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2> 원천① - 시리아 전통

2020. 10. 12. 13:29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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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교회가 지닌 가장 오랜 전승에 따르면 사도 도마가 주후 52년에 말라바르(Malabar)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 전승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아마도 3세기,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남인도에 교회가 설립됐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이 전승은 주후 345년, ‘가나의 도마’(Thomas of Cana)라고 불리는 시리아 그리스도인 상인이 일단의 시리아 이민자들을 데리고 말라바르에 왔음을 전해준다.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과 이주자들 역시 대략 4세기 후반 이후, 즉 네스토리우스파의 아시아 선교의 황금기 동안에 인도에 들어왔다.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로 알려진 이른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사실상 페르시아교회였으며, 그 기원은 네스토리우스 논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네스토리우스 전통은 16세기 초,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남인도에서 지배적인 교회가 된 것으로 나타난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캘리컷(Calicut)에 도착함으로써 사도 도마 그리스도인들(St. Thomas Christians)의 역사에 있어 길고 비극적인 장이 시작된다.

1500년에 인도에 온 프란시스 교단 선교사들은 네 명의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의 관할 아래 있던 기독교회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1514년에 교황 레오 10세가 동방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부여해 준 ‘파드로아도’(Padroado)를 공표한 데 힘입어 그들의 충성을 얻기 위한 단호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들은 인도 그리스도인들이 페르시아교회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자신들에게로 들어오도록 하려고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가운데는 해외에서 부임해오는 주교들을 차단하기 위한 해상 봉쇄도 있었다. 그 봉쇄는 1665년 안디옥 주교좌의 관할 하에 시리아교회 주교가 도착함으로써 마침내 해제됐다. 그 사이에 있었던 로마교회의 성직자단과 사도 도마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투쟁은 쓰라린 아픔이었다.

1599년의 디암페르 총회를 기념하여 건축된 박물관


1599년에 있었던 디암페르 총회(the Synod of Diamper)에서는 3만 명의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을 제외한 고대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로마교회에 복종했다. 그러나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회의 멍에 아래 생소한 전례와 교리, 관행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며, 1653년에 그 유명한 ‘쿠넨 십자가의 봉기’(Revolt of the Coonen Cross)가 일어났다. 그들은 고대의 돌 십자가에 묶인 밧줄을 잡고 로마교회와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엄숙한 맹세를 했다. 마침내 해상 봉쇄가 깨지고 비(非)로마 주교가 도착한 것은 바로 이 반란 이후였다.

쿠넨 십자가의 봉기(Revolt of the Coonen Cross)


이때까지 도마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회에 속한 사람만 아니라면, 자신들의 주교가 가진 신학이나 그들의 소속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마르 그레고리우스(Mar Gregorius)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아니라 야곱파(Jacobites)였지만 환영을 받았고, 그때부터 시리아교회는 야코바이트교회가 되었다.

여기서 더 이상 시리아교회의 이후 역사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에 있었던 시리아교회와 영국성공회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 간의 복잡한 관계 속에 1887년에 형성된 개혁교회인 마르토마교회(Mar Thoma Church)를 들 수 있다.

신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중요한 사실은 께랄라의 고대 시리아교회가 그 역사 속에 여러 다른 전통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네스토리우스파로 언급되는 페르시아교회의 전통과 동방 시리아교회 또는 야코바이트교회의 전통을 들 수 있겠다.

시리아교회는 오랜 세월 인도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새로운 전통에 속한 다른 인도의 신학자들에게 어떤 지침과 영감을 줄 수 있는 독특한 유형의 신학을 발전시켰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서구신학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최근에야 비로소 신학서적의 저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수 세기 동안 이질적인 힌두교 환경의 한복판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상당히 내부 지향적이 되어 자신들의 비기독교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의 특수한 카스트가 되어, 그 사회의 카스트 체계에 적응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더욱이 교회의 예전 언어가 대부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시리아어였다. 그 예전은 실제로 보존되어 내려와 그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지만, 19세기 초반까지도 성경의 모국어(말라얄람) 번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학적 관심사나 토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시리아교회 공동체는 문화적으로 인도 사회와 밀접하게 통합되어 왔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복음전도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인도의 용어로 만들어진 복음전도를 위한 도구로서의 신학적인 결과물이 거의 없었음은 물론이고 아예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시리아교회의 신학은 안수 및 서품식을 위한 예전과 신조들 가운데서 주로 발견되는 정도로서, 이는 전적으로 시리아어에 기반한 시리아의 신학일 뿐이며, 인도 토양에서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는 인도인의 사고와는 거리가 먼 로마 가톨릭 또는 개신교의 신학이다.

