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7> 힌두교에 대한 합리적 반박 – 느헤미야 고레

2020. 11. 19. 08:23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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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샵 찬드라 센이 ‘새로운 섭리의 교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다듬고 있는 동안, 정통 힌두교의 육파철학체계에 대한 반박문을 발표하고 브라흐마 사마즈와의 긴 논쟁을 시작한 기독교 정통주의의 챔피언이자 매우 특별한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닐라칸트 샤스트리 고레(Nilakantha Shastri Goreh, 1825-95)였다. 

그는 ‘느헤미야’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취했는데, 말년에 영국성공회에서 안수를 받은 다음부터는 고레 신부(Father Goreh)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개종 이전에 이미 산스크리트 학자로 뛰어난 명성을 얻었고, 전통적인 힌두교 대변자였다. 빤디따 라마바이를 제외하면 그가 아마도 인도의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정통 힌두학문을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생애와 더불어 당시에 큰 관심을 끌었던 다양한 저작물은 진리를 추구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한 영혼의 투쟁을 보여준다. 이 글들은 당대의 정통 힌두교와 개혁된 힌두교 모두를 논박함과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인도인들의 마음과 심성의 필요와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자신이 자라온 힌두교에 대한 고레의 반응이 부정적으로 묘사될 수도 있지만, 그는 단지 자기 삶의 방식뿐 아니라 신학적 사고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의식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인도적인 태도를 멈추지 않았다.

닐라칸트 샤스트리는 마하라슈트라 출신 치뜨빠완(Chitpavan)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바라나시에서 자랐으며, 거기서 엄격한 시바파 정통주의 방식으로 철저하게 훈련받았다. 일찍이 그는 보다 고대의 권위가 지지했던 합리적인 결론을 얻은 후 자신의 충성을 비슈누파 전통으로 전환함으로써 신학적인 독립성을 보여주었다.

고레는 길거리에서 설교하고 있던 영국성공회선교회(CMS) 선교사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 기독교를 접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공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성의 힘으로 기독교를 무너뜨리겠다는 욕구’로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스미스와 교제하면서 그는 성경연구에 깊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회심은 쉽지 않았다. 오랜 기간 고민하며 의심했으며, 또한 구타와 약물투약, 아내납치 등 엄청난 반대를 넘어서야 했다. 1848년에 세례를 받았으나, 한 해가 지나지 않아 두 번째로 홀아비(첫째 부인은 그와 그녀가 둘 다 아이였을 때 죽었음)가 되었다. 외동딸 엘렌 락쉬미 고레(Ellen Lakshmi Goreh)는 선교사 가문에 입양되어 빅토리아 시대의 중요한 찬송가 작가로 성장했다.

고레는 1853년에 어린 마하라자 둘립 싱(Dhulip Singh)의 교사로 영국을 방문, 거기 머무는 동안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저명한 인물들을 만났다. 고레는 막스 뮐러(Max Müller)와 흥미로운 만남을 갖기도 했는데, 뮐러는 힌두교의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친 공감을 갖고 있었다. 고레는 그에게 신실하지 않은(?) 힌두교 가이드가 되기로 결심했다. 반면 뮐러는 힌두교 브라만이 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고레는 이슬링턴(Islington)에 있는 CMS연구소에서 열린 몇 차례의 신학강연에 참석했으며, 팔리(Paley)의 ‘증거들’(Evidences)과 버틀러(Butler)의 ‘유비’(Analogy)에 대한 특별연구에 참여했다. 이 책들은 고레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를 통해 고레는 기독교가 계시종교임에도 불구하고 타종교들에 적용하는 것과 동일한 비판적, 이성적 평가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거듭 확인했다. 1855년에 인도로 돌아온 후, 겸허하지만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간증으로 그는 힌두, 이슬람, 파르시 등에 속한 많은 고학력 청년들의 개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들 중 일부는 후에 기독교회에서 잘 알려진 지도자들이 됐다.

그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의문,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의문, 세례의 방식에 대한 의문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고레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의심 때문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균형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레의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의심들은 학문적인 차원의 것이었을 뿐 신앙적인 차원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신앙의 문제로 굳게 붙들고 있는 바를 섬세한 지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추론함으로써 증명해 내고자 노력했다. 합리적인 논쟁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요점들을 증명하려고 했던 중세시대 학자들의 노력도 그러했다. 이는 진실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 intellectum)이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고레의 신앙과 헌신은 흔들리지 않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의심하고, 믿는 일에 있어서 결코 진정한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지적인 확실성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다른 많은 이들의 의심들을 제거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망한다.

