리에서의 사역


슈바르츠는 인도에 도착한 후 12년 동안은 트랑케바르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선교회 조직 내에서의 일상적인 사역, 즉 가르치고, 설교하고, 교리교육을 하고, 현지사역자들을 감독하고, 때로는 원거리의 마을과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돌보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렇게 여행하던 지역 중 하나가 트리치노폴리(Trichinopoly)였지요. 거기서 그는 힌두들은 물론 자신이 개종시킨 이들, 그리고 영국군 수비대에 고용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유망한 사역현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트리치노폴리에 가서 탄약고 폭발 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의 자녀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고, 1766년에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1762년에 시작된 슈바르츠의 트리치노폴리 방문기간은 더 연장되었고, 영국 SPCK(기독교지식진흥회)가 그곳의 슈바르츠 사역을 지원하기로 동의하고 슈바르츠에게 그 지역 전담선교사로 사역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슈바르츠는 트랑케바르에 있는 선교회 동료들의 동의를 얻어 이 제안을 수락했고, 1767년에 마침내 또 하나의 ‘영국의 선교’가 독일의 루터교도와 함께 하는 사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마드라스의 영국 총독은 슈바르츠를 영국군의 종군목사로 임명했습니다. 슈바르츠는 자신이 받은 종군목사의 첫 해 봉급 전부를 선교용 건물을 구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하여 자신이 받았던 봉급의 절반을 선교비로 사용했고, 나머지 절반만을 자신을 위해 썼는데 그나마도 많은 액수를 구제와 자선을 위해 내어주었습니다.

슈바르츠는 그 후 1778년까지 트리치노폴리에서 계속 사역합니다. 이 기간 동안 자기 시간을 구분하여 종군목사 업무와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데 나누어 사용했으며, 인도인 교리교사들의 도움으로 이 사역들은 꾸준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는 인도 사역자들과 함께 그 지역에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슈바르츠는 때때로 트리치노폴리에 머물던 아르코트(Arcot)의 무슬림 통치자와 그의 궁정에 있던 관리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는데, 이를 위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까지 배웠습니다.
 

탄조르 사역의 출발


슈바르츠는 이런 선교여행을 하는 중에 자주 탄조르에 방문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인 회중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마라타 출신으로서 그 지역의 왕(Rajah)이었던 툴자지(Tuljaji)와 친분을 맺게 됩니다. 둘 사이의 우정이 깊어지자 툴자지 왕은 슈바르츠에게 아예 탄조르로 옮겨 오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왕의 이 요청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778년에 다른 선교사가 트리치노폴리에 임명되고 나서야 슈바르츠는 탄조르로 옮겨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20년 동안 탄조르는 슈바르츠의 선교기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공직생활에 발을 디뎌놓게 됩니다.

1799년, 마드라스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은 하이데르 알리(Hyder Ali)가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전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이데르에게 사신을 보내기로 합니다.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하이데르는 “사신을 보내려거든 ‘그 기독교인’을 내게 보내라. 그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기독교인’은 바로 슈바르츠였죠. 따라서 슈바르츠는 영국으로부터 하이데르에게 사신으로 가줄 것을 요청받게 됩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신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슈바르츠는 세링가빠탐(Seringapatam)에서 하이데르 알리와 몇 번의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후 몇 주간 기다리는 동안 슈바르츠는 하이데르의 군대 안에 있던 유럽인들과 인도 기독교인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또한 슈바르츠의 텐트가 세링가빠탐 성의 구릉지 위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슈바르츠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그 텐트로 찾아오는 이들과 어떤 제약도 없이 기독교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신으로서 그의 업무는 별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이데르의 서신을 마드라스에 전달하고 다시 탄조르에 돌아온 슈바르츠는 다가올 전쟁과 물자의 부족을 예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쌀을 구입하여 저장하는 일을 추진했습니다. 1780년은 슈바르츠에게 있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수비대 교회를 건축하는 일과 인도인 회중을 위한 별도의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끝내기에 적당한 시기였습니다.
 

