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랑케바르 - 인도 개신교 역사의 시작

2015. 9. 15. 05:25인도이야기/인도여행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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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필자가 C. B. Firth의 "An Introduction to Indian Church History"의 내용 가운데 트랑케바르의 선교역사를 다루고 있는 부분(제8장)을 번역한 것으로서 다소 길지만 초기 인도 개신교회의 출발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지겐발크와 플뤼차우의 선교사역을 이해하는데 무척 큰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동부 코로만델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트랑케바르(Trangqebar, Tarangambadi)는 덴마크의 동인도회사가 자리잡은 곳임과 동시에 인도에서 최초로 개신교선교가 시작된 곳으로, 기독교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타밀나두 지방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에, 동일한 타밀나두 지역에서 인도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은 18세기 초반 무렵이었다.  17세기 동안 포르투갈을 제외한 다른 유럽국가들의 무역 회사들은 인도에 근거지를 설립해왔다. 새로 들어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신교도들이었고 그들이 정착한 곳의 대부분은 동쪽 해안지역이었다.

네덜란들인들은 풀리캇(Pulicat, 1609), 사드라스(Sadras, 1647), 그리고 나가빠탐(Nagapatam, 1660)에, 영국인들은 마술리빠탐(Masulipatam, 1622), 마드라스(Madras, 1639), 쿠딸로르(Cuddalore, 1683)에,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폰디체리(Pondicherry, 1674)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덴마크인들은 인도 교회사에 있어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두 곳에 정착하는데, 하나는 현재 마드라스주 탄조르(Tanjore) 구역안에 있는 트랑케바르(Tranquebar, Tarangambadi)와 다른 하나는 뱅갈만의 캘커타 근처에 위치한 세람포(Serampore, 1976)였다. 프랑스인들은 로마 가톨릭이었지만, 그 나머지의 사람들은 개신교도들이었으며,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곳은 바로 그들의 정착지였다. 이들은 인도인들에게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어떤 정책도 없었으며, 그러한 의도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무역과 거기에서 오는 이득이었다. 그들은 자국민들을 위해 섬길 수 있는 목사(Chaplain)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들(Chaplain)도 자신들이 접촉하는 인도인들의 일부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 관심을 갖기 전에는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개신교회가 선교에 대해 무관심했던 이유는  교황에 대항하여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유럽 개신교회들이 로마 교회에 대항하여 생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을 계속해야 했고,  다른 개신교 분파들과 서로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논쟁을 계속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기간 중에도 로마교회는 비기독교 지역들에 대한 선교를 계속해왔다. 

마침내 영국에서 영국교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이 선교에 대한 책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기독교 지식 진흥을 위한 협회’(SPCK, 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를 1698년에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목적은 영국과 웨일즈에서 자선학교를 유지하고 성경과 다른 기독교 문학을 보급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국내와 세계의 다른 지역에 기독교의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1701년에는 ‘복음선포를 위한 협회’(S.P.G,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해외파트가 설립되었다. 영국교회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고 왕실의 중재 아래 통합된 이 협회는 해외에 있는 영국 사람들에게 영국교회의 사역을 제공하는 동시에 세계의 비기독교 종족들을 복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공언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들을 인도로 파송할 생각을 품은 사람은 루터교인인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 4세였다. 그는 그의 궁정 목사에게 적합한 인물을 찾는 일을 맡겼으나 궁정 목사는 덴마크 에서 여기에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하고, 독일에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인도에 가기로 동의한 지겐발크(Bartholomew Ziegenbalg)와 플루차우(Henry Pluetshau)라는 두 명의 젊은 신학생을 추천 받았다. 이들은 17세기의 후반 독일의 루터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경건주의라 불리는 부흥운동의 산물이었다. 루터교회가 경직된 교리에 주요한 강조점을 두는 것에 반대하여 경건주의는 개인적인 헌신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두 젊은 신학생들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할레(Halle)대학에서 당시 경건주의 핵심지도자였던 프랑케 교수의 지도아래 공부했다. 후에 두 사람은 왕의 개인적인 후원으로 ‘왕정 선교사’로서 트랑케바르(Tranquenar)로 파송되었다. 따라서 인도 최초 개신교 선교사는 덴마크왕에 의해 보내진 독일 루터란들이었다. 그들은 1706년 7월 9일에 트랑케바르에 도착했다.

