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6> 인도신학의 틀거리 - 케샵 찬드라 센

2020. 11. 12. 16:34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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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에 람 모한 로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한동안 뛰어난 역량을 지닌 지도자가 없었던 브라흐마 사마즈에는 얼마 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아버지인 데벤드라나트 타고르(Debendranath Tagore, 1817-1905)가 출현했다.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좌)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우) 부자

하지만 기독교와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로이의 뒤를 잇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는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보게 될 케샵 찬드라 센(Keshab Chandra Sen)이다. 센은 영적인 열정과 더불어 뛰어난 웅변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1857년 19세의 나이로 브라흐마 사마즈에 합류했다. 많은 선교사들은 센이 기독교적인 삶에 대단한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세례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고, 기독교의 편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로 여겼으며, 실제로 힌두교도들 중에는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이들도 많았다. 이런 인상은 센이 람 모한 로이가 결코 떠나지 않았던 카스트 체제를 공격한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점점 분명하고도 꾸준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다.

센에 의해 조직된 브라흐마 사마즈(Brāhma Samāj)는 기독교회의 선상에 매우 가깝게 서있었고, 실제로 브라흐모(Brāhmao) 결혼법이 통과된 1872년 이후 사마즈는 힌두 사회의 경계를 벗어나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센의 사상과 실천은 점점 더 그 자신의 영감(아데샤, ādesha)을 따라 발전하게 된다. 특히 중세 벵갈의 성인, 차이따냐(Caitanya)의 따뜻한 감성이 묻어있는 박띠(bhakti)에 의해 형성된 이 영감은 점차로 람 모한 로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합리주의의 원칙이 가진 자리를 대체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자신의 빛나는 천재성에 따라 센은 단계적으로 의례적인 관습들을 사마즈 안에 소개했다. 람 모한 로이는 사마즈의 예배 가운데 의식주의(ritualism)나 희생제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어떤 것도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센은 자신의 말년에 ‘새로운 섭리의 교회’(Church of the New Dispensation) 안에서 금욕주의를 비롯하여 세례와 성만찬을 포함한 예전과 성사들을 발전시켰는데, 그 성만찬에서의 재료는 쌀과 물이었다.

파쿼(J. N. Farquhar)가 직설적으로 표현했듯이 센은 자신을 결코 그리스도와 같은 차원으로 놓지 않았지만, 그 관점이 점점 더 자기중심적이 됐다는 사실은 이러한 발전들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인 ‘새로운 섭리의 사도들’이 모세, 그리스도, 바울을 통해 계승되어 온 사도권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자신의 교회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섭리를 완성하고 넘어선 세 번째 ‘섭리’(dispensation)라고 보았다. 그는 1884년 4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센은 당대의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여러 힌두들은 그를 기독교인으로 여겼던 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가 주로 교회를 계속하여 비판해왔기 때문에 그를 단순히 절충주의자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지닌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 기독교 신학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이며, 그의 저작물은 존경받아 마땅하고 진지하게 다룰 만한 가치가 있다.

많은 이들이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여기고 있는 센은 점점 더 그리스도의 매력에 이끌려 자신의 방식으로 그분께 응답했다. 센은 당대의 제도화된 기독교의 서구적인 과시 요소들로부터는 소외되었지만, 그 외적인 것들 너머에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볼 수 있었고, 그의 삶의 이야기는 그가 점차로 정통 기독교에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순례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중심이자 그의 모든 사고를 이끄는 힘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사고가 서구의 틀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에 대해 확고부동하게 저항했다. 후기 인도 신학자들의 저작물 속에서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많은 개념과 범주들이 결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적이 없던 센에 의해 처음으로 규정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정 센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는 힌두 구도자의 전형으로서, 엄청나게 비싼 진주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파는 것은 꺼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센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실재성,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자신이 사랑하는 인도의 전통으로 표현하려고 한 노력의 진정성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인도 사상가들이 그리스도에 반응하여 자신들의 경험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던 방식을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케샵 찬드라 센의 접근법에 친숙해져야 한다. 이제 사마즈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유명한 연차강연에서 그가 다룬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살펴보자.

로고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센의 종교적 경험의 중심이었지만 그의 영적인 순례는 사실 브라흐마 사마즈에서 시작되었다. 브라흐마 사마즈의 하나님은 절대자 브라흐만과 구별되지 않았으며, 때때로 그는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이원론을 추구하는 아드바이타주의자들이 브라흐만조차도 사트(Sat), 씨트(Cit), 아난드(Ānanda), 즉 존재, 지성, 행복으로 묘사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듯이, 센에게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삼위일체이이다. 