남인도에 아직도 작은 규모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있다는 점과, 고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이 교회와의 유대관계를 지속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겠지만, 이용할 수 있는 남은 기록이 없으므로 네스토리우스파 시대 인도교회의 신학에 대한 질문은 제쳐둘 수밖에 없다.

대신 시리아교회 특유의 기독론이 인도 신학에 끼친 영향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리아정교회는 종종 ‘야코바이트’ 혹은 야곱파(Jacobit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서 ‘야코바이트’는 통상 ‘단성론자’(monophysite)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교리사 속에서 단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한 에우티케스(Eutyches)와 관련되어 있다. 에우티케스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하지만 시리아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구별되는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정한 칼케돈 신조를 거부한 것은 물론, 마찬가지로 에우티케스 역시 거부하고 정죄했다. 근대 인도의 시리아교회 저술가 필립(E. M. Philip)은 주장하기를 538년에 세상을 떠난 안디옥의 세베루스와 같은 초기 시리아교회의 교부들은 ‘두 가지 본성으로 인정된’(acknowledged in two natures)이라는 문구가 네스토리우스파의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믿는 바에 있어서는 칼케돈 측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본성’(nature)만이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 본성은 에우티케스적인 의미에서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두 가지 본성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고 본 서방교회의 관점에 가까웠다. 그들이 확정했던 것은 그 ‘하나의 본성’(one nature)이었다고 필립은 말한다.

신성과 인성의 위격 연합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본성은 혼합되지 않고, 그리고 혼동되지도 않고, 본질에 있어서 불가분리적으로 두 본성의 속성들을 보존한다. 칼케돈 공의회와 시리아교회의 교부들은 모두 본성과 성육신의 결합이란 관점에 있어 같은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공의회가 실제로 정죄했던 것은 에우티케스의 가르침이었는데, 그것은 연합의 성격에 대한 개념에 있어 우리 주님 안에 두 가지 본성이 너무나 통일되어 있으므로 ‘그중 한 본성이 다른 한 본성을 흡수했다’고 하는 가르침이었다.  E. M. Philip, The Indian Church of St. Thomas (1950), p. 368


필립은 칼케돈 신조가 그리스도 위격의 진정한 통일성을 수호하는데 있어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면서, 6세기의 야곱파 저술가인 마북(Mabug)의 주교 마르 필렉시노스(Mar Philexinos)의 비평을 인용한다.

우리는 칼케돈 공의회를 저주하고 제쳐놓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는 본성과 속성들, 행위들을 분리시키고, 그의 존귀하심과 겸비하심,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분리하며, 그분을 둘로 생각함으로써 사위일체’(Quaternity)가 될 뿐 아니라, 단순히 사람의 아들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Ibid. p. 374


시리아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가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 그분의 새로움과 유일성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긴다. 19세기 중반의 시리아 신학자 필립포스(E. Philippos)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본성이 하나라고 믿는다. 그들은 두 가지 본성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본성, 즉 하나님 되심의 본성과 사람 되심의 본성이 마치 물과 함께 존재하는 포도주처럼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본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두 본성이 서로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E. Philipos, The Syrian Christian of Malabar (1869), L. W. Brown. op. cit., p. 292


현대 인도의 시리아교회 신학자 사무엘
(V. C. Samuel)은 안디옥의 세베루스와 같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그들은 단성론자였는가?’라고 질문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에 대한 시리아교회의 
전통적인 태도 속에서 우리는 칼케돈 신조가 참된 기독론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사고의 씨앗이 많은 인도인 신학자들의 마음 가운데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인도의 신학에 칼케돈 신조는 ‘필수요건’(sine qua non)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들을 지지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그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the one-natured Christ)라든지 ‘물에 섞인 포도주’라는 관념은 첸치아가 말한 단순히 하이픈을 넣은 ‘신-인’(God-man)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아디-뿌루쉬(ādi-purusha), 즉 완전히 ‘새로운’ 요인으로서의 그리스도 신학으로 진화하여 발견될 개념의 전조를 내포하고 있다.

인도의 시리아 전통은 특히 예전 분야에서 많은 신학적 해석 및 학문적 탐구를 요청하고 있으며, 우리가 언급했던 학자들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이 고대 교회가 이 도전에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가 있다. 이 전통에 대한 우리의 언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남쪽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그리고 그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유구하면서도 절대로 꺼지지 않는 신앙을 증언하는 수 천 곳의 모든 장소에서 그 존재를 끊임 없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 위 내용은 본 필자가 번역한 도서 「인도 기독교 사상」(Robin Boyd 저, CLC, 2020)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전제를 금하며, 혹시 인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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