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8> 지존하신 그분 외에는! - 브라흐마반답 우빠디야이

2020. 12. 3. 11:08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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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바바니 차란 바네르지(Bhavāni Charan Bānerji)인 브라흐마반답 우빠디야이(Brahmabandhab Upadhyaya)는 1861년 벵갈의 한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그는 훗날 자신이 현대 인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단언한 케샵 찬드라 센의 영향을 받았다. 

어린 소년시절부터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뜻한 애착을 가졌으며, 이 사랑은 그가 공부했던 캘커타의 스코틀랜드총회연구소(the Scottish General Assembly’s Institution)와의 접촉을 통해, 그리고 센과 모줌다르(P. C. Mozoomdar)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더 깊어졌다. 그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또 다른 기독교적인 영향은 그의 삼촌이자 초창기 벵갈의 위대한 기독교인 민족주의자였던 저명한 깔리 차란 바네르지(Kāli Charan Bānerji)로부터였다. 1887년에 그는 새로운 섭리의 교회 회원이 되었다.

1888년 27세의 나이에 그는 신드(Sindh)에 있는 하이데라바드에 브라흐모 교사로 가서 레드맨(Redman)과 히튼(Heaton) 등 두 명의 CMS 선교사들과의 우정을 통해 점차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영원히 공존하는 아들되심의 진리를 확신하였다.

그는 1891년에 세례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영국국교회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 해가 지나기 전, 그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됐고, 조건부 세례를 받았으며, 데오빌로(Theophilus)라는 이름을 선택했는데 이를 번역한 것이 바로 ‘브라흐만의 친구’라는 뜻의 ‘브라흐마반답’(Brahmabandhab)이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도 ‘순수한 힌두교와 순수한 기독교’를 화해시킬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성육신 이전과 이후에 모든 예언자들과 성인들 안에 계시는 로고스로, 그리고 자신의 순종으로 성육신하신 완전한 의인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인간은 의로워져야 한다.  (B. Animananda, The Blade: Life and Work of Brahmabandhab Upadhyaya, 1947, p.36)


그는
이 이상을 자신이 센에게서 받은 영향력의 직접적인 결실이라고 인정하는데, 우리는 센의 여러 신학적인 개념들을 우빠디야이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초창기부터 힌두교, 특히 베단타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졌으며, 이 지식은 기독교의 계시를 힌두교의 가장 깊은 통찰력과 연관하여 연구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그리고 고레와 달리 그는 인도의 사상가들이 기독교 신앙을 자신들의 집에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베단타의 범주들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스의 사상이 유럽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인도의 사상도 기독교에 유용하게 될 수 있다 … 힌두 철학자의 진리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앙에 이르는 계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 가톨릭교가 입고 있는 유럽의 옷들은 가능한 한 빨리 한쪽 편으로 치워 놓아야 한다. 반드시 인도인들이 받아들일 만한 힌두 의상을 착용해야 한다. 이 변화는 오로지 베단타의 언어로 신성한 신앙을 설교하는 인도인 선교사 수도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Heiler, The Gospel of Sundar Singh, p.248)


여기서 우리는 드 노빌리가 강조했던 이상을 다시 보게 되는데, 우빠디야이는 그 마두라이 전통을 의식했다. 1894년에 그는 사냐시(sannyāsi)의 황토색 예복을 입었으며, 어떤 수도회에 소속되거나 서품도 받지 않았지만, 주교회에 자신의 실험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고 결국 받아냈다. 
같은 해에 우빠디야이는 1899년까지 발간된 월간지인 「소피아」(Sophia)를 창간했으며, 그는 이를 자신의 견해들을 출판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하였다. ‘소피아’란 이름은 홀로 지혜자를 참된 지혜로 이끄는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 주의깊게 선택되었다. 이때가 우빠디야이의 생애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다.