트랑케바르에 있던 덴마크 당국자들은 그들이 오는 것에 대해 아무 통지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이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은 이 두 사람을 개인적인 이유로 무척 싫어해서 당국자들에게 이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 두 젊은 선교사들을 환영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사흘이 지나서야 자신들을 안으로 데려다줄 보트를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 도착해 덴마크령 정착지로 들어가는 성 입구에서 왕의 임명장을 제시하고 덴마크 사령관의 허락을 얻기까지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뙤약볕 아래 기다려야 했다.  사령관 하시우스(J.C. Hassius)는 그 곳의 두 명의 덴마크 채플린을 데리고 나타나서 이 두 선교사에게 그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물었다. 이런 억지스러운 입국허가를 받으면서 두 선교사는 철저히 따돌려졌고,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 온 밤을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시장거리에 서 있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한 젊은 관원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처갓집으로 데려갔고, 며칠 후 그들은 포르투갈인들의 구역 안에서 집을 얻어 주었다.

지겐발크와 플루차우는 포르투갈어와 타밀어를 배우면서 사역을 시작해 나갔다. 포르투갈어는 남인도의 유럽 무역 근거지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언어였고, 타밀어는 그 지역사람들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덴마크 동인도 회사의 군대 안에 근무하는 독일출신 군인들을 위한 예배를 집례했다. 동시에 그들은 그곳에 있는 유럽인들의 하인들에게 매일 2시간 정도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에 대해 가르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령관에게 요청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선교사들은 마침내 처음으로 현지인 다섯명을 데리고 예비자교육을 시작하였고, 1706년 11월, 다음해 5월에 이들에게 서약을 받고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고아들을 그들의 후견인들로부터 값을 지불하고 입양하였다. 이는 고아원의 기초가되었다. 그 아이들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들로 양육되었다. 그들은 또한 독일어를 가르쳤으며, 포르투갈어와 타밀어 학교를 시작하였다. 지겐발크는 언어가 가능해지자 타밀출신 힌두들과 종교적인 토론을 시작하였고, 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타밀어를 말할 수 있고 힌두교의 종교적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유럽인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그는 많은 청중을 얻게 되었다. 그에 대한 소식이 지역 안에 확산되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 와서 그와 대화하였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소규모 회중들이 형성되었고, 1707년 초 가을에 작은 선교교회가 성 밖에 세워졌으며, 첫 번째 타밀 개종자들 아홉 명이 그 다음 달에 세례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지겐발크는 언어를 배우는 재능이 있었다. 이런 재능과 그의 체계적인 습관들 덕택에 그는 일 년 이내에 타밀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겐발크의 언어습득이 플루차우보다도 훨씬 빨랐기 때문에, 지겐발크가 타밀인을 위한 사역에 그리고 플루차우는 포르투갈인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겐발크는 인도 사람의 도움 없이 타밀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겐발크는 어린이들의 문답 교육에 사용하기 위해 루터의 소요리문답 번역작업을 시작했다. 이어서 설교들과 소책자, 그리고 학교 교재들을 차례로 번역하였다. 도착한 지 2년 이내에 그는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인도인들의 언어로 시도해보지 못했던 한 가지 일, 신약성서를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러한 책들과 팜플렛들의 출판은 1712년에 유럽에서 들여온 인쇄기 덕택에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책의 사본들을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들어야 했다. 남은 생애 동안 지겐발크는 부지런히 글을 쓰고 번역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신약성경의 번역을 마쳤으며, 구약의 룻기까지 번역하였다. 다른 여러가지 타밀어 저작들 외에 그는 타밀-독일어 사전을 편찬하였고, 남인도 힌두교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독일어로 집필하였다. 그 독일어 원고들은 한 세기 이상이 지난 다음에야 출간되었다.

이 두 선교사들이 극복해야 여러 어려움들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사령관 하시우스의 적대감이었다. 그와 선교사들 간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하시우스는 두 선교사들이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아니 전혀 동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는 선교사들이 왕의 직접적인 권위로 파송을 받아 온 것과, 따라서 어떤 독립적인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하시우스는 그들이 쓸데없이 참견하며 복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선교사들은 그를 악의가 있는 사람이요 독재자라고 보았다. 1708년 11월에 최악의 사건이 일어났다. 지겐발크가 어떤 한 과부 사건이 정의롭게 다뤄지도록 촉구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보고 격분한 하시우스는 그를 체포하여 4개월 동안 성 안에 홀로 억류하였다. 결국 여론이 사령관에게 반하는 쪽으로 돌아가자 하시우스는 자신이 너무 심했음을 깨닫고 부인과 함께 독방에 갇힌 지겐발크를 방문하여 지겐발크의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서에 사인을 하고, 재판에 출두하여 진술하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에야 그를 풀어주었다. 

