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가야 - 리라의 현이 울릴 때

2015. 6. 23. 13:47인도이야기/인도여행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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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드가야 - 리라의 현이 울릴 때
Bodhgaya - The time when the lyre strings resound 



이른 새벽,
가야 역에서 내려 빠란타 한 장과 짜이로 아침을 해결하고
보드가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가야에서 약 11km 떨어진 이곳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 즉 고타마 싯달타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에 이른 곳으로서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
최초로 설법을 베푼 사르나트의 녹야원,
마지막 열반에 든 구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이다.

비교적 잘 닦인 도로를 타고
버스는 아직 연무가 채 걷히지 않은 들녘 한 복판을 내달려
어느덧 부다가야로도 불리는 보드가야에 도착했다.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당시
이곳에는 무려 2만에 이르는 수행자들이 고행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타마 싯달타 역시 그 2만 명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브라만교와 자이나교의 대표적인 수행방법인 금욕과 고행을 통해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자
이곳에서 어떤 이는 먹지 않고, 어떤 이는 눕거나 잠을 자지 않고
숲속에서, 바위 위에서, 나무 아래서 수행에 매진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후 팔리어로 기록된 경전에 의하면
붓다 역시 처음에는 하루에 한 끼,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끼만을 먹었다고 한다.

수행의 막바지에는 하루에 쌀 한 톨과 참깨 한 톨만을 먹었으며,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지고,
등뼈를 만지면 뱃가죽이 만져질 정도로
극한의 고행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수행하기를 무려 6년,
마침내 그는 인생과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사실 이 깨달음은 그토록 힘들게 계속해 온 
고행으로부터 얻어진 깨달음이 아니었다.

당시의 수행자들은 고행을 통해
인간이 가진 내적인 욕망의 불꽃을 잠재우려 했다.
서양철학적 사고로 표현하면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는 자아(Ego)를 잠재우고 잠재움으로써
열반적정의 고요한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 동안 이 원리에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잠재우고자 노력했지만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는 극한의 고행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패와 좌절만 맛보았다.

그 고행의 끝자락, 더 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
 잠부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면서 
열에 젖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 붓다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리라(인도의 악기로 하프의 일종)의 현(絃)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자아를 놓아버렸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우주의 소리,
리라의 현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잠재우려고 했던 자아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사라지니 번뇌도 사라지고 집착도 사라졌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
一切皆苦)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는 법열에 휩쌓였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탄생이자 마지막 탄생이었다.

깨달음의 희열이 가라앉고 나자
그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일어나
생로병사와 윤회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일체중생들을 향해
위대한 첫 발자국을 내딛었다.

보드가야에는 2500년 전과 다름 없이
지금도 수많은 수행자들과 구도자들로 북적인다.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수많은 이들이
부처가 내딛었던 그 발자국을 따르고자
세계 곳곳에서 이 작은 마을로 몰려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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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에,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마을, 보드가야에 가다.

연무가 엷게 덮인 들판사이로 쭈욱 뻗은 가야에서 보드가야로 가는 길...


도를 찾아가는 길에도 항상 돈을 구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


친구들과 어울려 뛰노는 것이 더 어울릴법한 어린 동자승들에게
이 법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나무 아래 의자 하나 놓으면 그곳이 이발소!
보드가야 역시 인도라는 사실을 이 이발소가 증명해준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 옆에 세워진 마하보디사원.


보드가야 대각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각종 상징물들을 통해 숭배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음을 이룬 
B.C. 5세기에서 A.D. 5세기까지 약 1천 년 간을 1기, 
기원후 5세기에서 1420년경 까지를 제2기, 
1420년경부터 현재 까지를 제 3기로 나눠 볼 수 있다. 

가장 전성기는 B.C. 5C에서 A.D. 5C까지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15C 이후에는 보드가야 대각사는
모든 사람들의 시야에서 묻히고 말았다. 

보드가야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 대영제국의 고고학적 발굴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옴마니받메훔을 비롯한 티벳불교의 주문을 적은 돌조각들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티벳불교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보드가야를 방문하여 설법하는 일정에 맞추어
수많은 승려들과 불교도들이 인도와 세계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남쪽지역에서 본 마하보디 대각사의 전경.