그는 여행하고 강연하면서 신지학회의 공격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으며, 자신의 독특한 설명을 베단타적 사고형태로 발전시켰다. 당시 신지학회의 애니 베산트 여사(Mrs. Annie Besant)는 무시하기 어려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우빠디야이는 또한 자기 동포들의 교육과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헌신했다. 이 시기에 교회 당국과 그의 관계는 우호적이었고, 교회는 그가 사상을 실천하고 발표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 사냐시였으며, 그의 주변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몇몇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 될 새로운 영적 실험을 위해 그 중심지가 될 수도원(matha) 설립을 간절히 원했다. 이는 공동으로 청빈의 삶을 실천하며 사색과 연구의 삶을 추구하는 한 무리의 금욕주의 집단에 대한 오랜 힌두의 이상과 여전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서구교회의 수많은 선교회들처럼 그 이상을 소외시키는 대신, 그곳에서 힌두 세계를 끌어당길 수 있는 용어와 개념, 관습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정신을 표현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는 자발뿌르에 있는 나르말다 강변, 대리석 바위산의 좁은 협곡 근처에 부지를 발견하고, 실험의 시작을 간절히 고대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 내에서는 우빠디야이의 진보적 관점들에 대한 공식적 반대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너무 빨리 가고 있다고 여겼고, 그의 계획을 잘못된 조언이요,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의견이라고 느꼈다. 결국 교회의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그 계획은 어쩔 수 없이 취소되어야 했다. 이는 우빠디야이를 점점 더 고통스럽게 하여 마침내 그가 죽음으로써만 끝나게 될 교회 당국과의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1990년에 그는 자발뿌르에서 캘커타로 옮겨왔고, 한 동안 민족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친밀하게 일하면서 샨티니케탄(Shāntiniketan)에 있는 유명한 아쉬람을 발전시켰다.

그는 왕성하게 기고활동을 계속했고, 기독교 교리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상까라(Sankara)의 비이원론(non-dualism) 쪽으로 점점 더 돌아서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초기에 그는 바네르지(K. M. Banerji)의 ‘베다 신학’ 쪽에 매력을 느꼈지만, 기독교인들이 상까라의 베단타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상까라의 철학이 인도 사상의 최고 정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아드바이타 철학을 결합시키는 매우 어려운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빛나는, 그리고 깊은 사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노력 가운데서다. 

동시에 그는 민족주의 투쟁을 발전시키는 일에 점점 더 참여하게 됐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그 투쟁에 헌신하였고, 실제로 오늘날 기독교계 밖의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그를 주로 애국자로 기억하하고 있다. 이는 비록 처음은 아닐지라도, 인도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정치적인 활동의 결과로 우빠디야이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의 간극이 더 크게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당시 주간으로 발행되고 있던 그의 잡지 「소피아」와 이를 계승한 「20세기」(The Twentieth Century)의 폐간을 가져왔다.

1902년에서 1903년 어간에 그는 사냐시로 살면서 유럽을 방문하였고 주로 영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폰 휘겔(Von Hügel)을 만났던 런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유럽에서의 경험들은 단지 그에게 괴로움만을 더했던 것 같다. 그 괴로움은 자신의 조국을 정치적, 문화적, 지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서구에 대한 것이었다. 인도로 돌아온 후 그의 활동 중 몇 가지는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인도 기독교인 친구들마저 그의 정통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그와 알고 지내던 선교사들은 그가 교회와의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힌두 소년들을 위해 운영한 학교에서 우빠디야이는 학생들에게 학문의 여신 사라스와띠 숭배에 참여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이다.

쁘라야쉿뜨(prayaschitta) 제사의식을 거행하는 장면

또한, 그는 비록 아브따르와 그리스도의 유일한 성육신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아브따르로서 끄리슈나를 숭배하는 힌두들의 정당성을 변호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해외여행을 함으로써, 그리고 외국인들과 음식을 먹으면서 빠지게 된 ‘오염’에 대해 회개하면서 쁘라야쉿뜨(prāyaschitta), 즉 속죄 의식에 참여했다. 그의 일부 기독교인 친구들은 이 예식으로 그가 기독교 신앙을 떠나 힌두사회로 돌아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우빠디야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음을 주장했으며, 이런 각각의 행위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가슴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힌두라고 느꼈다. 유럽에서 그는 음악의 신 뮤즈와 미의 여신 그레이스(비너스)의 신상과 그림들을 보면서, “그렇다면 힌두 학생들이 사라스와띠를 학문의 전당에서 인격화된 학문의 여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왜 안되는가”라고 질문했다.