1857년, CMS의 복음주의전통 안에 있던 고레는 캘커타 비숍대학(Bishop’s College)의 교장 윌리엄 케이(William Kay) 박사를 만났는데, 그는 고레에게 교부들의 글과 성공회 고교회파(High Church) 옥스퍼드 운동에 속하는 이들의 글을 소개했다. 윌리엄 케이의 거룩하고 금욕주의적인 삶은 고레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점점 더 성공회-가톨릭을 지향하며 나아갔으며, 1867년에는 CMS와 협력하여 사역했다. 그때까지 그는 평신도로 남아있었지만, 1869년에 부사제로 안수를 받았고, 1870년에는 사제로 임직했다.

같은 해에 그는 ‘복음사가 성요한회’(Society of St. John the Evangelist)의 설립자인 벤슨 신부(Fr. R. M. Benson)와 서신 왕래를 시작했는데, 1874년에 성요한회가 인도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요청의 결과였다. 고레는 인도에서 복음전도 사업을 진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금욕적인 종교적 형제애를 통해서라고 확신했고, 결국 서양식 예배와 훈육 방법이 전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적합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성요한회 카울리 신부들(Cowley Fathers)의 공동생활과 영적 훈련에 큰 매력을 느꼈다.

1876년, 고레는 카울리에서 수사(修士)로 섬기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수사에 대한 소명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도회 공식 회원이 되진 않았으나, 그의 선임자는 지혜롭게 자기 생각에 따라 일할 수 있도록 폭넓은 자유를 주었고, 그 후 규칙을 지키는 것에 대한 거리낌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95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 수도회 초심자로 남아있었다.

대화의 파트너들


고레는 1860년에, 바라나시의 한 빤디뜨(Pandit)를 통해 자신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샤다르샨 다르빤』(Shaddarshana Darpana), 즉 『힌두 철학 탐구』(Hindu Philosophy Examined)를 출판했다. 『힌두 철학 체계들에 대한 이성적인 반증』(A rational Refutation of the Hindu Philosophical Systems)이란 제목의 영문 번역본이 1862년에 출판됐으며, 1911년에 출판된 제3판은 오랜 세월 동안 힌두교에 대한 표준적인 연구서로 간주되어 왔다.

그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주요 힌두 체계들에 대한 상세하고 논리적인 검증이다. 그 안에서 고레는 가차 없는 추론으로 각 요점을 ‘반증’(reductio ad absurdum)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대화에 참여할 첫 번째 여러 파트너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레는 여러 해 동안 그들과의 토론에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파트너들은 힌두교의 전통적인 체계를 따르는 이들로서 스스로 정통계급 출신으로 자부하는 이들이었다.

고레는 육파 철학체계 중 니야야와 바이셰시카 체계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삼키야나 미맘사와는 달리 하나의 신을 상정하고 있으며, 베단타와 달리 신과 영혼을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체계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고, 구원의 의미를 죄로부터가 아닌 무지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는 그런 사고에 대해 진지하게 반박한다. 이어서 고레는 영혼이 영속적이라는 생각, 최초 물질인 쁘라끄리티(prakriti, 상키야)나 원자(atoms, 니아야), 또는 마야(maya, 베단타)로부터 세상이 기원했다고 보는 생각, 선과 악을 불문하고 모든 일을 자제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고 구원을 브라흐만에 흡수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 등에 대해서 반증한다.

특별히 중요한 베단타를 다룸에 있어 고레는 아드바이타 사상가들이 제시한 존재의 세 가지 다른 형태들, 즉 참된 것, 실제적인 것, 명징한 것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분석을 한다. 이 부분은 사실 브라흐만만이 진정으로 존재하며, 영혼이 브라흐만이고, 다른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사실을 확립하려고 하는 전통적인 힌두교 인식론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비평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 책이 주로 힌두교에 대한 비평에 중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고레에게 기독교의 관점을 말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고 있으며, 그가 특정한 힌두교 교리를 비판하는 각 지점에서 긍정적이고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기독교적 진술을 발전시키고 있음을 지켜볼 수 있다. 그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그의 변증적인 과업과 연관되어 발전한다.

1867년에 고레는 그 시대의 유명한 젊은 지성 케샵 찬드라 센과 첫 만남을 가졌고, 이 만남은 고레의 생애 끝까지 계속된 브라흐마 사마즈 추종자들과의 대화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선교사인 힐(J. R. Hill)과 접촉했는데, 힐은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에 놀랐다. “케샵은 잘생기고, 몸가짐이 자신만만하고 반듯하며 화려한 언변이 늘 준비되어 있는 반면, 느헤미야는 소심하고 신중하며 말수가 적었다.” (C. E. Gardner, Life of Father Goreh, 1900, p.135)

고레는 센이 팔리의 『증거들』(Evidences)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센은 실제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확립하기 위한 많은 연구와 비판적 사고에 있어서 고레가 주었던 것과 같은 어떤 것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고레는 그 즉시 브라흐마 사마즈에 대한 특별한 연구를 해야겠다고 느꼈고, 그의 후기 저작 상당 부분은 브라흐마 및 쁘라트나 사마즈(Prārthnā Samāj) 회원들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은 ‘유신론자들’에 대한 변증적인 논증으로 이루어진다.