높이 54미터의 마하보디 대탑.


대탑의 주변에서는 오체투지로 삼천배,
일만배를 하는 많은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저 나무판 위에 엎드렸을까,
색이 바래고 닳아 엷어진 나무판들이 그들의 헌신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날마다 티벳어로 된 경전을 독송하며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살아온 티벳불교의 고승들...


수천의 승려들이 설레임으로 법어를 기다리고 있다.


마하보디 사원의 다른 한쪽 구역은 일반 순례객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이곳에는 인도인들보다 한국, 일본, 스리랑카, 유럽 등 외국에서 온 이들이 훨씬 많았다.


오늘 법어를 내려주실 큰 스님이 석존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보리수 나무 아래 정좌하고 앉았다.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곳곳에서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다.


승가의 규율을 잘 모르는 필자가 보기에도 스님들의 장삼 색깔은
그의 신분과 수행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큰 스님의 주변에는 모두 노란 장삼을 입은 스님들로 가득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며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날인
성도절(음력 섣달 초 여드레)을 이틀 앞두고 연일 이어지고 있는 대규모 법회 장면이다.

성도절에는 달라이 라마가 방문하여 법어를 전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석가탄신일과 더불어 불교의 가장 큰 축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세계적인 여행가이드북인 론니플래닛은
이곳의 보리수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한다. 

보리수나무를 향한 아쇼카 대왕의 뜨거운 관심 때문에
질투에 사로잡힌 왕비가 원조 보디 트리(Bodhi Tree)를 죽이기 전에 
다행히 아쇼카의 딸 상가미따(Sanghamitta)가 그 묘목 하나를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로 옮겨놨다. 

그 나무가 계속 자라나서 작은 나뭇가지를 하나 다시
보드가야로 가지고 와 원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심었다.

따라서 지금 있는 보리수는 석가모니 부처가 명상했던
보리수의 손자 뻘 되는 나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처가 가르친 진리는
사실 고행으로서 얻어지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의 깨달음은 자신이 경험했던 극한의 고행과 금욕적인 수행,
심지어 깨달음을 얻고자 열망하고 있는 자아마저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이 깨달음을 위해서 그가 제시한 수행방법이 바로
팔정도(Noble Eight-fold Path)였다.
그 팔정도는 다음과 같다.

1.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2.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3.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4.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5.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6.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7.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8.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그러고 보면 이 여덟 가지의 길은
인간의 일상적인 삶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

참된 진리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언제나 인간 삶의 한 복판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 여덟 가지 길을 따를 수만 있다면
그가 곧 깨달음을 얻은 자,
붓다가 아닐까.


사리탑마다 봉양된 정화수며 금송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 비구니는 필자가 사원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까지
이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체투지 봉양의 와중에 잠시 휴식에 들어간 듯 하다.


비구와 비구니의 구역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많은 비구들이 삼천배, 혹은 일만배 오체투지 공양을 통해
집착과 욕망을 비우고 깨달음에 나아가고자 정진하고 있다.


나처럼 몸이 둔하고 다이어트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런 공양이 운동으로도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기독교 초기 사막의 수도자들을 비롯하여,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수도사들 역시
이러한 고행과 금욕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는 노력을 쉬지 않았으니
종교적인 수행방법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 같다.


마하보디 대탑 안에 있는 순금 불상.
본래 석가모니 부처는 열반에 이를 때
제자들과 후예들이 자신의 형상을 만들거나
그것을 섬기는 것 일체를 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 부파불교 시기의 유적들에는 불상이나 탱화가 없없고, 
주로 부처님이 사용했던 물건들과
다비식에서 나온 사리들을 모신 탑 등의 상징물들을 숭배했다.

상좌부 불교전통에서 시작된 불상제작과 숭배의 전통은
당시 세계의 보편적인 종교적인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었으리라.

