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사 인물열전 3> 쥬르댕과 타나의 순교자들

2020. 10. 21. 14:32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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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에 걸친 십자군 전쟁, 그리고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에 의한 가공할만한 유럽침략은 그동안 막연한 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었던 동방의 나라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과 모험심을 고조시켰습니다. 특히 몽골제국의 유럽침략에 큰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교황청은 동방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몽골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동방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를 위해 교황청은 당시 몽골제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에게 여러 차례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인도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교황이 보낸 대사들은 정치적인 식견은 물론 이민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로서 주로 프란시스 교단이나 도미니칸 교단에 속한 수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도의 사냐시(힌두교 고행수도자)들처럼 무소유로 유랑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추구하는 유랑수도자들로서 청빈과 독신, 순종에 대해 서약했으며, 극단적인 상황과 고난에 단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52년에 교황 이노센트 4세(Innocent IV)는 그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유랑자회’(Societas Peregrinantium pro Christo)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아시아와 중국의 오지에 있는 미지의 나라들과 이교도들을 향해 떠나는 여정은 너무나 험난한 것이어서 전적인 믿음과 포기의 영성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인도에 왔거나 인도를 거쳐 간 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1289년에 교황 니콜라스 4세에 의해 파송된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 Corvino)이 있습니다. 프란시스 교단 소속이었던 그는 교황이 쿠빌라이 대칸에게 보낸 편지를 가지고 카스피해를 건너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가고자 했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에 일어난 전쟁 때문에 방향을 바꿔 인도를 거쳐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후 쓴 편지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나는 사도 도마의 교회가 서 있는 인도에 13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몇몇 장소에서 약 100여 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몬테코르비노의 요한과 동행했던 도미니칸 교단 수도사 피스토이아의 니콜라스(Nicholas of Pistoia)는 인도에서 죽어 그곳에 있던 교회에 묻혔다고 합니다. 인도에 대한 그의 짧은 언급은 아마도 마일라포르 지역의 사도 도마교회들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다른 편지에 말라바르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그곳에 수도사들을 파견하여 복음은 전한다면 풍성한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1321년에는 다른 수도사 선교사들이 인도에 왔는데요, 그들이 바로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하는 도미니칸 교단에 속한 프랑스 출신 수도사 쥬르댕(Jourdain Cathala de Séverac)과 프란시스 교단에 속한 네 명의 수도사들입니다. 이 네 명의 이름은 톨렌티노의 토마스(Thomas of Tolentino, 이미 아시아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었던 연로한 수도사), 파두아의 제임스(James of Padua), 시에나의 베드로(Peter of Siena), 그리고 티플리스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of Tiflis)였는데요, 이들의 통역사였던 조지아 출신 평신도 형제도 있었습니다.

이 네 명의 수도사들은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이 개척한 중국에서의 선교사역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히도 중국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에 인도에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네 수도사들은 봄베이만의 끝에 있는 살세떼(Salsette) 섬의 타나(Tana)라는 포구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을 가진 열 다섯 가정을 발견했고, 그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쥬르댕은 그곳에서 네 명의 프란시스 교단 수도사들을 떠나 일행을 다음 여정으로 데려다줄 다른 배를 만나기 위해 북쪽 항구인 브로아츠(Broach)로 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 타나에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수도사들이 묵고 있던 집 주인의 부부 싸움에서 비롯되었는데, 상당히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는데, 그 아내가 이슬람교 지방재판관인 카디(Cadi)에게 가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지역의 실권자들이 무슬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그녀에게 증인을 데려오라고 했고, 여인은 자기 집에 묵고 있던 외국인 수도사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와 제임스 그리고 데메트리우스가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재판관은 사건을 심리하기 전에 수도사들에게 그들의 종교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론의 와중에 재판관은 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였습니다. 수도사들은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압박이 계속되자 토마스가 분노하여 자신의 생각에 무함마드는 지옥의 자식이며, 그 자신이 지옥에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그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원래 사건은 잊혀지고, 격분한 이슬람교도들은 이를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독한 자들에 대한 재판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세 수도사는 손과 발이 묶인 채 뜨거운 태양 아래 여섯 시간 동안 노출되었고, 이어서 불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먼저 불 속에 들어간 이는 제임스였는데,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들어간 수도사는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불 속에서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지방관은 그들을 타나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지로 떠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본토에까지 갔지만, 그날 밤에 무장한 군인들에게 쫓기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집에 홀로 남아 있던 시에나의 베드로 역시 체포되어 이틀 동안 고문을 당한 뒤에 나무에 매달렸다가 마침내 목이 잘려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타나의 순교자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여행 중에 있었던 쥬르댕은 그 소식을 듣고 약 일주일 후에 되돌아 왔습니다. 쥬르댕은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처리하도록 허락을 받아 교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세파(Sefa)라는 곳으로 옮겼고, 그곳에 그들을 장사하였습니다.

네 명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쥬르댕은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심한 궁핍과 박해를 견디면서 계속 머물렀고,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324년 초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도시(타나)와 그 주변 지역을 드나들며 2년 반 동안 홀로 남아 있었지만, 나는 내 동료들이 받았던 영광스런 왕관을 소유할 만한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 후로 내가 당해야 했던 모든 고난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는 해적들에게 납치되었고, 사라센인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으며, 고소와 비방과 치욕을 받았고, 마치 어릿광대처럼 오랜 동안 셔츠 하나만 걸친 채 노출되어 있었다. 오늘까지 나는 성직자로서의 일상적인 삶을 박탈당했다.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분노와 저주, 육체의 허약함과 가난, 박해, 거짓 그리스도인 무리들의 욕설, 혹독한 기후,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다른 악한 일들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이 모든 것을 넘어 온유하신 예수님을 위해 고난당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른다 할지라도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극심한 가난 때문에 계속하여 여러 가지 신체적 질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혐오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 130명 이상의 남녀에게 기쁨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 얼마 후 그는 유럽으로 돌아갔고 자신의 사역과 인도의 기독교 상황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퀼론(Quilon)의 주교로 서품하였고, 그는 1330년에 다시 시리아 그리스도인들과 그 지도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를 가지고 인도로 떠났습니다. 로마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분리된 자들이었기에 쥬르댕을 통하여 다시 로마교회와 화해하도록 강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쥬르댕의 초기 저작물, 즉 두 개의 편지와 미라빌리아 데스크립타(Mirabilia Descripta)라고 불리는 동방 지역들에 대한 짧은 언급들을 보면 그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 인도 여기저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신앙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도마 사도를 그리스도만큼 위대하게 생각한다.


이 기록은 당시에 로마교회가 인도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을 매우 무시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언급은 말라바르에 있던 주류 시리아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언급은 아닐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쥬르댕은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것과 동일하게 이 그리스도인들 역시 로마교회에 속한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조력자들이 만 명 이상의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신실하고 열정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2, 3백 명의 준비된 수도사들만 있다면 매년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동방으로 향하던 수도사들은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체제의 한계 속에서 부득이하게 편협한 사고와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헌신과 인내, 그리고 선교적인 열정은 오늘날 모든 선교사들과 선교적인 삶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포르데논의 오도릭(Odoric of Pordenone)과 마리그놀리의 요한(John de Marignolli), 콘티의 니콜로(Nicolo de Conti) 등 로마교회에 속한 여러 수도사들과 선교사들이 인도에 방문하여 중세 후반 인도교회의 모습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들에 관해서 좀 더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제가 번역한 「인도교회사」(C. B. Firth) 제3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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