여기서 그는 람 모한 로이의 유일신주의(unitarianism)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는 “나는 삼위일체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느낀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나중에 사트, 씨트, 아난드로서의 삼위일체 개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먼저 우리는 센이 찬도기야 우빠니샤드(Chandogya Upanishad)를 연상시키는 언어로 묘사한 놀라운 창조의 그림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그는 선재하는 로고스(logos)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준다.

여기에 베다와 베단타의 지존자 브라흐마께서 스스로 숨어계셨다. 여기에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전능자 여호와께서 잠들어 계신다 그러나 그 장면은 곧 전환된다. 보라! 음성이 들려온다 그렇다. 우주를 창조한 것은 말씀이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로고스라고 부른다 자신의 비밀의 거처에서 나와 보이는 형상을 취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끝없이 운행하는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분의 강력한 에너지 외에 창조는 무엇이었는가?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11.



창조의 행위와 더불어 거기서 창조적 진화의 진행과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의 동인은 여전히 로고스이며, 그 과정은 인간의 진화를 통하여 그리고 그 너머로 계속된다. 태초에 로고스가 존재하듯이, 그 과정의 끝에도 로고스가 서 계신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은 아들의 신분에 이르도록 초대된다.

로고스는 창조의 시작이었으며, 그 창조의 완전함 역시 로고스였다. 인간됨의 최고 정점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 그러나 진화의 과정은 정말로 끝났는가? … 만일 거기에 아들이 계셨다면, 그 부자관계는 고립된 한 개인 안에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 가운데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우주적인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14.


따라서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 잠들어 있던 로고스는 창조의 말씀이시며, 피조된 세계의 발전 안에서, 그리고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시간적 존재의 완전함 가운데서 일해오신 씨트(Cit; 지성, 지혜)이시다.

이 영원하신 로고스의 인성과 이 씨트-그리스도(Cit-Christ)의 관계는 무엇인가? 센은 1866년에 행한 첫 번째 연례 대중 강연, ‘예수 그리스도: 유럽과 아시아’(Jesus Christ: Europe and Asia)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다루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겸비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예수가 ‘보통 인간들보다 위에’ 있었고 ‘인간을 뛰어넘는 지혜와 능력’을 가졌음을 설파하면서도 신적인 측면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분의 성장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이셨다’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하지만 이 인성은 즉각적으로 ‘신적인’(divine)이란 형용사에 의해 자격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적 인간성’(divine humanity)은 센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가장 잘 묘사한 범주라고 할 수 있다. 다음 90년간 발전하게 될 신학의 일부를 예고하는 주목할 만한 대목에서 센은 인도 기독교 신학자들이 준거(locus classicus)로 삼는 구절이자 예수께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주춧돌로 여긴 본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아 케노시스 이론의 형태로 그리스도가 소유한 신성의 본질을 설명한다.
 

이 교리를 분석해 보면, 나는 그 안에서 자기부정이라는 대중적 교리의 기초가 되는 철학적 원리만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부정했다 … 그리고 자아가 사라지자 천국이 영혼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본성은 공허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영혼이 자기를 비우자마자 신성이 공허를 채우게 된다. 따라서 신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주님의 영이 그를 채웠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해졌다Lecture on India asks: Who is Christ? (1870), p.369.



예수는 자신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자신의 케노시스(kenosis)에 의해, 본회퍼의 표현으로 하자면 오직 ‘타자를 위한 사람’으로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된다. 센은 계속하여 최근에 다시 한 번 인기를 끌고 있는 투명성(transparency)이란 다른 개념을 사용한다.
 

예수는 예전에 그 어떤 인간도 해본 적이 없었던 인간 안에서의 신적인 삶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 앞에는 신성한 생명의 물이 담겨있는 투명한 크리스탈 저수지인 그리스도가 있다. 우리의 시야를 모호하게 할 불투명한 자아는 없다. 그 매개는 투명하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 내주하시는 진리와 거룩함의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Lecture on India asks: Who is Christ? (1870), p.373.