지겐발크와 플루차우가 받은 첫 인상들과 미래를 위한 이들의 계획을 기록한 편지들이 독일에서 출간되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다른 세 명의 선교사, 그루엔들러(Gruendler)와 조단(Jordan), 그리고 뵈빙(Boevingh)이 1709년에 트랑케바르에 도착했다. 그들은 많은 선교비와 선교 물품들, 그리고 프레드릭 왕이 하시우스 사령관에게 선교사들에게 모든 필요한 지원과 보호를 제공할 것을 분명하게 지시한 내용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돈을 가지고 선교사들이 생활할 넓은 집, 그리고 타밀, 포르투갈, 덴마크어의 세 학교가 사용하기에 넉넉한 부지를 구입하였고, 선교 사역은 보다 더 견고하고 조직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선교의 거점지가 되었던 포라이야(Poraiyar) 마을에도 정원을 구입했다. 그 관심은 영국에도 확산되어 SPCK는 비록 선교사들을 파송하지는 않았지만 후원금을 모금해주고, 인도에서 사용하기 위한 포르투갈어 신약성서 같은 책들을 인쇄하여 보급하는 등의 큰 도움을 주었다. 1712년에 트랑케바르에 세워진 인쇄소 역시 그 선교회의 선물이었다. 같은 해에 덴마크 왕은 연중 세입으로부터 매년 2000달러를 따로 구분함으로써 그의 선교사역을 위한 영구적인 재정으로 만들었다. 1714년에 그는 코펜하겐에 선교부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서구에 선교기구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트랑케바르의 선교정책과 일상적인 사역들은 1713년에 그루엔들러(Gruendler)가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그 민족의 언어로 기도하고 복음을 설교한 후에 그가 주로 강조한 점들은 다음과 같다: 다가오는 세대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켜줄 자선학교의 설립 및 교회와 학교를 위한 사역자들을 준비하는 일, 기독교 문서의 출판과 보급,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가르치는 인도 교리교사들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교육하는 일, 그리고 이루어진 사역에 대한 보고와 새로운 지침들을 주기 위한 선교사들과 인도 사역자들의 주간 모임 등이었다. 이 모든 일들의 목적은 단지 숫자를 늘리거나 표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지식, 그리고 거룩한 삶에 있다고 하였다.

트랑케바르에서 보다 주목할 만한 개종 사례 중 하나는 1709년에 세례를 받은 카나바디 바티아르라고 불리우는 한 젊은이였다. 그는 지겐발크의 현지 언어 교사(munshi)의 아들이었는데 지겐발크는 그에게 자신의 언어 학습을 돕게 했으며, 교리서와 다른 기독교 소책자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 청년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일을 통해서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부터 이 학교의 선생으로 고용되었으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시적인 재능을 교리문답서와 복음 이야기를 타밀의 운율로 옮기는 데 사용했다. 아울러 그는 이것을 아이들에게 노래로 가르쳤다. 한편으로 무겁고 서구적이었던 요소들 가운데서 인도적인 느낌의 즐거운 이야기를 노래로 가르친 것이다. 카나바디 바티아르 역시 다른 많은 개종자들처럼 같은 인도사람들로부터 오는 심한 박해를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위협을 하거나 감언이설로 회유하기도 했고, 한번은 그가 독살 당할 뻔하기도 했다. 세례를 받은 후에 그는 한 동안 트랑케바르를 떠났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갔을 때 그는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710년에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힌두교로 돌아가고 말았다.

1709년에 세 명의 선교사와 선교비 및 후원품이 도착한 후 지겐발크는 트랑케바르의 바깥쪽과 덴마크 당국자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다른 사역의 중심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가파탐(Nagapatam)을 방문한 것 외에도, 북쪽으로 긴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곳은 한 번 이상 방문하였고 S.P.C.K.와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 궁정목사의 환대를 받았던 곳이었다. 트랑케바르에서는 사령관의 적대감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의심, 그리고 동인도 회사의 규제 정책이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덴마크에서 이런 오해들을 제거하고 보다 더 나은 조치를 취하기까지는 결코 선교가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겐발크 자신은 1709년에 덴마크에 가려고 계획하였지만, 하시우스가 그가 덴마크로 가는 배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플루차우는 1711년에 덴마크에 갔지만, 어떤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하시우스가 곤경에 빠지면서 1714년에 지겐발크와 기꺼이 화해를 하였고, 그 해에 지겐발크는 덴마크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덴마크에 도착하여 지겐발크는 선교 감독으로 임명받아 왕을 알현했고, 트랑케바르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왕과 다른 관료들에게 들려주었다. 하시우스는 다른 사령관으로 대체되었다. 지겐발크는 독일로 여행을 했고, 이 여행기간 중에 아내와 결혼을 한 다음에 영국을 거쳐 마드라스로 항해는 영국 배를 타고 인도로 돌아왔다. 그가 트랑케바르에 도착한 것은 1716년 8월 말 경이었다.