끄리슈나 역시 대중적인 힌두교의 사랑의 신이 아닌 인도인을 위한 참된 메시지를 담은 기타(Gitā)의 위대한 가르침을 준 대변자로 본다. 심지어 쁘라야쉿뜨 예식도 그에게 있어 정말로 스스로 단절됐다고 느꼈던 사회에 다시 들어가는 의식의 표시였지만, 힌두 종교로 재입교하는 의미는 없었다. 1907년 9월 10일에 우빠디야이는 영국 정부에 선동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자유를 상징하는 황토색의 사두 의상’이 아니라 평범한 벵골 복식을 입고, 힌두사회와의 연대를 나타내기 위한 브라만의 신성한 실을 착용한 채 법정에 나타났다. 얼마 후에 그는 탈장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수술은 잘 된 것 같았지만 이내 합병증이 시작됐고, 그는 여전히 자유인으로서 46세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라흐마반답 우빠디야이는 벵갈의 정치와 문학의 역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이자 폭풍우를 불러온 인물이다. 신학자로서 그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언급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가장 완전한 연구결과를 기록으로 남긴 알폰스 뵈쓰 신부(Fr. Alfons Väth)는 브라흐마반답이 새로운 기독교 신학을 개척하는 데 실패했으며, 심지어 정화된 베단타 사상을 가진 새로운 세속학교를 세우는데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아마도 세월은 우빠디야이가 성공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본회퍼가 자기 작품을 불완전한 유고집으로 남겨야 했던 것과 유사하게, 그가 완성된 ‘신학대전’(Summa Theologia)을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사상의 계보를 시작했고, 기독교 복음을 인도 배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수행했던 작업이 무엇이며, 그것을 성취하는데 얼마나 성공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기독교와 힌두교


우리는 젊은 시절의 우빠디야이가 케샵 찬드라 센을 얼마나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했는지를 보았다. 그는 센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지만, 새로운 섭리교회 안에 있던 후계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황폐화시켰다고 믿었다. 우빠디야이는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고 설교하던 자신의 친구나 동시대의 비베카난다와는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종교가 반드시 스스로의 완성을 발견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서로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기독교는 일련의 낯선 용어와 구조 아래 그 순수성을 감추고 있는 하나의 서구의 종교로서 인도에, 아니 최소한 벵갈에 온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런 서구적인 형식들은 가능한 유일한 것도 아니었고, 최종적인 것도 아니었다.

기독교의 발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는 마지막 때까지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인도의 토양은 습하고, 그 습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해 교회에 위탁된 보편적 신앙이 가진 정복당하지 않는 순전함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면서, 새로운 기독교의 계시로 하여금 새로운 조화와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게 할것이다. 힌두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의(One), 거룩하고(Holy), 사도적이며(Apostolic), 보편적인(Catholic) 교회의 지배 아래로 들어오면 영원에서 영원까지 달콤하게 온 땅을 채울 ‘새로운’ 찬송가를 노래하게 될 것이다. (Animananda, p.69)


우리는 여기서 우빠디야이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신앙의 ‘순전함’(integrity)이 훼손되면 안 된다는 것을 얼마나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오해로 이끌고 있는 그리고 인도의 사상체계, 무엇보다도 상까라의 그것으로 대체되어야 할 그 ‘교도권’(magisterium)에 대한 서구적인 정교한 설명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힌두교의 정신은 매우 미묘하고 침투력이 있지만 그리스 - 스콜라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한다. 우리 동포들에게 가톨릭 종교를 공식화함에 있어서 우리는 베단타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베단타 철학으로 하여금 그리스 철학이 유럽에서 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일을 인도에서 가톨릭 신앙을 위해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Animananda, p.74)


그렇다면 이것은 우빠디야이의 임무였고, 우리는 그가 다양한 교리 분야에서 어떻게 그것을 시도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주제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힌두 문화와 힌두 종교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는 한 사람의 힌두가 동시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으나, 이를 통해 혼합주의로 가는 과정을 암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인 힌두주의로부터 종교적인 힌두교를 분리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구조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힌두이다. 하지만 우리의 불멸하는 영혼과 관련해서 우리는 가톨릭이다. 우리는 힌두 가톨릭이다 … 그러므로 한 사람의 힌두가 되는 테스트는 종교적 견해들 속에 놓을 수 없다. (Animananda, p.71)