아마도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실재한다고 믿는
일반 대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은 결국
하나같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십계명을 통해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의 여러교파에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그리거나 만들어 세우고
그에 대한 공경심을 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티벳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며 암송하는 스님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40여년간 수많은 가르침을 남겼는데,
제자들이 이를 정리하여 경전화하였고
이 경전들은 종파에 따라서 중요도가 매겨져
명상과 수행의 지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초기불교의 경전 외에도 수많은 대승경전과
탄트라 계열의 티벳불교 경전들이 있고,
거기에 율장(律藏)과 논장(論藏)까지 포함하면
그 종류와 분량이 어마무시하다.
그리보면 신구약 성경 한 권을 읽고 묵상하는 것마저도 
힘들어하고 게을리하는 목회자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한편으로 스님들이나 불교도들 중에
그 많은 경전들을 다 읽고 세상을 떠난 이들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불교와 힌두교는 이런 풍습에서 상당히 많이 닮았다.
신기한 것은 인도로 건너온 로마 가톨릭교회 역시
이런 풍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온 한 여인이 경전을 읽다가 명상에 잠겨 있다.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독송을 들으면서
영어발음으로 기록된 경전을 보고 따라 읽는 서양의 불자.
서구인들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는 불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의외로 서구에서 온 불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첨단 물질문명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서구 세계의
정신적, 영적 공허를 불교를 비롯한 동양종교들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디트리를 둘러싼 여러 곳에 이렇게
꽃과 각종 상징들로 장식된 기도처가 자리잡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내디딘 첫 발을 기념하여 만든 거대한 족적.


기부금을 접수하고 경전을 파는 매대가
보디트리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이채로웠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고,
그 진리의 길을 따르는 것이 가장 핵심이겠지만
사람들은 항상 어떤 대상을 신성시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숭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보리수나무 역시 수 천 년 동안 그렇게 숭배되어 왔으리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성지에 가보면
기독교도들도 이런 부분에서 예외가 아니다.


동남아, 아마도 태국이나 미얀마에서 온 여성불자일 것이다.
여러 차례 저 표정으로 탑 주위를 돌고 있었다.


서양의 불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다.


일반인들이 가부좌 자세를 따라서 하기에는 상당히 버겁다.
아마도 남편은 먼저 불자가 된 부인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함께 온 것 같다.
마치 부인의 손에 이끌려 교회당에 처음 나온 남편과 같은 모습이 흥미롭다.


티벳어로 된 저 경전을 얼마나 오랫동안 읽었을까.
경전의 색이 바래고 손때가 묻어 있다.
읽고 또 읽으며 마음에 새기다보면
언젠가는 그 경전의 가르침대로 살 날이 오리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아오니 엎드려 있던 바로 그 비구니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전화기의 라디오를 통해 독송과 법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하니
IT시대는 불교 안에도 이미 도래해 있는 듯 하다.


여성 불자들의 수행지역...
역시나 오체투지는 티벳불교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봉양이다.


고승들도 보디대탑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독송에 여념이 없다.


티벳불교에는 일반 대승불교나
상좌부 불교에는 없는 경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는 티벳인들이 불교를 수용하기 전에 믿고 있던
라마교와 민간신앙이 불교와 혼합되면서 생겨난 것들로서
이런 배경에서 그 유명한 '사자(死者)의 서(書)'도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온 백인 승려의 여유넘치는 표정이 내겐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진 사진장비보다 훨씬 고급 장비들이 가방에 담겨 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티벳불교 동자승들...


보드가야에는 불교가 융성한 나라들이 세운 여러 사원들이 있다.
이 거대한 불탑은 일본 불교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여러나라의 절들을 다 볼 수는 없었다.
우리와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절은 역시 일본의 전통양식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오랫만의 포스팅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제대로 된 랩탑 컴퓨터가 없다보니
사진작업이 불가능했습니다.
시간도 넉넉지 않아서 포스팅 하나 올리기가 정말 쉽지 않네요.

하지만 틈틈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8월 초에 인도사진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블로거님들도 초대하겠습니다.
메르스 공포는 한 풀 꺽이는 듯 한 데
다가오는 여름,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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