일련의 새로운 사건들을 축하하는 듯, 그가 돌아온 후 수행되어진 첫 번째 프로젝트는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었다. 이 교회는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 교회였다. 같은 해의 또 하나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교사들와 교리문답 선생들을 위한 훈련학교였다. 불행히도 그 다음 4, 5년 동안은 벤트(Wendt)라고 부르는 코펜하겐의 선교부 총무와의 논쟁으로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사람은 지겐발크 사역의 비용이 증가하는 것을 경고하였으며, 지겐발크와 그루엔들러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선교사들이 서구에서 보낸 돈으로 부동산을 취득하고 집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짓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또 선교사들이 부득이하게 인도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야 했던 재정적인 도움도 반대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은 전적으로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영적인"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며, 인도 교회는 스스로 자신들의 물질적인 필요들을 공급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이제 막 결혼한 지겐발크와 그루엔들러의 급료를 지급하는 것까지 반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난들 중에 있는 몇 가지 포인트는 18세기 말엽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이 "트랑케바르 선교는 거대한 구빈원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던 언급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벤트는 실제 상황에 접촉할 수 없는 전적인 이론가였을 뿐이었다. 지겐발크는 그들이 돌보아 왔던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해서 심지어 세례를 받는 아이들에게 입힐 하얀 천 한 조각도 구입할 여유가 없다는 것과 그러한 상황들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그에게 상기시켰지만  그의 항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벤트는 결국 선교비를 중단시켰다.

이 논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지겐발크는 마침내 병이 들었고, 1719년 2월, 서른 여섯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루엔들러 역시 13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자 선교사역을 담당할 책임이 이제 그 나라에 도착한 지 겨우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3명의 선교사에게 남겨졌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덴마크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덴마크 왕은 벤트를 그 직위에서 제외시켰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위기속에서도 사역의 간접적인 확장은 이루어졌지만 다른 위기 가 찾아왔다. 새로 온 선교사들 중 리더로 추정되는 슐츠(Schultze)는 타밀회중들의 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비록 선의의 말이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카스트에 대해 성급하게 공격한 데서 비롯되었다. 초기 선교사들, 즉 그들 이전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개종자들 가운데서 다양한 수드라 카스트들로부터 개종한 이들과 ‘지정카스트(scheduled)’로 알려진 불가촉민 계층에서 개종한 이들 사이의 차별(distinct)을 인식하고 있었다.

십자가 형태로 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 교회 예배당에서 수드라 남자들은 본당 회중석의 한 편에 앉았고, 다른 카스트의 사람들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드라 여인들은 십자형 교회당의 한쪽 날개 부분에 앉았고 다른 카스트의 여인들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성찬식 때는 모든 수드라 카스트의 남자와 여자들이 먼저 성찬에 참여하고, 다른 카스트의 사람들은 그 다음에 참여하였다. 이와 비슷한 차별이 학교에서도 이루어졌다. 비록 선교사들이 보다 총명한 아디 드라비다(Adi Dravida) 어린이들에게 포르투갈어를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서양 옷을 입히면서 이러한 차별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포르투기즈’(Portuguese)로 불리게 되었다. 슐츠는 규칙을 통해 이러한 차별을 막아보려 했으나 오히려 그 결과는 반대와 불만족이었다. 결국 그가 트랑케바르를 떠난 후, 1725년에 도착한 새로운 선교사들인 왈터(Walther)와 프레시어(Pressier)는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회복시킴으로 평화를 가져왔다.


 

 

지금은 트랑감바디로 불리우는 작은 해변마을 트랑케바르의 중심거리 모습.


 

특히 남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아침마다 여인들이 자신의 대문 앞에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기 위해
다양한 문양과 형상을 그려놓는다.
기독교인들은 주로 집에 찾아오는 이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이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트랑케바르에는 매우 유서깊은 두 개의 교회가 있는데,
바로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교회와 시온(Zion)교회이다.

이곳은 시온교회의 부속건물로 순교자홀.


 

밝은 표정으로 낯선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타밀출신 기독교 여성들...


 

이곳에 적힌 글귀가 너무가 마음에 와 닿았다.