브라흐모들이 받아들인,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정통 힌두교를 거부하도록 이끌었던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사고는 성경으로부터만 증명될 수 있고, 그 외에 다른 출처는 없다는 것이 고레의 기본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브라흐모들의 합리적인 의무이며, 이는 단지 그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사회적 배척의 위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처음에 고레는 브라흐모들이 그의 논증에 굴복할 것이란 큰 희망을 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들과 자주 대화하고 토론회를 개최했으며, 그들을 위한 전도지와 소책자를 집필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고레는 어떻게 이성적인 그들이 보편적(catholic) 신앙의 완전함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전통적인 힌두 정통주의를 거부하면서 ‘유신론적’ 원리들을 수용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화의 결과물인 변증적인 저작물들은 무척 흥미로웠고, 고레의 훌륭한 저술들은 그와 유사한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부당하게 비교되지 않았다. 고레의 사역이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인도 기독교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빤디따 라마바이(Panditā Ramābāi)의 개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고레처럼 라마바이도 치트빠완(Chitpavan) 브라만이었으며, 아버지 아난뜨 샤스트리(Anant Shāstri)의 지도를 통해 어린 시절에 이미 저명한 산스크리트 학자가 됐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녀는 여성 빤디뜨로서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됐다. 행복했지만 비극적으로 짧았던 결혼생활 후에 그녀는 여성 인권의 개척자로서 보다 유명해졌다.

라마바이는 캘커타에서 케샵 찬드라 센을 비롯한 다른 지도급 개혁자들과 우정을 쌓았으며, 뿌네로 돌아가서는 쁘라뜨나 사마즈의 회원이 됐다. 여기서 그녀는 완타지수도회(Wantage Sisters)와 접촉하고, 1883년에 영국에 갔을 때 수도회를 방문했다. 영국에서 라마바이는 기독교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열정적인 그녀는 여전히 마음에 많은 지적인 의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의혹들을 해소해 준 것이 바로 고레로부터 온 장문의 편지였다. 고레의 편지를 받은 그녀는 사마즈의 입장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확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세례를 받았다.

내가 교리문답 수강생이 됐다는 것을 알면 넌 기뻐할 거야. 고레 신부님이 인도에서 내게 복음을 전해주셨어. 그분의 겸손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꿰뚫었지. 오! 그분이 내게 전해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내 생각에 고레 신부님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브라흐만 종교로부터 내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갖지 못했을 거야. (Ramabai, A Testimony, 1917, p.10)


그 후 1886년부터 1889년까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라마바이는 여러 유니테리언들과 사귀었고, 한동안 그쪽 방향으로 달려갔다. 고레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1887년에 출판된 소책자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진술된 우리 주님의 신성에 관한 증거들』(Proofs of the Divinity of Our Lord, Stated in a Letter to a Friend)은 실제로 라마바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힌두 정통주의 전통고수론자들, 브라흐마 사마즈의 유신론자들과의 대화에 덧붙여 고레는 인격적인 신을 향한 헌신, 즉 ‘박띠’(bhakti) 전통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했다. 마라티 가문 출신답게 그가 훗날 기독교 시인 띨락(Tilak)에게 영향을 준 마하라슈트라의 위대한 박띠 시인 투까람(Tukaram)을 특별히 연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에 고레는 시바전통으로부터 신의 육화(아브따르, 아바타)를 가르치는 비슈누파 신앙으로 돌아섰고, 이 육화교리를 기독교 신앙을 위한 예비(a praepatatio)로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띠 전통에서 그다지 큰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아빠사미(Appasamy)가 이를 기독교 ‘박띠 마르그’를 위한 도구로 채용했던 것과 같은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끄리슈나의 성품이 도덕과 성육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아브따르 개념의 긍정적 가치를 소멸시켰다고 생각했고, 후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보편화된 풍유적인 해석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로 마하라슈트라의 투까람이나 케샵 찬드라 센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친 벵갈의 차이따냐(Caitanya) 같은 박띠 성인들에 대한 고레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그들이 사실 개혁된 힌두교도가 아니라고 느꼈고 힌두교 안으로 어떤 본질적인 새로운 요소들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브라흐모들, 특히 새로운 섭리교회에 속한 브라흐모들이 그들을 예언자로, ‘위대한 인물들’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고레는 그들 가운데 끄리슈나 숭배의 오랜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은 전통적인 대중 힌두교도에 비교하여 더 각성된 인물들이 아니었다. 고레는 그들을 개혁자라기보다 단지 부흥 운동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박띠를 부활시켰는데 그것은 열렬한 헌신이지만, 그들이 알지 못했던 참된 신이 아니라, 모든 힌두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게 신이라고 믿었던 끄리슈나, 라마 등에 대한 헌신이다.  (Christianity not of Man but of God, 1888, p.32)