탄조르 왕국에서의 통전적 선교


마이소르(Mysore)와 코로만델 해안 사이에 자리하고 탄조르 왕국에게 그 다음 4년 동안은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피난민들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자 탄조르 성은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지역 사람들이 식량 공급을 거부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한 이유는 탄조르 주민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식량을 관원들이 공정하게 관리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이런 연유로 슈바르츠가 그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농민들은 그의 말에 따라 각 마을에서 곡식을 수레에 싣고 왔고, 모든 주민들이 정당한 금액을 지불한 후 곡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슈바르츠는 하이데르 알리의 군대가 탄조르에 들어와 머물고 있을 때도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것은 하이데르가 자기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죠.
 

이 존경스러운 종군목사(Padre)가 아무 방해 없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며, 그에게 존경과 친절을 베풀 것을 명한다. 그는 거룩한 사람이며, 자신의 정부에 어떤 해도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한다.


슈바르츠는 다시 탄조르 왕국 내부의 행정부서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당시 왕의 관리들의 실정이 정점에 이르러 수천의 거주민들이 그 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당국자들이 이 일에 개입합니다. 그들은 그 문제가 올바로 처리될 때까지 행정권을 이양할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 때 그곳 주민들은 그 누구보다도 백성들과 그 상황을 잘 아는 슈바르츠가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직책을 맡게 된 슈바르츠는 현명한 조언으로 왕을 보좌하는 한편, 조직과 외부세력들을 노련하게 통솔하여 국정을 정상화하는 데 있어 커다란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후 친자식이 없던 탄조르 왕은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슈바르츠에게 자신이 입양한 어린 소년 세르포지(Serfojee)의 후견인이 되어 주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이 왕위 계승에 있어 다른 청구자들이 있음을 알았던 슈바르츠는 왕의 형제인 아미르 싱(Amir Singh)이 그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자라기까지 그를 대신하여 섭정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슈바르츠의 이 조언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왕국의 행정은 다시 한 번 부패한 관리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고, 마드라스의 총독부가 다시 이 일에 관여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수습하는 일은 다시 슈바르츠에게 맡겨집니다. 슈바르츠는 그런 일을 하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강력히 경고하면서 정의로운 행정과 세입에 대한 규칙을 세우고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하여 추방했습니다. 슈바르츠는 이 왕국의 행정관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슈바르츠는 아미르 싱이 왕의 양자인 세르포지를 밀폐된 감옥에 가둔 것을 알고 그를 구해냈으며, 실제 그의 유력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세포르지는 슈바르츠와 매우 가까워졌고 후에 왕위를 물려받은 다음 슈바르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의 보은의 마음을 비문에 기록했습니다. 그 비문은 아직도 탄조르에 있는 슈바르츠의 무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슈바르츠는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이 복음을 맡은 봉사자요, 목회자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세속적인 업무 관계로 슈바르츠를 만나러 오는 이들은 그가 아침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나 세례 후보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에 초청받아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여행이 힘들어지자 슈바르츠는 때때로 저녁나절에 큰 나무 아래 앉아 교리문답 학생들이 읽어주는 그들의 묵상일기를 듣곤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결혼하지 않고 언제나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받은 보수의 대부분을 선교사역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필요한 선교비의 대부분을 스스로 조달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면서도 8천 ~ 9천 파운드에 이르는 기금을 탄조르와 남인도 선교사역을 위한 기부금으로 남겼습니다.
 