조용하게 섬겨라
사랑으로 섬겨라
겸손하게 섬겨라
어떤 보상도 바라지 말고 섬겨라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곳이 유명한 시온교회(Zion Church교회로서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도착하기 전,
덴마크와 유럽인들을 위한 예배공간으로 1701년에 세워졌다.

이는 마드라스의 Mary's Church에 이어, 
인도에 세워진 두 번째 개신교 교회로서
지겐발크에 의해 최초로 인도인들 다섯명에게 세례가 베풀어진 곳이다.


 

지겐발크와 플뤼차우에 의해
개신교선교가 시작된지 30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금색 동상이 최초의 선교사인
"바르톨로뮤 지겐발크"(Bartholomew Ziegenbalg)이다.


 

뒤쪽에서 바라본 시온교회의 모습.


 

시온교회의 마당에 서 있는 선교사들의 묘비...
이런 묘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하고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독일어로 쓰여진 묘비명...
당시에 선교사로 나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미지의 땅, 동방의 조그만 나라 조선에 와서 죽어갔던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님들이 그러했듯이...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온교회의 내부 모습이
너무 낡고 초라해 가슴아팠다.


 

영국 식민지시대에 이곳에 와서 사역했던 감리교 선교사들의 사진과 명단이 적힌 배너.


 

1701년에 건축되고 1782년에 재건축되었으며
1839년부터 2년간 보수 및 개축을 했다.
아마도 지금 건물은 1840년에 개축된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이 교회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목회자들을 소개하는 배너.


 

강단의 모습을 좀 더 클로즈업해서 담아보았다.


 

트랑케바르 해변에 우뚝 서 있는 데니쉬 포트(Danish Fort).
덴마크의 사령관 하시우스가 그의 군대와 함께 주둔하던 곳이자,
덴마크 동인도회사의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보다 더 해변 쪽에서 바라본 데니쉬 포트.
선교사로 파송받아 왔지만
어느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던 지겐발크와 플뤼차우.
상륙도 힘들었지만 해변에 상륙한 후 저 성에 들어가기까지
4일이 소요되었다.


 

대니쉬 포트의 북문 입구.
이곳으로 들어가면 작은 박물관이 꾸며져 있다.


 

당시 이곳의 사령관들이 본국과 주고받았던 공문서와
왕의 직인이 찍인 편지들도 보관되어 있다.


 

성내에서 주로 군인들이 숙식하며 훈련했던 곳.


 

이 성은 육지쪽으로 난 문이 정문이다.
당시 덴마크 해군들은 인도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상으로 공격해 올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처음에 힌두 사원인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힌두사원의 양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지어진 교회였다.


 

지겐발크가 상륙했던 해변에 세워진 기념비


 

지겐발크가 한 차례 덴마크에 돌아갔다가 돌아와서
1716년에 세운 새예루살렘교회.
이 교회는 유럽인이 아닌 현지인들을 위한 교회였고,
트랑케바르 미션의 가장 소중한 열매였다.
이와 함께 그는 학교와 고아원, 각종 언어학교 등을 설립했다.


 

새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묘지들...


 

초기선교사들과 이후 이곳에서 사역했던 주요 목회자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다.


 

새예루살렘교회 내부에 있는 지겐발크의 묘.
1719년 2월 23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그는
이곳 인도땅의 작은 해변마을에서
그가 양육한 성도들의 눈물 속에 주님의 품에 안겼다.


 

지겐발크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은 모두 그대로 인도에서 최초가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선교사, 최초의 성경번역자,
최초의 인쇄출판가, 최초의 사전편찬자,
최초의 타밀어 학습교본 저작자, 최초의 남인도 신들의 계보 작성자,
최초의 정오 무료급식 제공자,
최초의 찬송가 편찬자,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
최초의 종교간의 대화 조직자....

그가 걸어갔던 길은 모두 최초가 되었다.
지금의 선교사들은 모두
아마도 그가 걸어갔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리라.


 

지겐발크가 성찬식을 집례했던 곳.


 

그래도 새예루살렘교회는 현재 주교가 목회하고 있는데 
많은 회중이 주일마다 에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지겐발크의 영성과 선교열정을 이어받아
남인도에서 많은 자국민 선교사가 양성되어
북인도 미개척지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겐발크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소개하는 3부작 타밀어 영상자료.

http://yourmediashare.net/video/55/ziegenbalg-bartholomew-part-1/

http://yourmediashare.net/video/56/ziegenbalg-bartholomew-part-2/

http://yourmediashare.net/video/57/ziegenbalg-bartholomew-par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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