 
그는 자신이 편집한 벵갈어 일간지 산디야(Sandhya, 황혼)에서 자기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갈래의 다르마가 있다. 그것은 사마즈 사르마(samaj dharma)와 사단 다르마(sadhan dharma)이다 … 우리는 힌두다. 우리 힌두교는 사마즈 다르마의 힘으로 보전된다. 한편으로 사단 다르마는 개인적인 것이며, 그 목표는 사단(수행)과 묵띠(구원)이다. 이는 숨겨진 것이요, 명상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회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이는 구루와 제자에게만 알려진 문제이다. 사단을 행하는 한에서 한 사람의 힌두는 어떤 종교에도 속할 수 있다.



여기서 우빠디야이는 스스로 민족주의 투쟁에 깊이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자기 조국인 힌두스탄, 즉 힌두의 나라와 일치시켜야 한다고 느끼던 시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한 사람의 종교와 삶을 분리하여 주제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데도 그는 종교적 진리로서 힌두교를 받아들이는 대신 문화적 힌두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사실상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핵심이 있다.

이는 그리스 문화의 발전과 명백히 유사하다. 본래 그리스 문화는 그리스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나 점차 그 결합이 느슨해져 철학이 별개의 영역이 되었으며, 신화는 종교보다는 문학의 일부가 됐다. 마침내 그리스 종교는 죽어 없어졌지만 문화적 헬레니즘, 철학적,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헬레니즘은 기독교 전통과 합쳐져 오늘날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있다. 어쩌면 여기서 우빠디야이가 한 일은 처음으로 기독교 문화와 인도(힌두) 문화 모두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서로 떼어놓은 것이 아닐까?

2) 사치드아난드(Saccidānanda) 브라흐만


우빠디야이는 브라흐마 사마즈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람 모한 로이의 시대 이래 브라흐마 사마즈에서 하나님은 중성의 단어인 브라흐만(Brahman)으로 서술되었다. 이 호칭은 모든 자격 요건들을 뛰어넘는, 심지어 인격성의 개념마저도 초월한 본래적인 절대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 하나님의 개념은 케샵 찬드라 센에 의해 놀랍게 발전했다.

센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우리가 신인(神人, God-man), 즉 신성을 가진 인간을 볼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결과적으로 브라흐만을 묘사하기 위한 베단타의 유일한 시도인 사트(Sat), 씨트(Cit), 아난드(Ānanda)의 개념을 붙잡았고, 그 속에서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의 해석을 위한 영감을 얻었다.

스스로 브라흐마반답(브라흐만의 친구)이란 이름을 선택한 우빠디야이는 이 개념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힌두교와 기독교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커다란 소원을 성취하는 열쇠를 제공한다고 여기면서, 절실하게 이 개념에 매달렸다. 그는 개종하기 전에는 물론 개종한 다음에도 로마교회의 스콜라 신학을 철저히 공부했다. 또한 스콜라 철학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토마스주의(Thomism)의 질서와 완전성에 큰 매력을 느꼈고, 토마스주의의 서구적 사고 유형을 대체할 만한, 그와 유사하게 포괄적이면서도 완전히 인도적인 체계를 갈망했다.

따라서 그가 베단타에 매혹되어 그것을 예리하게 활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적어도 연구의 초기단계에서 만큼은 정통 스콜라주의와 거의 차이가 없는 신학적 하부구조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한 우빠디야이의 가르침을 살펴보기 위한 최적의 출발점은 그가 산스크리트어로 쓴 사치드아난드로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아름다운 찬송일 것이다. 이는 그가 쓴 어떤 작품보다도 그의 신념을 밝혀줌과 동시에 그 뒤에 감추어진 깊은 헌신을 보여준다. 이 찬송은 사치아난드로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아름다운 찬송이다. 소피아 1898년 10월호에 실렸다가 국제성례전회의(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 1964)의 ‘기도서 및 찬송가’에 영어번역으로 소개된 이 찬송은 사치드아난드 삼위일체(존재, 의식 그리고 지복)에 대한 경배의 구절로 시작되며,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중연합 사역을 연속적으로 설명하며 이어지는 네 개의 절구로 진행된다.

