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남단 깐야꾸마리의 아침

2016. 1. 3. 13:34인도이야기/인도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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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야꾸마리의 아침
A morning of Kanyakumari, the Southernmost of India


광대한 인도대륙의 최남단,
인도양과 뱅골만, 아라비아해가 만나는
인도 최고의 성지 중의 하나 깐야꾸마리...

오늘은 그곳의 아침풍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쉽게도 연무와 구름때문에 둥실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했지만
삼면이 탁트인 바다와 아침에 펼쳐지는 해변의 이런 저런 풍경들이 
먼길을 찾아온 여행자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희망을 품게 했다.


이른 새벽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해변으로 밀려들고 있다.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어오는데
야속하게도 짙은 구름과 연무가 수평선 위를 뒤덮고 있다.


현대 힌두교 부흥 및 개혁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거대한 동상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그가 명상했다고 하는 해변의 바위섬에도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저 짙은 구름을 입김으로 불어낼 자가 누구랴.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이 터오르면서
드라마틱한 오메가 일출 대신 
서기 어린 붉은 햇살에 물든
불붙는 듯한 구름을 선물로 보여주셨다.


그렇게 깐야꾸마리의 하늘은 밝아왔고,
인도 최남단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 이 마을의 가장 유명한 힌두사원인
꾸마리 암만사원에서 새벽 뿌자를 드리고
일출을 보기 위해 모여든 힌두들... 

이들에게도 떠오르는 아침해는
우주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신성한 존재이다.
모두들 간절한 기다림을 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동녘하늘을 응시하고 있건만....


여인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꽃을 파는 이 부부는
어디서든 우산만 거꾸로 펴면 비즈니스가 시작된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남인도에서 유명한 쉬바신을 숭배하는 종파의 순례객들이
자신들의 소속을 상징하는 검정색 도띠를 두르고 카메라를 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인도의 곳곳에서 깐야꾸마리를 연결하는 노선버스들이 도착한다.


내게 손을 흔들던 이들이 노선버스에 올라탔다.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삶의 마지막 행선지를 알고 있을까.


깐야꾸마리 근교에서는 이런 예쁜 교회들도 만날 수 있다.


인도 여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머리를 감고 단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은 길거리에서라고 예외일 수 없다.


굳이 말끔하게 차려입지 않아도 흉이 되지 않고,
맨발로 길바닥 위에서 지내도 그리 불편하지 않은 인도인들...
이들에 비해 우린 살아가면서 입고 쓰는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겨울에도 기후가 온화하고 따뜻한 이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길가에서 잠을 자고, 장사하고, 생활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유해가 이곳에 도착하여
뿌자를 드린 지점에 세워진 간디기념관.

간디의 유해는 세 바다가 만나는 이곳 깐야꾸마리 앞바다에 뿌려졌다.


간디기념관에서 바라본 스와미 비베카난다 동상과 비베카난다 기념관.


1948년 2월 12일, 과격힌두교도의 총을 맞고 암살당한
마하뜨마 간디의 유해가 화장된 후 이곳에 도착하였다.


전형적인 오릿사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 간디 만다빰은
간디의 유해가 바다로 뿌려지기 직전에 보관되어 있던 곳이다.
이 석조 구조물은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이 되면
유해가 놓였던 자리에 햇볕이 들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깐야꾸마리의 유명한 선셋포인트가 바로 이곳!


햇살이 따뜻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라나시의 성수는 아닐지라도 세 바다가 만나는 거룩한 장소인
이곳 상감(Sangam)에 몸을 담그는 일은 
힌두들에게 단순한 해수욕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와 손녀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린 소녀가 몸에 참 많은 장신구를 걸치고 있다.


육지로부터 약 500미터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 세워진
스와미 비베카난다 기념관.
비베카난다는 이 섬에서 명상을 하며
세계종교회의가 열리는 미국 시카고에 갈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70년에 지어진 후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깐야꾸마리 보트선착장에서 15분마다 보트가 기념관을 향해 출발한다.