이제 고레가 『합리적인 논증』(Rational Refutation)과 다른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서구의 ‘보편적인’(catholic) 정통주의를 완전히 수용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는 특히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좋아했으며, 자기 힌두 친구들과 토론할 때 이를 기초로 삼았다. 고레의 접근법이 갖는 특별한 관심은 그가 ‘논박하고 있는’(refuting) 힌두교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지식에서 비롯되며, 그리고 힌두교도이거나 유신론자인 자신의 친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관점에서 자기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깊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하나님, 창조 그리고 존재의 본질


모든 힌두 철학체계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부인한다. 상까라의 아드바이타 철학은 창조가 단지 비아바하리끄(vyavahārika), 또는 경험적인 수준에서 일어났음을 수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실재성 자체를 부정한다. 따라서 고레는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인도에서 상당히 새로운 관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 교리의 중요성에 큰 강조점을 둔다.

이는 실제로 인도에서 기독교 신학이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통상적으로 ‘창조’를 번역한 단어 ‘스리쉬띠’(srishti)는 사실상 단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본질이나 물질적인 요소에 형체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니아야 철학 체계에 따르면 이 존재하는 물질적인 요소는 궁극의 원자(supreme atom)인 ‘뻐럼아누’(paramanu)이며, 상키야 철학 체계에서 이는 고레가 선호하는 용어인 ‘쁘라끄리티’(prakriti), 즉 태고의 본체, 본성, ‘본래적인 것’(originant) 또는 ‘시작되는 것’(evolvant)이다. 반면 모든 철학 체계 중 가장 유명한 상까라의 아드바이타에서 창조는 마야(māyā), 즉 환각의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힌두 철학 체계들은 제반 결과를 불러오는 궁극적인 물질적 요소는 시작이 없다는 것과 ‘세상의 물줄기는 영원으로부터 흘러오고 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세상 그 자체는 사실상 영원하다. 고레는 이에 반대하여 하나님께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계시된 성경의 교리를 확고히 지지한다. 『합리적인 논증』의 흥미로운 항목에서 고레는 실재의 다른 유형들을 다루는 베단타(advaita) 이론을 조사하는데, 이는 창조교리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이는 아마도 아직 인도 기독교 신학자들이 다루지 않은 베단타 인식론에 대한 가장 세밀하고 학문적인 연구이자 깊이 살펴볼 가치가 있는 연구일 것이다.

40년 후, 기독교 신학과 아드바이타 사이의 연결을 돕기 위해 마야의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여 사용하려 했던 브라흐마반답과 달리 고레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안에서 그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지식과 창조에 관한 베단타 이론을 확고하게 거부한다. 그 논증은 창조된 세계가 거짓이요, 브라흐만이 전부라는 믿음의 불합리성을 입증하는 데 집중한다.

아드바이타 베단타가 말하는 세 가지 종류의 실재는 ① 브라흐만 홀로 자리할 수 있는 뻐럼아르티끄(Pāramārthika) 또는 절대적인(참된) 실재, ② 세상, 인간의 영혼, 그리고 인격적인 신 이슈와르(Ishvara)를 포함하는 비아바하리끄(vyavahārika) 또는 경험적인 실재, ③ 쁘러띠바쉬끄(pratibhāshika) 또는 눈에 보이는 허상의 실재이다.

이런 실재의 유형을 보여주는 고전적 사례는 뱀과 밧줄의 예화이다. 어떤 사람이 뱀을 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단지 뱀이 아닌 밧줄이었다. 그러면 잠시 동안 그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그 뱀은 단지 가시적인(apparent) 실재에 불과하다. 매일 경험하는 일상적인 대상으로서의 밧줄은 경험적인(practical) 실재이다. 그러나 참 자아(advaitin)는 그 경험적 실재 역시도 허상이며, 궁극적으로 밧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브라흐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참 자아에게 하나의 감각이 있는데, 이 감각 안에 이런 각각의 단계마다 실재하는 존재가 있다. 이 전체 3층으로 이루어진 인식론은 세 가지를 증명하기 위해 세워진다. 첫째, 세상은 환각이다. 둘째, 브라흐만만이 홀로 존재한다. 셋째, 그 영혼이 브라흐만이다.

따라서 세상과 영혼, 심지어 인격적인 신인 이슈와르도 오로지 제한적 종류의 실제로 받아들여진다. 이 제한적인 실재는 거짓으로 간주하며, 이는 곧 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실재로서 실수 또는 무지(māyā, avidy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이는 일원론자들에게 중요한 믿음으로서 고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세상의 실재를 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브라흐마는 일 초도 남아 있을 수 없으며, 그 결과는 이원성(duality)이다. (Rational Refutation, p.162)


베단타 신봉자들에게 단지 세 가지 인식의 양태, 또는 세 가지 다른 종류의 대상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구분은 존재의 영역으로 바로 옮겨지며, 거기에는 세 가지 분리된 종류의 실재가 있다. 브라흐만은 ‘참된 실재’라고 표현해야 하고, 반면에 밧줄이나 사람 또는 신 그 자신은 ‘실재하지 않은 실재’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실재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베단타 신봉자뿐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실제로 보인다.

