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9> 성취신학 : 그 기원과 발전, 그리고 한계

2021. 1. 24. 09:43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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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필자의 저서 "박띠의 다리를 넘어 그리스도께로"(CLC, 2018)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한 것입니다.


성취신학(Fulfillment Theology), 혹은 성취이론(Fulfillment Theory)이란 적은 분량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 속에 자신의 신적 로고스를 통해 진리의 씨앗을 뿌리고 준비시키셨다가 마침내 때가 차면 세계인들이 갈망하는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이 입장을 인도 기독교 신학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인도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분의 내재하시는 영으로 힌두 성자들을 통해 복음을 준비시키셨는데, 그 준비와 갈망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었다”가 될 것이다. 이 성취이론이 갖는 장점은 그리스도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로서의 독특성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힌두교의 신앙과 문화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이런 입장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흥미롭게도 서구 선교사가 아닌 브라민 출신 개종자이자 알렉산더 더프의 제자인 크리슈나 모한 바네르지(Krishna M. Banerjea)였다. 그는 힌두교 최고의 경전인 베다 안에 하나님의 복음의 예비가 있다고 말했는데, 특히 성육신 하신 하나님, 인류구원을 위해 희생제물이 된 쁘라자빠띠의 이상이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브따르(化身) 신앙에 익숙한 인도인들에게 절대자의 성육신 쁘라자빠띠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내용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에 좋은 준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쁘라자빠띠에 관한 베다 본문의 맥락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토마스 슬레이터(Thomas Slater)


뿌네 연합성경신학교(UBS) 종교학 교수였던 진기영 박사가 대표적인 성취신학자로 소개하는 토마스 슬레이터는 성경과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역사적 예를 전거로 삼아 자신의 신학을 정당화시켰다. 그는 먼저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상한 마음으로부터 성경적 증거를 제시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슬레이터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악인도 죽이기를 원치 않으실 뿐 아니라, 어떻게든 살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힌두들은 지옥에서 심판받기로 운명 지워진 버림받은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기회가 아직 남은 탕자(눅 15:11-27)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막 1:15),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도래를 위해 헬라의 철학과 로마제국을 준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인도 인들을 위해 인도의 현자(리쉬)들을 준비하셨다. 


슬레이터는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바깥 영역에 돌봄이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을 결코 상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편벽된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이방인을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희미하고, 깨어지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증인을 보내사 세상을 비추어 오셨다는 것이다. … 슬레이터에게 힌두 신앙은 뒤집어엎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채워져야 할 열방의 채워지지 않은 갈망이다(학 2:7). 만일 힌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산다면,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로마인 고넬료처럼 그 역시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았다(행 10:35). - 진기영, 인도선교의 이해 II(CLC), 21


슬레이터 성취신학은 그 뼈대를 형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있는데, 바로 ‘예비’와 ‘성취’, 그리고 ‘로고스’ 개념이다.

예비 :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속에서 고대 세계의 신앙을 예비하셨다고 본다. 세계 종교 안에 기독교와 유사한 진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계 종교의 발전 과정에 개입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멸에 대한 힌두의 갈망은 기독교의 영생에 대한 가르침의 예비이고, 크리슈나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 성육신의 복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예비로 보는 것이다. 힌두교와 기독교 사이에 있는 이러한 공통점은 슬레이터의 입장에서 볼 때 계시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나 그분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증거이다. 예비가 없는 곳에는 성취도 없다. 그런 점에서 슬레이터의 신학은 ‘예비’의 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

성취 : 슬레이터에 의하면 세계 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 성육신, 영생,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갈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므로, 다른 종교의 가르침으로는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만족시킬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세계 종교 시스템은 실상의 ‘그림자’이고, 구속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불안정하고, 임시적이고, 결핍을 내재하는 갈망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약속을 성취하고 갈증을 만족시킬 그리스도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레이터는 힌두교가 폐기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을 다음과 같이 기대하였다.