분명히 센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와의 연합은 물질적 또는 형이상학적 연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깊은 교통이며, 존재론적 연합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적인 연합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실제로 그는 이 관계를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비교함으로써 이후의 많은 신학자가 따라가야 할 오솔길을 밝혀주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가지셨던 그 영적인 하나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장하기 원하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상). 그는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신학을 ‘내가 내 아버지 안에’와 ‘너희가 내 안에’라는 두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구절들이 베단타의 ‘위대한 명제들’(Mahāvākyas)인 ‘따트 뜨왐 아시’(Tat Tvam Asi,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와 ‘아함 브라흐마 아스미’(Aham Brahma Āsmi, 내가 브라흐만이다)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장 가까운 구절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힌두교 친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관계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씨름하는 인도 신학의 개척자를 볼 수 있다.

센의 가까운 친구이자 제자인 모줌다르(P. C. Mozoomdar)는 『동양의 그리스도』(The Oriental Christ)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책은 센의 가장 전형적인 이해 중 하나인 그리스도가 서양이 아닌 아시아의 것이라는 사실을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남인도에서의 고대 시리아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양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당시 센의 생각 대부분은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센은 끊임없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가 그 기원에 있어서 동양적이며, 여러 측면에서 유럽인보다 아시아인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더 용이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리스도는 아시아인이 아니었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는 서양에서는 기독교를 일련의 ‘생명 없는 도그마와 낡아빠진 상징들’로 축소해 버렸지만, 동양에서는 그분의 아시아인 됨(Asianness)을 통해 그 자체로 인성이 보장된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만남이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고 본다. 그는 명료한 문구로 “예수와 마리아는 얼마나 서로 닮았는가?”라고 질문하면서, 그 어머니처럼 예수 역시 동양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센의 저술들은 해가 갈수록 보다 완전한 기독교 정통신앙의 방향으로 주목할 만한 사상의 발전을 보여준다. 초창기에 센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포기와 자기부정을 통해 신성이 공허를 채우는 지점까지 스스로 자아를 비우셨다는 케노시스 이론에 대한 특별한 해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본보기와 영향력이 지닌 힘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후의 강연에서 그는 상당히 자주 속죄와 희생, 십자가와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제 그의 강조점 중 한두 개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센은 자신의 초기 발언들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의 도덕적인 영향력에 대한 본보기로 간주했다. 기이하게도 바르트적인 예언의 한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계획에 따라 ‘잠잠하신 하나님’(the Still God)이신 자기 아버지를 떠나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여행하시는 하나님’(the Journeying God)이라고 말한다. 그분은 먼 나라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 가운데 오셔서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써,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투명해져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아를 파괴하신다.

그분은 근본적인 기독교의 두 가지 교리인 용서와 자기희생의 살아있는 예시를 보이시고, 이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도덕적 영향력을 통해 ‘초자연적인 도덕적 영웅’의 한 행위 가운데 인류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신다. 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자기희생의 아름다운 상징으로 여긴다 …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방대한 도덕적 영향력은 여전히 인류사회 안에 살아있다. Lecture on India asks: Who is Christ? (1870), p.7.

 
그가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훌륭한 본보기를 따라서 조국과 세계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거듭남과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센의 사상에 있어서 ‘신적 인간성’(divine humanity)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모범을 통해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사역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케노시스를 통해 하나님께 대하여 투명해지셨고, 우리의 인간성은 그분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고양되어 그분의 패턴으로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신적인 본성에 진정으로 연결됨으로써 완성됨을 본다 …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인간성을 점점 더 거룩하게 만들어 이를 고양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20.

 
센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구원, 즉 고양되고 변화된 인간성이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 나아가 전체 피조세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 ‘여행하시는 하나님’인 그리스도는 자신을 통하여, 그리고 자기의 순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아들 됨(sonship)을 깨닫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신학적 발전에 있어 이 단계에서 센은 주로 개인적인 구원보다는 보편적 혹은 우주적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간이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는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에 의해 힌두교적인 배경에서, 그리고 인도의 첸치아(P. Chenchia)와 유럽의 떼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에 의해 기독교적인 의미로 더 다듬어져야 했지만, 그 자체로도 그 논쟁의 맛보기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창조의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을 통하여 떼야르가 만든 용어인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는 심지어 죄인들에게까지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창조의 문제는 어떻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만들 것이냐의 문제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는 그 ‘길’이었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15.