존재와 의식, 지복이신 그분께 경배하네.
세속에 찌든 이들이 혐오하는 그분께
순수한 마음들이 갈망하는 그분께
지존자의 처소에 거하시는 그분께 나는 경배하네.

그분은 지존자,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 초월자,
눈에 보이지 않는 충만함, 내재하시나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
삼중으로 관계하시며, 순전하고, 연고가 없으시며
지식을 넘어선 지식이신 분.

아버지, 태양, 지존하신 주님, 태어나지 않으시고,
싹이 트는 나무의 씨앗이 없는 씨앗이시며
모든 만물의 원인이 되시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신 분.

무한하고 완전하신 말씀,
독생하신 지존의 인격,
성부의 본성을 공유하시는 분, 본질에 의한 의식,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

존재와 의식으로부터 나오시는 그분은
온전한 지복의 호흡으로 충만하신 분,
정화하시는 분, 민첩하신 분, 말씀의 계시자,
생명을 주시는 분.



이는 장엄한 찬송이며, 힌두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기독교의 정통성이 더 두드러진다. 아버지, 뻐르메슈와르(parameshvara, 지존자), 말씀(Word), 독생하신(begotten), 호흡(Breath), 정화시키는 분(Purifier), 말씀의 계시자(Revealer of the Word), 생명을 주시는 분(Life-giver) 등의 단어는 대체로 성경에서 직접 번역한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성경적인 울림을 갖고 있다. 힌두교의 ‘싸트, 씨트, 아난드’로부터 파생된 용어가 사용된 곳은 ‘싹이 트는 나무의 씨앗이 없는 씨앗’, ‘온전한 지복’ 등인데, 이런 표현들은 그 대신 사용되어온 그리스어나 라틴어 파생 어휘들보다 더 풍부한 표현력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더 생생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언급,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은 이 찬송의 뒷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데, 인도적인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한다.

‘사치드아난드’의 개념이 삼위일체의 본질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 특히 브라흐마반답의 성경적이고, 그리스적이며, 힌두적인 원천들로부터 온 개념들과 풍부한 조합을 이루었을 때, 힌두교도들을 기독교 교리의 완전한 이해로 향하게 하는 분명한 ‘디딤돌’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이는 순전히 서구의 신학적 전통에서 자란 이들에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선한 빛을 던져준다.

우빠디야이는 순수 존재(pure Being)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아퀴나스주의자들의 개념과 브라흐만에 대한 베단타의 개념을 결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유신론적 논쟁의 효용성을 받아들였으며, 논리적으로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신론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모든 유신론자들을 위한 자연신학의 보편적 기초가 놓일 수 있으며, 후에 그 토대 위에서 기독교 신앙의 상부구조가 세워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는 베단타주의자들과 더불어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하나의 영원한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했다. 이 순수한 존재는 브라흐만과 동일시된다.

브라흐만은 존재 그 자체이다. 그는 홀로 그 자신의 존재와 동일하며, 피조물들은 존재의 권리가 없고, 단지 참여적이고 의존적인 실존을 가질 뿐이다. (Animananda, p.71)


그러나 브라흐만은 우빠디야이가 가혹하게 비판하는 합리주의자들의 단순한 추상적인 순수 존재(pure Being)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자기대화의 지고의 행복’ 안에 살고 있는 ‘신성 그 자체’이다. 이것이 베단타의 브라흐만이다. 하지만 우빠디야이는 스스로 완전하고 자기충족적인 브라흐만은 알 수 없거나 다가설 수 없는 분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1901년에 그의 친구 타고르에 의해 출판된 ‘나이베디야’(Naivedya)란 제목의 소네트(14행시) 모음에 대한 논평을 통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보여준다.

그 소네트의 요지는 무한자와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무한자는 쉽사리 접촉할 수 없기에 영적으로 덜 진보된 사람들은 잠정적으로 유한자를 무한자처럼 숭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무한자는 정말로 접촉할 수 없을까? 만일 그랬다면 이성은 불합리한 것일 수 있다. 무한자를 인식하는 것이 이성의 여명이다…. 