물론 이런 하찮은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베단타 신봉자들은 경험적인 실재(vyavahārika)의 모든 세계를 허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외부 세계의 전지전능한 이슈와르, 곧 기획자이자 지배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세계는 니아야 철학 체계에서처럼 쁘라끄리티나 원시적인 본질로부터 진화되지 않고, 마야로부터 진화됐다.

그러나 이 모든 세계, 모든 피조물, 인격적인 신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비실재적이고, ‘브라흐만만이 참되고 세상은 거짓이며, 영혼이 브라흐만 그 자신이며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 뻐럼아르티끄(Pāramārthika) 수준에 있는 실재가 그들 너머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실재하는 세계는 그 자체의 것이 아니라 브라흐만의 것이다. 이는 비바르뜨(vivarta) 또는 브라흐만의 ‘환각 효과’(illusory effect)이며, 경험적인 수준에서는 뻐리남(parināma) 또는 마야(māyā)의 진화라고 불릴 수 있다.

고레는 여기서 이 논리의 불합리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느끼는 지점까지 그 논쟁을 가져왔다. 즉 베단타 체계는 세상을 거짓과 환상으로 보면서, 동시에 이를 브라흐만이라고 말한다. 이는 반드시 거부되어야 할 논리적 모순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레는 신에 대한 베단타의 교리를 다룬다. 그들은 진정으로 실재하는 존재는 오직 브라흐만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브라흐만은 궁극적으로 니르군, 즉 속성을 갖지 않는다(nirguna)고 말한다. 동시에 사군 브라흐만(saguna Brahman), 즉 속성을 가진 브라흐만은 오직 경험적인 수준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창조주 하나님, 즉 인격적인 이슈와르는 ‘실재하지 않는 실재’이거나 오히려 거짓이다. 그렇다면 아드바이타 일원론자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자신들의 신개념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밖에 예상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단지 이슈와르에서 멈추고 난 뒤 최고의, 그리고 가장 먼 너머에 있는 순수한 브라흐마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존재로서의 그러한 지고의 영(Supreme Spirit)을 고려하지 않는다.

고레는 계속하여 니르군 브라흐만이 속성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zero)으로 수렴되어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팔리(Paley)에 따르면 고레가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전통적인 논쟁들은 니르군 브라흐만에 적용할 수 없다. 만일 브라흐만이 세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추론을 통해 그 존재에 대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심지어 아드바이타 신봉자들이 받아들이는 사치드아난드(Saccidananda)로서의 브라흐만에 대한 유명한 정의조차도 그 신을 영(zero)보다 위로 들어 올리지 않는다.

그들의 브라흐마는 오로지 명목상으로 지성과 희열일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지성이며, 행복의 결실이 없는 희열이다. 만일 그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영혼이 행복할 것이라는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Rational Refutation, p. 374)


하지만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 하나님을 초월하는 존재(브라흐만)가 실재한다는 증명이 아니라 창조주의 실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진실로 세상의 창조자이자 자신의 신적인 의지로 그것을 보존하는 유지자이며, 사실상 이 창조주 하나님은 지고의 존재로서 그보다 높은 그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 이슈와르는 실제로 브라흐만보다 더 높은 개념이다. 마야의 개념은 베단타의 창조와 실재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브라흐마반답 같은 후기 저술가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 개념을 긍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고레가 어떻게 이를 실재를 해석하는 잘못된 방법이라고 반박하는지 주목해보자. 그가 마야의 번역으로 ‘무지’(ignoranc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다음 인용문은 그의 논리적 방법뿐만 아니라 산문 스타일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베단타 신봉자들이 무지를 세상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원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들으면 물론 그들이 무지를 그 자체로 참된 것으로 이해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만일 무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실수로 밧줄을 뱀으로 보았을 때 그 뱀은 거짓이지만, 그 사람의 착각 그 자체는 거짓이 아닌 참이라고 한다. 그러나 베단타 신봉자들은 무지를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거짓으로 간주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간주함으로써 베단타 체계는 무엇을 얻는지 물어야 한다. (Rational Refutation, p. 347)


고레의 결론은 거짓에 의존하는 것은 반드시 거짓이어야 하고, 따라서 하나님과 창조의 본질에 대한, 그리고 그 모두에 관한 우리 지식의 본질에 대한 아드바이타의 견해 전부는 쓸모없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죄