센이 여기서 말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첸치아나 단지바이 파키르바이(Dhanjibhai Fakirbhai)가 암시한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가 ‘새로운 인간’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재생산’(reproduction, 첸치아) 또는 ‘증식’(multiplication, 단지바이)이라고 묘사하는 신비적인 연합의 과정에 의해 ‘새로운 인간들’이 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베단타 학파의 마하바끼야, 즉 핵심명제(Mahāvākyas)인 ‘나는 브라흐만이다’(aham Brahma āsmi)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인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센은 그 과정을 진화와 성장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완전히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1883년에 마지막으로 행한 위대한 강연에서 센은 이 ‘도덕적 영향력’과 ‘증식’의 두 가지 개념들을 넘어서서 속죄와 중보라는 정통적인 교리에 더 가까운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힌두교도들이 대부분인 청중들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속죄나 교환(substitution) 심지어 보혈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세상을 위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러자 단번에 그 때까지 둘이었던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교환은 위대한 사실입니다. 이 도덕적인 장엄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구속의 피 안에서 모든 세대 모든 지역의 가장 오염된 이들이 거할 곳을 찾습니다 …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피를 통하여 나는 모두와 화해했습니다. 동포들이여, 여러분도 그분을 통하여 화해하십시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p.91-94.


센의 마지막 대중 강연이었던 이 말에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강연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동포들을 향해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가져다주시는 속죄를 믿음으로 받을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도덕적 영향 이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인 깊은 사랑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속죄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는 도상에 선 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브라흐마반답 우빠디야이(Brahmabandhab Upadhyaya)가 왜 센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가 가시적인 교회에 합류했을 것이라고 믿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


람 모한 로이처럼 센도 서구 유니테리언들과 많은 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점차로 삼위일체 교리를 완전하게 수용하는 방향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지점은 1882년에 행한 ‘경이로운 신비 - 삼위일체’(The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힘 있게 표현된다.

센은 사치드아난드(Saccidānanda; Sat, Cit, Ananda)로서의 브라흐만에 대한 유명한 정의와 연결하여 삼위일체의 의미를 설명해 낸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이를 통해 브라흐마반답과 몽샤냉(Monchanin) 같은 후기 사상가들이 뒤따르게 될 전통의 시초를 놓았다. 그는 정삼각형의 형태로 그 개념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그 꼭대기는 바로 베다의 지존자, 브라흐마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으로부터 그 신성의 발현이신 성자께서 직선으로 내려오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인류의 밑변에 있는 한쪽 끝을 만지시고, 그 밑변을 두루 운행하여 세상 속에 스며든 다음,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한 인류를 그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신다. 인류에게로 내려오신 하나님이 곧 성자이시다. 그리고 인류를 하늘로 끌어 올리시는 하나님이 곧 성령님이시다. 이것이 온전한 구원의 철학이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36.

 


삼위일체의 각 다른 위격의 사역을 설명하고 나서 그는 그 위격들의 동등함과 유사함을 기독교의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하여 사치드아난드로 끝나는 하나의 표로 보여준다.

성부 성자 성령
창조하신 분 본보기가 되신 분 거룩하게 하시는 분
잠잠하신 하나님 여행하시는 하나님 돌이키시는 하나님
나는 존재한다 'I am' 나는 사랑한다 'I love' 나는 구원한다 'I save'
능력(Force) 지혜(Wisdom) 거룩(Holiness)
진실한(True) 선하신(Good) 아름다운(Beautiful)
사트(진리) 씨트(지성) 아난드(즐거움, 지복)

 
사치드아난드(Saccidānanda)와 삼위일체 사이의 일치에 대한 이런 그의 설명은 흥미롭다.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는 힌두교의 사치드아난드와 놀랄 만큼 일치한다.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신분(conditions)과 세 가지 신성의 현현(manifestations)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의 본질(Substance)과 세 가지 현상(phenomena)이 있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시다. 혼자서든, 혹은 아들 안에 나타나시든, 성령으로 인류에게 생기를 불러일으키시든, 이는 바로 같은 하나님, 똑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며, 그 연합은 다중의 발현 속에서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로 계속된다 … 이른바 삼위일체 안에 본질적이고 나누어지지 않는 연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나는 홀로 깊은 영적 친교 속에서 경이로운 기독교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묵상해야 했다. 나는 눈을 감고 경이로움에 빠져 엄숙한 침묵에 몰입한 가운데 나의 손가락으로 가리킬 것이다. 위로, 아래로, 그리고 안으로. 위로는 성부 하나님을, 아래로는 성자 예수님을, 안으로는 성령 하나님을.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16.