한국에서 구입해온 싸구려 망원렌즈가 엄청난 후핀이 나는 바람에
포트레이트 사진을 찍을 때마다 참 애를 먹었다.
이 사진도 그렇게 핀이 나가버린 사진 중 하나다.

 

인도에서 8년을 살다보니 이제 얼굴만 봐도
대충 카스트와 직업, 교육정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13억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길 기도해본다.


깐야꾸마리가 힌두성지이긴 하지만 가끔씩 무슬림들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아마도 나처럼 인도의 땅끝마을을 보기 위해 온 것이리라.


이른 아침, 시장한 사람들을 위해 로띠를 굽는 이들의 손길이 참 바쁘게 느껴진다.


저 사탕수수 주스를 마실 용기를 내기까지 8년이 걸렸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조개껍질로 만든 예쁜 공예품들이 참 많았다.
아내는 하얀 조개껍질로 장식된 예쁜 화장실용 거울을 단돈 100루피에 구입하고 행복해했다.
물론 처음 우리에게 부른 가격은 800루피였다는...^^

 

저 많은 장식품들이 과연 다 팔릴까...
저 장식품 중 어떤 것들은 수천킬로를 달려 어느 집 거실과 현관을 장식하겠지...


사리를 입은 채로 바닷물 속에 들어간 여인들...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물속에 들어가면 그냥 즐거워지는 모양이다.


아이는 엄마를 향해 물장구를 치고
여인들은 주워온 돌덩이로 바닷물에 때를 민다.
저 여인들의 갈색 피부는 돌로 밀어도 될만큼 강하단 말인가...??


북인도 내륙에 사는 인도인들은
평생 한 번 바다를 볼까 말까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좁은 국토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한반도는 얼마나 축복받은 땅인가!


우리가 방문했던 기간이 12월 말,
새해를 앞둔 때여서인지 유난히 검은 옷을 입은 쉬바종파 순례객들이 많았다.
그들 역시 깐야꾸마리에서의 몸을 담그는 일에는 열정적이었다.


인도의 땅끝마을에는 지금도 저렇게 파도가 치고,
끊임없이 순례객들과 여행자들이 우리가 갔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리라.


백합조개와 소라껍질을 들고 바다냄새를 맡아본다.
소라껍질을 귀에 대고 바다소리를 듣던 추억이 새롭다.


종교적인 수행을 위해 인도 곳곳의 성지들을 순례하고 있다는 두 사내를 만났다.
브라만을 표시하는 삼줄을 드리운 이 사내들은
뭄바이에서 다니던 은행을 6개월간 휴직하고 순례중이라고 하였다.


마치 발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처럼 인상이 착해보이는 젊은이.
나이가 이제 스물 다섯이지만 벌써 결혼하여 아이가 둘이라고 했다.
직장과 가족을 뒤로하고 과감히 순례의 길을 떠날 정도로 인도인들의 종교적인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길을 걷다 만난 부녀.. 딸인지 아들인지 분간이 안되었지만
모자를 보고 짐작하여 딸이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하이데라바드에서 가족여행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장사하는 엄마 곁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아이에게
반듯한 장난감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옆구리가 찢어진 북이 아이에게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장난감이 되었다.


처음에는 할머니와 손주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엄마와 아들이란다.
인도사람들은 정말 남자고 여자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특히 피부색이 짙은 남인도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따밀나두 주 마두라이에서 약 250km, 
케랄라주의 유명한 해변휴양지인 코발람 비치에서 약 35km 거리에 있는 깐야꾸마리.
인도의 땅끝마을인 이곳의 지명은 쉬바 신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서원하고
처녀의 몸으로 죽어버린 깐야데비로부터 유래한다.

본래 깐야 데비는 이곳의 토속신이었지만 힌두교가 남인도에 전파되어 내려오면서
힌두교의 여신으로 흡수되었으며 결국 쉬바신과 결혼까지 했다는 신화도 생겨났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 있을 때 새해에 해남 땅끝마을과 여수 향일암을 방문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때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던 감동을
이곳 인도대륙의 최남단 땅끝마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2010년 12월 27일
인도 최남단 땅끝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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