정통 힌두교의 철학 체계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ātman)은 영원하며, 실제로는 지고의 영혼(뻐럼아트만), 즉 브라흐만과 같다. 경험적인 수준에서 창조를 바라볼 때 ‘신은 세상을 영혼들의 선악 간의 행위를 보상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신이 자신의 순수한 자유의지와 선한 쾌락으로부터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기보다는, 까르마(karma)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마야를 통해 세상을 실재 속으로 가지고 온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에 의해, 그분과의 교제를 위해 창조된 존재로서의 영혼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은 ‘경험적인’(practical) 수준에서 영혼이 영원으로부터 영혼으로 존재해 왔으며, 궁극적으로 ‘참된’(true) 수준에서의 브라흐만과 같다는 힌두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조된다. 이 영혼과 브라흐만의 동일성에 대해 고레는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영혼은 브라흐만 그 자체이며, 다른 어떤 것도 없다’는 베단타의 격언이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베단타 신봉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은 한편으로 영혼이 무지 때문에 잘못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브라흐마가 본질에 있어 언제나 순수하고 지적이고 자유롭고 단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영혼이 브라흐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순을 조화시키기 위해 흥미롭게도 이를 가장 정교한 신비화로 포장해 버린다.  (Rational Refutation, p. 33)


그의 논리적인 논증은 브라흐마반답이 시도했던 것과 같은 마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따르지 않고서는 대답하기 쉽지 않다. 영혼과 인간 자체의 본질에 대한 고레 자신의 이해는 이와 매우 다르다. 그는 죄에 대하여 더 진지한 태도를 보인다. 그 점에 있어 고레는 영혼의 배후에 있는 적극적인 악의 권세를 결코 최소화하려 하지 않으며, 이 악의 권세가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힌두교는 명백한 구별을 끌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까르마의 관점에서 보면 악은 물론이고 미덕 역시 속박의 원인이기 때문에 힌두교 체계는 이 둘 사이의 구별을 잃어버리고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로부터의 해방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죄와 미덕은 경험적 실재의 자리에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것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Rational Refutation, p. 275)


고레는 인간은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를 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니아야와 바이셰시카 체계의 조언에 반박하면서 죄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분명한 어조로 진술한다.

선한 행위들을 피하려고 하는 당신의 염려는 지극히 쓸데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매우 부패하여서 그 행위들이 여전히 악과 불완전에 심하게 엉겨 붙어 있으므로 그의 행위가 선하게 유지되도록 두어라. 그리고 인간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순수함을 가지고 단 하나의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 안팎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바로 이런 행위들은 악으로 더럽혀져 있다.  (Rational Refutation, p. 141)


따라서 정통 힌두교는 죄를 영(zero)으로 축소하는 반면, 브라흐마 사마즈의 유신론은 이보다 약간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유신론은 죄를 질병과 같은 자연적인 악의 한 종류로 간주하면서 이를 개선하는 치료를 통해 고칠 수 있다고 본다. 고레에게 있어서 기독교가 죄의 실재와 그 심각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그 효과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는 처음에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던 죄의 무서움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실제로 영원한 형벌의 교리에 관하여 무려 126쪽의 소책자를 쓴 것은 그의 저작물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영혼을 맨 밑바닥에서 뒤흔들어 놓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영원한 형벌의 교리였다. 그리고 나는 죄를 버리고 거룩함과 미덕을 따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A Letter to the Brahmos from a Converted Brahman of Benares(2nd edn, 1868), p.52)


영원한 형벌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설명은 ‘속죄와 구원’(Atonement and Salvat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익명의 브라흐모 전도지(아마도 케샵 찬드라 센의 작품)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 그 전도지에서 저자는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복주시기 위해 우리를 벌하신다는 것이다. 고레는 이 견해가 하나님의 정의를 과소평가한다고 느낀다. 죄는 치료할 약이 필요한 ‘질병’이 아니다. 이는 반드시 그 당연한 결과로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도덕적인 잘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영향력에 반하는 증거를 스스로 만들어 온 인간들, 하나님과 덕을 향하여 돌이킬 능력이 없는 인간들은 언제까지나 끝없이 계속되는 자신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형벌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On Objection against the Catholic Doctrine of Eternal Punishment, 1868, p.16)


고레는 자신의 소책자에서 정의와 형벌의 본질에 대한 이 진술(어쩌면 약간 까르마 교리에 빚을 진)로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방식, 그리고 성찬례 가운데서 우리에게 매개된 그리스도의 고난의 유익에 대한 설명으로 이끌어 간다. 이는 그 자신이 직접 여행했던 길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고레는 다소 ‘두려움에 떠는 성자’였다. 하지만 그 두려움들이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연약한 순간마다 반복됐음에도, 그는 그 두려움들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

구원의 의미


『합리적인 논증』에서 고레는 구원에 대한 힌두교의 개념이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그런 부적절함은 힌두교의 모든 학파에 공통적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영혼이 무지(māyā, avidyā)에 속박되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이 마음과 감각들, 그리고 육체와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악한 행위나 선한 행위 중 하나에 참여하는 것은 이 속박의 표시이다. 구원, 즉 목쉬(moksha) 또는 묵띠(mukti)는 이런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그러한 해방은 ‘바른 이해’(right apprehension) 또는 참된 지식(즈냐나)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즉 이것은 마음과 감각, 육체와 구별된 영혼에 의한 인식이다.