우리는 여기서 ‘신분’과 ‘현현’이라는 말에서 양태론적인 경향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 분의 위격과 한 분 하나님이라는 칼케돈적인 개념을 받아들이기 꺼려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센은 브라흐마 사마즈가 다신교에 대해 가졌던 반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조가 삼신론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누군가가 통상적인 영어에서의 의미로 ‘인격’(Pers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갖는 암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 사상가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입장이다. 한편으로는 비야끄띠(vyakti)나 뿌르샤(pursha) 등으로 제시된 다양한 산스크리트어 번역들을 사용하려 할 때 가질 수 있는 암시일 수도 있다. 센은 아마도 여기서 사트, 씨트, 아난드의 관점에서 완전히 새롭고, 완전히 인도적인 신비의 표현으로 가는 자신의 길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의 극장, 심지어 근대 서구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개념들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고 훗날 다른 이들이 뒤따르는 그 길이 인도에서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될지도 모른다.

교회에 대하여


센의 ‘새로운 섭리의 교회’(Church of the New Dispensation)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위대한 개인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센은 결코 자신이 인도에서 보았던 기독교회나 1870년에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보았던 교회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인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국적을 잃고 힌두교로부터뿐만 아니라 인도의 문화로부터 고립된 존재들로 보였다.

센은 그런 교회에 도저히 가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더군다나 이미 그는 브라흐마 사마즈의 회원이자 사실상 아차리아(ācārya, 힌두교사)였다. 그런데도 그는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리스도를 향해 헌신했으며, 이를 통해 사마즈 지부에 기독교회의 신앙생활로부터 취해 온 많은 특징을 결합시켰다. 그리고 종국에 이 특징들은 그가 ‘새로운 섭리의 교회’라고 이름 붙인 공동체의 신앙생활과 관습의 통상적인 한 부분이 됐다.

센은 자신의 교회를 종교의 궁극적인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 박사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많은 이들은 ‘세계 종교’(world religion)의 설립을 소중한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센은 주로 기독교회를 모형으로 삼고 명확히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시바의 삼지창, 무슬림의 별과 초승달을 포함한 상징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 자체로 모든 위대한 종교들 가운데서 최고의 종교라고 주장할 만한 그런 종교를 설립하고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시도했다.

그는 그 ‘새로운 섭리’(the New Dispensation)를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섭리’는 성령이 창조 이래로 계속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영적 진화과정의 최종적인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논리적 순서의 사슬이 지닌 아름다움을 보라. 이제 모든 예언자와 개혁자들, 모든 성경과 섭리들이 방대한 종합의 연합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이러한 흩어진 섭리들을 초점 안으로 가져오면, 당신은 곧 학문에서 그 섭리들의 조화를, 진리와 하나님 안에서 그 섭리들의 하나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The Brahmo Samaj, Calcutta, 1886, pp. 363-5.



센의 입장이 절충주의라는 사실은 명확하지만, 그는 그것이 이른바 ‘기독교적인 절충주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기독교적 절충주의 안에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스스로 검증되어야 할 모든 교리나 실천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된다.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모든 것을 부인한다. 나의 교회는 기독교적이고 순수하고 거룩한 것은 무엇이든지 기쁘게 찬양한다 … 나는 어떤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아니, 나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이 폭넓은 교회의 중심으로 선언할 것이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85-86.



이러한 정서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센이 ‘인도 기독교 신학’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대부분 힌두교도로 이루어진 대규모 군중들의 모임에서 말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센의 교회는 단순히 실용적인 혼합주의의 한 조각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실 그것은 그의 힌두교와 브라흐모 친구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기 위해 정통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점점 더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힌두교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교회의 본질을 해석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의 노력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센은 인도 신학의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한다. 그의 뒤를 따랐던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지만, 기독교회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결국 기독교회의 실제 공동생활로부터 매우 동떨어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목록에는 브라흐마반답 우빠디야이, 사두 순다르 싱, V. 차까라이, P. 첸치아, 마닐랄 C. 빠레크 등과 같은 저명한 이름들이 들어있다.

