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4> 원천③ - 개신교 전통

2020. 10. 25. 20:35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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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 서구의 여러 무역회사들이 인도에 들어옴으로써 인도에서는 다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인들에 이어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 영국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캘커타와 수라트, 마드라스, 봄베이와 같은 중심지에 자신들의 무역 거점을 설치했다. 거기서 그들은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무역활동을 수행했으며,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 사제들을 데려오고 교회를 건축했다. 

1608년에 수라트에 첫 번째 공장을 설립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50년이 지난 후 사목을 임명했으며, 그렇게 파견된 채플린은 단지 그 회사의 직원들을 돌보는 제한적인 책임을 맡았다. 당시 인도인들의 눈에 비친 유럽인들의 삶과 태도는 인도인들에게 그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은 기독교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비도덕적인 생활과 고압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 인도인들의 강한 반대와 적대감을 극복해야만 했다.

동인도회사는 채플린들에게 인도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데 소극적이었으며, 1813년에 회사헌장이 개정된 후에야 캘커타에 성공회의 독립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은 동인도회사의 영역 안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를 얻게 되었다. 채플린들은 우선적인 임무가 성공회에 속한 영국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이들과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온 선교사들과의 사이에 여러 해 동안 긴장이 이어졌다. 포르투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국인들도 국가와 교회 사이의 공식적 관계는 진정한 인도의 기독교 전통을 세워가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인도에서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1706년 7월 9일, 두 명의 루터교 선교사 지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와 플루차우(Heinrich Plutschau)가 트랑케바르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된다. 지겐발크는 학구적인 사람이었으며, 첫 번째 우선순위가 성경 번역에 주어져야 한다는 개신교 선교의 기본 원칙에 대한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어서, 1711년까지 신약성경의 타밀어 번역을 완료했다.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원 베스치 신부는 지겐발크의 타밀어를 조롱했지만, 지겐발크가 자신의 우선순위를 바로 이 첫 번째 과업을 완수하는 데 두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겐발크는 결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치지 않고 힌두교를 연구했으며, 인도의 종교에 대한 동정적인 설명으로 할레선교회 본부를 깜짝 놀라게 했다. 1710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보다 오래 전에 이미 복음의 작은 빛이 이교도들 위에 비치기 시작했음을 기뻐한다 … 인간의 이성을 따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그들의 경전 여기저기서 그런 가르침과 구절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도에서 개신교 선교의 새로운 시대는 1793년 세람포르의 윌리엄 캐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지겐발크와 마찬가지로 곧 스스로 성경번역의 문제와 씨름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캐리와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세람포르에 여러 언어연구소를 갖춘, 가히 ‘성경공장’이라고 부를 만한 시설을 마련했고, 성경 전체 또는 일부를 총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그들은 다양한 언어에 필요한 기독교 신학의 기본 어휘를 확립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그 지역 선교사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세람포르 버전을 더 나은 번역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성경의 어휘를 확립하는 작업은 어떤 언어에서든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처럼 풍부한 신학적인 어휘가 준비된 인도에서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와 일치하는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들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모든 용어는 이미 힌두 종교나 철학과 관련하여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특정 단어를 선택해야 했고, 그 단어는 수년간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해지면서 그들 가운데서 기독교적으로 함축된 특정한 의미들을 갖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는 가장 친숙하게 번역된 용어에 익숙해지고 결국 거기에 충실하게 되며, 이 어휘를 수정하거나 변경하려는 어떠한 노력에 대해서도 강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하나의 용어가 그렇게 받아들여진다고 할지라도 그 용어는 성경을 읽게 될 힌두교도에게 그 의미가 결코 명확하지 않으며 모호할 수 있다. 그는 그 용어가 야만적이고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용어에 대해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길 수 있다. 또 다른 용어들은 그 의미가 그에게 분명히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번역자가 실제 의도했던 의미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1829년 봄베이에 도착한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선교사 존 윌슨(John Wilson) 박사는 1830년에 기독교에서 ‘스와르그’(svarga)라는 단어를 천국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그 의미가 인드라(Indra) 신의 관능적인 천국에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론을 펴는 글을 쓴 바 있다. 그는 스와르그 대신 ‘신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는 중립적인 단어인 ‘데발로끄’(devaloka)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실상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스와르그’라는 단어였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데브’(deva)라는 단어가 힌두교에서 신과 악마들을 나타내는 복수 형태로 주로 쓰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데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현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힌두교도가 처음 신약성경을 읽을 때, ‘스와르그’라는 단어에 대해 상당히 잘못된 인상을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은 여전한 사실이다.

캐리와 그의 계승자들이 했던 작업을 통해 성경은 인도 전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 토착어 번역들은 복음전도의 주된 수단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번역들은 그 ‘외래성’(foreignness)으로 인해 비기독교인들에게 배척당했으며, 그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더욱 효과적인 성경의 용어를 제공하는 것은 인도 신학자들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가 됐으며, 최근 번역 작업의 경향은 힌두교 배경을 가진 용어들에 대해 훨씬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성경 번역 및 일상적인 복음 선포와 더불어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다양한 인도의 언어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힌두교의 주장을 논박하는 소책자와 도서들을 저술하고 인쇄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이는 때때로 매우 논쟁적인 방식으로 전개됐으며, 기독교적 진리의 ‘증거’(evidence)로서 자연신학적인 증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출판물들은 말씀 전파와 성경 배포, 봄베이에서 존 윌슨이 사용했던 것처럼 특정 상황에서 행한 비기독교인들과의 논쟁과 더불어 당시 ‘힌두교에 대한 기독교의 신학적 접근’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한편 캘커타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와 봄베이의 윌슨(Dr. Wilson)은 다른 유형의 선교사업을 개척하였다. 그 사업은 초창기에 기독교적인 결실을 많이 볼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확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프는 1830년에 캘커타에 도착하자마자 영어를 매개로 하는 고등교육을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유명한 영어주의자와 동양주의자의 논쟁이 영어주의 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어지면서 잘 알려진 1838년의 『맥컬리 비망록』(Macaulay Minute)을 기대하게 했다.

더프와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영어 교육이 근대적인 지식의 빛을 비춤으로써 힌두교의 종교구조를 허물어뜨려 효과적인 ‘복음을 위한 예비’(praeparatio evangilica)가 될 것임을 증명해 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또한, 실제로 초창기에 캘커타에서는 여러 상층카스트 젊은이들이 힌두교로부터 개종하는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헨리 마틴(Henry Martyn), 클로디어스 뷰캐넌(Claudius Buchanan)과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과 복음전도의 열정을 가진 동인도회사 사목들의 노력을 상쇄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마치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파 사이의 논쟁으로 스스로 찢기고만 과거의 기독교회처럼 영국에서 인도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합리주의 문학의 범람으로 인한 것이었다. 서구로부터 비롯된 이 두 가지 상반된 영향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감탄을 자아내게 함과 동시에, 합리주의적인 태도에 기초하여 특정한 종류의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는 경향을 가져왔다.

하지만 19세기 초 수십 년간, 특별히 뱅갈지역에서는 힌두교와 기독교 신앙 사이에 확실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해 온 신학적인 탐구와 진술의 개척자를 찾기 위해서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어떤 기독교인이 아니라, 오히려 세람포르 선교사와 접촉했던 한 사람의 유명한 힌두교도인데, 그의 이름이 바로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였다■

 

* 위 내용은 본 필자가 번역한 도서 「인도 기독교 사상」(Robin Boyd 저, CLC, 2020)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전제를 금하며, 혹시 인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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