이러한 즈냐나는 경전(shastras)을 연구함으로써, 구루 또는 해석자의 도움을 통해 얻을 수 있으며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에 대한 즉각적인 인식’을 제공한다. 따라서 해방 또는 구원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어떤 것이며, 이는 단순히 ‘비참한 것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고 어떤 행복의 원천도 아니다.’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그 자아가 지고의 영혼, 즉 뻐럼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특히 니아야와 바이셰시카학파 안에서조차 대체로 내용이 없다. 고레는 이를 단순히 ‘불안함과 의지, 감성의 모든 발현력을 상실하고 돌처럼 되는 것’이라고 쓰고 있으며, 그러한 무감각 상태를 획득하는 것은 진정한 해방이나 목쉬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힌두교 유형의 구원에 대한 그의 판단은 죄와 벌을 제거해야 하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즈냐나에 대한 기독교적인 개념은 매우 다르며, 인간의 가장 깊은 필요들에 대해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비참함과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 그리고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바르게 알 수 있게 해 주는 지식이다. (Rational Refutation, p. 29.)


하지만 그런 즈냐나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 너머에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만 오게 된다. 힌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도 인간의 최상 목표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이를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길을 제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고레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놀라운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을 가지심으로써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는 교리는 인간이 성례를 통해 그분의 인성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인간과 연합한 그분의 인성을 통해 나아가 그분의 신성에도 연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연합은 베단타에서 가르치는 그 불가능한 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례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의 인간성을 통해 인간이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며, 그분을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경지로 높여드리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으로 그분과 소통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내가 보건대, 이 교리는 단순한 유신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을 성화하고 고양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Proofs of the Divinity of Our Lord, stated in a letter to a Friend, 1887, p. 36)


1887년에 출판된 이 글에서 우리는 고레의 후기 관점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유익이 거룩한 성찬(성례전)을 통해 전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우리를 위해 구원이 확보됐는지, 어떻게 그 구원을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구원이 어떻게 힌두교의 가장 깊은 갈망을 성취하는지에 대한 고레의 풍부하고 인상적인 진술은 바로 그 성찬례에 대한 설명 안에서 발견된다.

성례전 속에서 우리는 갈보리에서 단 한 번에 모두를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볼수 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몸에 난 상처와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익사시키고 소멸시키는지, 어떻게 자신의 놀라운 사랑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그 자신과 연합하게 하시고, 또한 자신을 통해 우리를 아버지와 연합하게 하기 위해 오시는지 알지 못한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우리의 육체를 취하신 그분의 신성 안에서 자기 아버지와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거룩한 성례전 가운데서 바로 그 육체를 우리에게 주시고, 바로 그 육체를 통하여 우리를 본성에 있어서까지도 그 자신과 연합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인격에 있어서 그분과 구분된 채 남아있으므로) 비록 인격적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신비적으로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을 신비한 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자신을 통하여 우리로 아버지와 연합하게 하시는 그분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우리로 ‘그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게 하신다. 오, 영광스러운 선물이여! 오 놀라운 사랑이여! 인도의 아들들인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사트, 씨트, 아난드’라고 부르기를 즐겨했던 하나님, 그러나 그들이 피조물은 결코 창조주와 합일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채 잘못된 의미에서 간절히 연합하기를 열망했던 그 하나님에 대하여 이제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그 후손들에게 그것의 바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비록 오해했지만 그 열망과 간절함은 미래의 선물을 위한 하나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나는 종종 그렇게 생각하기를 즐겨한다.  (On Objection, 1868, pp. 41-42)


이는 고레의 합리적인 비판의 상대편인 힌두교에 대한 동정적인 통찰뿐 아니라 어떤 긍정적인 정통주의와 설득력 있는 표현의 힘을 보여주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구절이다.

힌두교 안에 있는 복음의 예비(Praeparatio Evangelli)


우리는 고레의 힌두교와의 대화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단지 서구화된 인도 기독교인 내지는 국적을 상실하고 자신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 공감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큰 오산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서구화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는 서양식 의복, 심지어 성직자용 로브도 착용을 거부했으며, 언제나 인도적 의미에서 극도의 단순성과 금욕주의에 기초한 삶을 살았고 자신의 사례비를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는 정도로만 유지했다. 고레가 교회와 사역, 성례전에 대한 옥스퍼드 운동의 입장을 완전히 받아들인 확고한 성공회 가톨릭 신자였고, 그가 한때 힌디어 성경개정위원회에 함께 앉기를 거부한 바 있던 ‘비성공회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교회의 서구적인 과시 요소들이 심지어 성요한회 신부들(Cowley Fathers)의 금욕주의를 통해 그에게 접근하고자 했을 때조차 그것을 거부하였다. 케샵 찬드라 센과 같이 고레는 기독교가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동포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사람도 이를 외래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이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더 큰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시아인들이다. (Christianity not of Man but of God, 1888, p. 59)