우리는 기독교를 파괴자가 아니라 그들의 옛 신앙이 가진 가장 훌륭한 이상을 완성해 주는 성취자로서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전파자로서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의 종교적 확신을 짓밟고 비방하거나 뿌리 뽑고 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빛에 비추어 그들의 신앙을 해석해 주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그것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무가치하고 채워지지 못한 상태로 놓이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 T. Slater,  “How Shall We Preach to the Hindus?,” The Harvest Field, Vol. VII, No. 9 (March 1887), 260; 진기영, 위의 책 77-78 재인용.


슬레이터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 계시는 유일하고 완전하지만 힌두교는 부분적이고 부족하다. 이런 입장은 좀 오만한 태도일 수는 있지만, 슬레이터는 선교사로서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임시적이고 쇠퇴해가며 불안정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갈망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로고스(신적인 말씀, 또는 신적 이성) : 로고스는 세계 종교 속에 진리의 요소가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준비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말해 준다. 신앙의 갈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는 추진력을 슬레이터는 로고스라고 표현한다. 그는 이 로고스를 보편적 로고스(universal logos)와 성육신적 로고스(incarnated logos)로 나누었는데, 전자는 내재하시는 그리스도(Christ within)이고, 후자는 외재하시는 그리스도(Christ without)이다.

내가 처음부터 언급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한 국가나 세상의 특정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지역에는 이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세계사의 특정 시기에 새로운 종교로 갑자기 나타난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상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그것의 본질적 불변의 성질 대문에 우리의 보편적인 도덕 원리가 그러하듯이 모든 인류의 자연적인 유산인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사람들에게 억지로 집어넣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 내부에 관념과 원리가 씨의 형태로 있는 것인데, 단지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일만 남은 것이다.  - T. Slater, God Revealed: An Outline of Christian Truth. Being Sunday Afternoon Lectures Delivered to Educated Hindu ; 진기영, 위의 책, 79 재인용.


슬레이터는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는 빛과 로고스를 따라 충실하게 살았다면, 비록 무신론자로 불렸던 사람일지라도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보편구원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에서, 비록 외부에 계신 역사적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전해지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로고스, 곧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산 사람이 있다면 지역, 시간,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그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유대인이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듯, 이방인들도 최고도의 로고스를 따라 사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로고스의 존재는 중요하며 이로 인해 이방인도 하나님 앞에 핑계할 수 없고, 성육신적 로고스의 도래에 대한 확실한 준비가 된다고 보았다. 이런 보편적 로고스의 존재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 이방 세계의 구원 문제에 대한 슬레이터 나름의 대답을 보여 준다.
 

파커(J. N. Farquhar)


슬레이터에 의해 깊이 있게 연구된 성취이론이 인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출판된 파커의 책, 『힌두교의 면류관』(The Crown of Hinduism)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의 모든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들의 최종적인 성취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힌두 지식인들을 복음화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고 힌두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접근했다.

먼저 그는 힌두교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적 요소들에 주목하고, 신실한 힌두들이 우파니샤드와 기타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성경에서 얻는 것과 같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도움을 얻고 있는지를 보았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그는 마침내 두 종교 사이에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진화적인 연결고리”(evolutional connection)
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힌두교 안에 단순히 전조로 보이던 것들이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고 완전해졌는지를 밝힌 것이었다. 힌두교 안에서 진화되어 온 이러한 고상하고 훌륭한 요소들은 필수적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완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파커는 그 논점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힌두교 안에서 불결하고 타락한, 또는 무가치한 행습들의 표현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동기가 그분 안에서 억압당하는 자, 무지한 자,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한 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음을 발견한다. 힌두교 안에서 비취는 빛의 각각의 광선은 그분을 향해 집중된다. 그분은 인도 신앙의 면류관이다. - J. N. Farquhar, The Crown of Hinduism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15). 458.