사띠아나덴과 틴네벨리교회의 설립


탄조르 사역 초기인 1778년에 슈바르츠는 더 먼 남부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이 여행 기간에 슈바르츠는 틴네벨리(Tinnevelly) 지역의 빨람코따(Palamcottah)에 있는 수비대에서 트리치노폴리(Trichinopoly)와 탄조르 출신 인도인 그리스도인 병사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세례를 요청하는 마라타인 브라만 과부 하나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결혼하지 않은 채 영국인 장교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녀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장교가 죽고 나서야 슈바르츠는 그 여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클로린다(Clorinda)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이후 팔람코따의 매우 열성적인 교인이 되었으며, 그녀의 헌신을 통해 그 지역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1784년에 그녀는 탄조르에 와서 슈바르츠에게 그 교회를 돌볼 수 있는 목회자를 임명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이에 슈바르츠는 1785년에 두 번째로 팔람코따를 방문했고, 그곳에 교리문답 교사인 사띠아나덴(Sattianaden)을 남겨 두었습니다. 1790년 사띠아나덴은 트랑케바르에서 루터교 예식에 의해 안수를 받습니다. 그는 이후로 계속하여 틴네벨리 지역에서 때로는 홀로, 때로는 트랑케바르선교회의 자에니크(Jaenicke)나 다른 선교사들과 더불어 그곳의 사역이 성장하도록 힘써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슈바르츠는 사띠아나덴에 대하여 겸손하고 사심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면서 훌륭한 설교자요, 동료와 지역사람을 다루는 일에 숙련된 사람, 자신의 동료들을 능숙히 다룰 줄 알며 빈약한 급료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슈바르츠는 또한 “그는 자신의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며, “진심으로 말하면 … 나는 이 나라의 현지인들 가운데서 그와 비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인도 기독교의 중심이 된 틴네벨리교회(Church of Tinnevelly)의 시작이었습니다.
 

탄조르 사역의 의미와 평가

 

죽음을 앞둔 슈바르츠를 찾은 세포르지와 탄조르 왕국 지도자들

1789년 2월 13일, 슈바르츠는 탄조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바르츠와 그의 세대에 트랑케바르 선교는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실제로 트랑케바르의 영토에 한정된 덴마크의 구역은 소규모였습니다. 하지만 트랑케바르 선교회에 속한 루터교 선교사들은 타밀나두 지역의 모든 유럽 정착지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곳에서 활발한 사역을 전개했습니다.

이들 중 몇몇 정착지들은 영국의 선교지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영어를 쓰는 회중들이 있는 소수 지역에서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가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큰 차이점이 없었습니다. 한편, 독일 경건주의와 동일한 방법론적 유형이 모든 곳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고아원과 자선 학교들, 설교와 교리문답 등이 그것들입니다. 인내심이 강한 인도인 교리교사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니면서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매우 철저한 원칙과 통제 아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했습니다. 잘 검증되고 인정받은 소수의 인도 성직자들은 모든 사역에 있어 분명히 트랑케바르 선교회에 소속되었으며, 이는 가부장제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각각의 회중은 자신의 선교사에 의해 지배를 받았지만 독립적이었다. 선교사들과는 때때로 총회 모임에서 만남을 가졌지만, 그들은 언제나 좀 더 훌륭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슈바르츠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의 동료선교사들이 언제나 그를 영적인 아버지로, 그리고 감독에 준하는 분(quasi-bishop)으로 생각했다. 각 선교사들은 지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 자신들의 지휘 아래 있던 교리교사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일련의 규칙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게 하였고 그들의 결정은 전체 회중에 의해 확정되었다. 선교사는 사실상 이 공동체의 대표자로 간주되었으며, 동일한 원칙에 따라 현지 지도자들도 인정되었다. 그리고 공동체에 속한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벌금, 태형, 그리고 다른 처벌을 하도록 허락되었다.


이런 모습이 그 당시 트랑케바르 선교회에 의해 진행된 개신교 사역의 유형이었습니다. 슈바르츠는 독일 경건주의의 배경을 가진 할레대학에서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었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48년 동안 사역하면서 한 번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선교지의 영혼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수입으로 선교비를 조달한 자비량 선교의 모델이었으며, 도덕적인 감화력으로 그 지역사회와 지도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침으로써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낸 선교사로서 250년 전에 이미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통전적인 선교를 실천한 모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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