그는 성자였으며, 그의 성자다움은 서구의 그것보다는 동양의 전형적인 그것에 가까웠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는 또한 인도사회의 현장에서 가장 뚜렷한 서구의 영향으로 보였던 합리주의와 회의주의에 대한 엄정한 비판자였다. 그는 자기 힌두 동족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사회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기독교의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셨음을 확신했다. 실제로 그는 진실한 정통 힌두교 신자가 철저히 서구화되고 세속화된 보다 세련된 브라흐모나 합리주의자보다 복음에 더 개방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힌두교 신자는 오히려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 힌두교도인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물론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도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잘못된 것은 바가바드기타, 바가바타 등과 같은 책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우리에게 기독교의 교훈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아나냐박띠(ananyabhakti, 하나님에 대해 나누어지지 않은 헌신), 바이라갸(vairagya, 세상을 포기하는 것), 나무르따(namrata, 겸손), 끄사마(ksama,관용)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는 흥미롭고 심지어 감동적인 문장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고레는 자기 힌두교 형제들과 함께 자신의 영역을 넓혔지만, 그가 언급하는 네 가지 자질들은 힌두교로부터 배운 것이고, 그가 진정한 기독교 성인이 되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질들은 진정 인도 기독교를 특징짓는 최고의 상징들이다.

그는 계속하여 정통 힌두교에는 합리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정한 개념들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개념들이 성취되기까지 그들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개념들은 기적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성육신의 모든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개념들은 복음의 예비(praepartio evangelli)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며, 고레는 자신의 경험으로 이를 증명한다.

나는 힌두교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에 그 종교를 포기했다. 이 종교의 오류들을 나는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신이 화신이 된다는 힌두교의 가르침과 그 사상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로 힌두교가 신의 화신이라고 가르치는 끄리슈나와 라마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곤 했다 … 그리고 우리 동족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해왔다. (Proofs of the Divinity of Our Lord, p.76-77, 각주)


성육신에 대한 힌두교의 이해를 다루는 글에서 고레는 터툴리아누스를 인용하는데, 실제로 그의 부정적인 접근은 어쩌면 더 수용적인 클레멘트보다는 오히려 터툴리아누스의 접근법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터툴리아누스는 『부활하신 육체』(De Resurrectione Carnis)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과거시대의 숨겨진 비밀들을 펼쳐내시는지 보여준다. 고레는 성육신의 교리로 논점을 전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터툴리아누스는 부활에 대하여 말한다. 그의 가르침은 고대의 고귀한 지성들 사이에서 어렴풋이 신비한 기대감으로 존재했던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과 동일한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기대들의 의미를 보여주셨으며, 그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셨다. 그리고 시인과 철학자들이 꿈꾸고 상상하던 성육신 속에서 그들 스스로 표현했던 그런 열망과 어슴푸레한 전조들을 만족시키셨다. 그분은 그 기대하던 진리를 자신의 가르침으로만 아니라 자신의 역사로써 증명하셨다. 그분은 실질적으로 그들이 꿈꿔왔던 모든 것, 아니 무한히 더 많은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On Objections, p. 81, 각주)


여기서 그리스도는 분명히 힌두교의 열망들을 성취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고레가 어떻게 성례전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사치드아난드로서의 브라흐만과의 연합이란 고대 힌두의 갈망이 성취되었음을 보았는지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힌두교 안에서 증인들 없이 자신을 버려두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신성한 빛’을 힌두교도들의 가슴속에 심어 놓으셨다.

사랑하는 나의 동족들이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한하신 긍휼하심 가운데 여러분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가슴속에 비추어 주신 신성한 빛을 소멸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나아가 여러분이 그 빛의 인도를 잘 따를 수 있기를, 여러분이 온유하고 인내하면서 기독교의 성경을 읽고 따를 수 있기를, 여러분이 그 성경의 값없는 약속들을 붙들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이 하늘나라의 기쁨을 영원한 분깃으로 상속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Rational Refutation, p. 280, 맺는말)


고레가 언급하는 ‘신성한 빛’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에게 있어서 이성의 빛이며, 그가 자신의 신학의 도구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은 이성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너머에 있는 계시를 보기 위하여, 그리고 힌두교 최고의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비추이는 ‘참 빛’으로 향하는 많은 암시를 분별하기 위하여 이성을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 본 게시물은 필자가 번역한 <인도기독교사상>(CLC, 2020)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으로서 전체를 옮기거나, 정당한 인용표시 또는 출처표기 없이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저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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