센이 보여준 열정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은 단순히 자신이 만난 제도화된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브라흐마 사마즈를 기독교회로 바꾸려고 노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가 그 일에 실패한 것과 오늘날 비교적 소수의 새로운 섭리의 교회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신학적 관심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위대한 힌두교 신자의 반응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임과 동시에 힌두교 신자들이 당시 인도에 존재하던 유형의 기독교회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요인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숨어계시는 그리스도


센은 힌두교의 여러 측면, 특히 다신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던 반면, 자신이 성장해 왔고 기독교와 힌두교를 의미 있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연관시키려 했던 신앙, 즉 베단타 학파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대교의 고상한 윤리적 일신론이나 이슬람의 행위주의 전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신앙 가운데서 최선의 것을 성취했으며,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힌두교의 경륜을 성취하셨다고 확신했다. 파쿼(J. N. Farquhar)가 성취의 개념을 발표하기 수년 전에 이미 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보라! 그리스도께서 인종에 있어서는 아시아인으로, 신앙에서는 힌두로, 그리고 친족과 형제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고 그분은 여러분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 그분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 인도가 갈급해온 영적교통의 종교를 성취하고 완성하신다 … 그리스도는 진정한 요기(Yogi)이시며, 그분은 분명히 우리가 요기의 국민적 여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Lecture on India asks: Who is Christ? (1870), p.388-89.


이처럼 센은 자신의 힌두 친구들에게 이미 그들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 즉 힌두교 신앙 안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릴 것을 요청하면서, 최근 레이몬드 빠니까르(Raymond Panikkar)와 다른 사람들이 탁월하고 설득력 있게 재진술해 온 명제들에 명확한 표현을 제공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이미 당신 안에 계신다. 심지어 당신이 그분의 임재를 깨닫지 못할 때도 그분은 당신 안에 계신다 … 그리스도는 세상 속으로 들어와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시다 … 그분은 자신을 복종시키는 분으로, 금욕주의로, 요가로, 사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순종하시는 겸허한 아들로 당신에게 오실 것이다. Lecture on India asks: Who is Christ? (1870), p.391-92.



이 생각에 따라 그는 순교자 저스틴이 그러했듯이 모든 철학과 종교에서, 그리고 모든 선한 것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존하시고, 단지 보이고, 깨달아지고,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신성한 갠지스 강변에 서있는 모든 진실한 브라민들 가운데, 모든 베다의 충성스런 신봉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 거룩하신 말씀, 영원한 베다가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신다 … 당신 자신의 의식, 그 깊은 곳으로들어가라.그러면그대는이내주하고계시는로고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인정하는 일은 이미 인도에서 이루어져 왔다 … 단지 명목상으로 인정하는 일만 남아있을 뿐이다.   Lecture on that Marvellous Mystery - The Trinity (1882). p.33.



하나의 세계 종교에 대한 센의 아이디어는 라다크리슈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혼합주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그는 모든 전통의 풍요로움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며, 분명히 모든 사람의 하나됨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의 진화와 연합의 비전, 그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발전을 위한 열쇠를 제공한다. 센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분파주의적 도그마를 갖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를 하나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은 모든 인류의 연합은 케샵 찬드라 센의 모든 저작물들이 담고 있는 목표였으며, 그의 새로운 섭리의 교회가 지닌 목표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오직 그분 안에서만 모든 인간이 통일될 수 있고, 만약 미래에 세계 종교가 출현하게 된다면 그 종교는 그리스도를 확고히 중심에 두는 종교가 될 것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진정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람 모한 로이와 케샵 찬드라 센은 기독교의 도전과 마주하고 그에 직면한 두 명의 초기 힌두 개혁가였다. 그런 도전의 특정 부분, 특히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을 그들은 열정적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특히 람 모한 로이는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세부적으로 진지하고 학문적인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한 해석은 비록 흥미롭고 창의적이며 나중에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간에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 사용할 만한 힌트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알려지고 교회가 전수해온 기독교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현대의 인도 신학자인 물리일(F. Muliyil)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운동들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비신앙 안에서 시작되었다. 인도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다.  F. Muliyil, “An Examination in the Light of NT Doctrines of the Treatment of Christian 
Theology in Modern Reformed Hinduism, as illustrated by the Brahma Samaj.” Unpublished Oxford D. Phil. Dissertation, 1952.


그리스도에 대한 센의 깊은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런 사상가들에 대한 총체적인 반감에서 비롯된 위와 같은 평가에 반대할 수 있다. 동시에 센과 같은 역량을 지닌 사람이 다른 이들이 기독교 신학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남겨둔 유산들을 폐기해 버리는 것이 과연 인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의 일부였는지도 궁금해 할 수 있다.

 

* 위 내용은 본 필자가 번역한 도서 「인도 기독교 사상」(Robin Boyd 저, CLC, 2020)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전제를 금하며, 혹시 인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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