박띠는 물론 힌두교의 훌륭하고 고상한 요소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요소이다. 파커는 박띠를 힌두교의 고등한 표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우상 숭배와 박띠 전통의 결합에 대해 토의하면서 그는 우상 숭배의 기원을 직접 독실한 힌두들의 절실한 요구와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상 숭배는 힌두교도들에게 자신들의 철학이 전혀 주지 않았고, 결코 줄 수 없는 어떤 것, 즉 현존하며 만날 수 있는 신들을 가져왔다. 사상과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브라흐만은 결코 누군가에게 우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상은 인간이 언제든 기도할 수 있고, 인간이 원하는 것에 대해 도움을 받거나 응답을 얻을 수 있는, 그래서 마침내 인간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그런 신이다. - J. N. Farquhar, 위의 책 341


이처럼 단 하나의 우상을 향한 박띠의 열정에 사로잡힌 힌두는 시골사람이든지 거룩한 시인이든지 그가 신의 눈에 비친 영광을 보게 될 때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거나 갑작스런 감동으로 기절하여 쓰러진다. 그래서 특히 박따에게 있어 우상 숭배는 생생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히 감성으로 충전된 영적인 지배력이다. 이는 마침내 우상을 허무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참 빛이 비춰질 때, 그리고 동시에 박따들의 욕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보다 건강한 영적인 습관으로 채울 수 있게 될 때 영적인 활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미 그런 욕구들을 채우고 계시는 것으로 보인다.

성취이론의 발전과 한계


슬레이터와 파커의 성취이론은 또한 이어지는 세대의 인도 출신 기독교 신학자들의 사고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보이드(Robin Boyd)는 파커의 견해들이 특출한 인도 기독교 사상가들인 아빠사미(A. J. Appasamy)와 첸치아(P. Chenchia)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파커가 힌두교에 적용한 기독교 변증론은 후에 아빠사미가 특별히 박띠에 적용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몇몇 다른 사상가들도 약간의 수정을 가하면서 성취이론에 동의한다. 실례로, 1914년 선교 잡지 「하베스트 필드」에 파커에 대한 응답으로 기고된 한 익명의 글은 기독교 교리와 조화될 수 없는 힌두교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지적했는데, 일원론의 비인격적인 신, 업보와 윤회(karma samsara)에 대한 믿음,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들이었다. 기고자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런 모순되는 요소들을 성취하는 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만이 그토록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하는 힌두들의 깊은 욕망을 채워주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힌두교에 대한 이 기고자의 태도는 박띠가 힌두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표현이지만 그 완전한 성취를 위해 여전히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의 영적, 도덕적, 지적인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으며, 그분만이 인간 본성의 고결한 욕망들, 최고의 이상들, 가장 순수한 애정들을 채우신다는 것이다.

한편 슬레이터와 파커의 성취이론은 호그(A. G. Hogg)와 블랜차드(Mau￾rice Blanchard), 맥키챈(D. Mackichan), 크래머(Hendrick Kraemer) 등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호그는 힌두교와 기독교 사이의 유사점을 근거로 성취를 주장하는 성취신학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선교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런 주장은 힌두들이 이미 믿고 있는 바를 강화시키기만 할 뿐 힌두교와 기독교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점을 모호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가 힌두의 갈망을 성취한다는 주장은 견강부회라고 주장하면서, 힌두교 가 성취하기를 원하는 많은 요소들을 그리스도는 누락하였으며, 반면에 힌두교에 결코 없는 부분까지도 성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인도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채워져야 할 힌두들의 필요의 본질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영역을 추가했다. 성취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원칙은 파커에 동의하지만 그리스도가 성취하는 것들의 내용에 대한 것에 있어서는 그와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는다.

존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힌두교의 완성자도 아니요, 그것의 면류관도 아니다. 힌두교는 하나의 종교요, 신념체계요, 일련의 교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종교적인 체계를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인간의 내적인 필요를 채우는 존재로 드러난다. 존스는 인간에게는 어디에서나 요구되는 세 가지 필수적인 욕구들이 있다고 보았다.

① 지위에 적합한 목표.
② 자유롭고 풍족한 삶.
③ 하나님(God).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떤 사람에게든지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필요는 힌두교의 박띠 안에 생생하게 표현된 그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적합하게 채워줄 수 있는 필요이다. 이는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 한 전도모임에서 존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힌두나 무슬림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필요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분은 그것들을 채우셨습니다. - 스텐리 존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서울: 평단, 2005, 264


스탠리 존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힌두들의 갈망(추구)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보았다. 힌두들의 갈망을 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은 ‘영적인(내적인) 성취자’로서의 그리스도라는 관점의 유일한 하나의 결과물이다. 이런 스탠리 존스의 접근은 후에 모리스 블랜차드(Maurice Blanchard)에게 영향을 주었고, 모리스 역시 파커의 ‘그리스도는 힌두교의 면류관 또는 성
취’라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기타(Gita)에 등장하는 힌두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교리들은 결코 기독교의 그것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는 스탠리 존스처럼 그리스도를 힌두들의 내적인 갈망을 채우는 존재로 보았다.

레이몬드 빠니까르(Raymond Panikkar)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과격하게 나간 인물은 빠니까르다. 빠니까르의 사상과 신학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포스팅으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이며, 여기서는 성취신학과 관련하여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그는 유명한 책, 『힌두교의 익명의 그리스도』(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 1964)에서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서 감추어진 방법으로 수세기에 걸쳐 일해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은둔성(hiddenness)은 다른 종교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반계시 신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는 사도행전 14:16-1737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구절과 사도행전 17:23에서 바울이 아덴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숭배하는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하여 선포하고자 했던 사실을 그런 가정의 근거로 삼고 있다.

빠니까르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지만 그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힌두들에게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하면서 “로고스이신 그분은 수천 년 동안 그 종교 안에서 말씀하고 계셨으며, 수 백 만의 사람들을 이끌고 영감을 불어넣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힌두교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비적인 방법으로 힌두교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빠니까르는 박띠를 직접 다루지 않지만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비인격적인 브라만의 참된 계시자가 이쉬와르(Ishvara)이며, 은혜의 근원자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그 자신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서 이쉬와르의 인격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이 되시고 돌아갈 대상이시며, 존재하도록 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두 가지 ‘순간’(moments)을 발견한다. 첫째, 보이지 않는 기원이 되셔서 그곳으로부터 원천이 솟아오르는 순간이요, 둘째, 그 자체로 침묵하는 신성이나 접촉할 수 없는 브라흐만이 아닌, 심지어 모든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도 아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이쉬와르 즉, 성자이자 로고스요, 그리스도로 계시되는 순간이다. - Raymond Panikkar, “Hinduism and Christianity”,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 4(1961), 16-17.


이는 빠니까르가 힌두의 박띠 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신의 성육신에 대한 믿음은 박따들에게 절대적이다. 만일 성육신한 신이 박띠의 대상이라면, 그리고 비인격적인 브라만의 모든 화신들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쉬와르가 감추어진 형태의 그리스도 자신이라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는 진정 힌두 박띠의 성취(완성)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빠니까르의 주장은 결국 복음전도가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이미 힌두교 안에서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힌두들을 복음화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타종교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 그 자체로 그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선포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힌두들에게 자신들 안에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를 명확히 알려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예수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신비적이고 우주적인 그리스도가 필요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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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인도에서의 성취신학, 혹은 성취이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혹자는 아빠사미나 첸치아 같은 학자의 사상까지도 성취신학의 부류에 넣기도 하지만, 그들은 성취신학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인도신학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기에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

성취신학이 인도신학 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당시까지 서구신학의 사고에 틀에 기초하여 힌두교와 인도의 전통을 무가치하며 사탄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이들의 태도를 바꾸어 공감적이고 관용적 태도를 갖게 한 점이다. 물론 그때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 한 가지는 힌두교 안에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 등을 통해 활동해오신 로고스, 혹은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인정하여 이를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으로 보고, 이를 온전히 성취하여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통로로 인식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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