나이베디야에서 최고의 이상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관계들과 단절되어 있는 독존하시는 절대자를 보는 것이다. 이 하나님 안에서 고대 베단타의 니르람바 브라흐마즈난(Nirlamba Brahmajnan, 그분 자신 안에 존재하는 그분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어하는 열망을 모르는 이 누구인가? 사람들은 관계들을 통해서 그분을 ‘위대한 관계자’(the great Related One)로 알게 된다. 하지만 그분의 지고의 기쁨은 피조물들과의 관련성 가운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모든 다양성이 종합되어 합일되는 곳, 즉 그분의 한없는 광대하심과 더불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대화에서 비롯된다. (Animananda, p.101)

 

따라서 우빠디야이는 방향을 돌려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능한 한 가장 높은 힌두교의 신 개념, 즉 브라흐만이나 뻐르브라흐만(Parabrahman), 니르군 브라흐만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이보다 작은 어떤 존재, 즉 단순히 인격적인 신이나 이슈와르에서 멈추는 것은 기독교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가장 높은 신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도 브라흐마반답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면 인격신론의 사군 브라흐만이나 이슈와르를 위한 자리는 없는가? 우빠디야이는 이슈와르와 연결되는 어떤 것도 절대적인 최고의 존재보다 낮은 단계로 여긴다. 따라서 그는 사람에 의해 선택된 신, 즉 이쉬뜨 데브(ishta deva)를 숭배하는 대중 힌두교를 평가절하하면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신의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했던 라마크리슈나 같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차원의 종교적인 경험에만 도달한 것으로 간주한다.

신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인 그는 인간의 궁극적인 종말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을 넘어 ‘하나님의 본질을 직접 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참된 실재가 아닌 마야의 지배에 속해 있는 창조자 또는 세계를 형성하는 자(demiurge)로서의 이슈와르의 개념 속에는 실재가 있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분을 그분 자체로, 즉 니르군(nirguna)으로 알기 전까지는 궁극적인 평화를 찾거나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이에 미치지 못하는 단계에서 멈추는 헌신이나 신비적인 합일은 적절치 못하다.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없음’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도 단정할 수 없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기독교 베단타주의자들 역시 오로지 ‘아니, 아니’(neti, neti)라고만 말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브라흐마반답의 사치드아난드라는 용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 속에서 발견된다. 심지어 상까라는 니르군 브라흐만을 이 방식으로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용한 찬송가에서 이미 보았듯이, 사치드아난드에 대한 기독교 삼위일체적 설명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이해는 얼마나 더 풍부할까?

브라흐마반답은 사치드아난드와 삼위일체 사이에서 흥미로운 평행선을 그리는 힌두교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하나님 경험은 삼위일체이며, 여기서 그는 상까라에게서보다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성취된 베단타의 가르침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동포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 되심의 신비, 즉 브라흐만의 진정한 의미를 삼위일체적인 사치드아난드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 신비는 오로지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상까라는 진정으로 ‘연합 속의 삼위일체’(Trinity-in-Unity)의 한 부분을 이해했지만 사치드아난드의 진정한 의미는 기독교의 계시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가 마주해야 했던 결정적인 문제는 삼위일체의 제2위와 제3위의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독존하시는’(unrelated, nirguna) 하나님이 아들을 가질 수 있는가? ‘영원하신 출생’이란 전통적인 표현의 내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센이 그러했던 것처럼 씨트, 즉 지성(Thought)으로서의 브라흐만의 본성에서, 그리고 비록 하나님은 ‘어떤 것과도 관련되지 않은’ 분이시지만 ‘관계 안에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이해(self-knowledge)를 가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씨트-로고스의 기원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인식에서 발견된다.

주체와 객체라는 신적 자아의 차별성은 순수한 지식인 분리되지 않은 무한한 본질 외의 어떤 매개체도 제공할 수 없다 … 그것은 지식이며 하나님의 알려진 자아와 그의 알아가는 자아를 구별하는 지식 외에 무엇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신격 안에 지식의 반응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성 안에서 출생하신 그분은 스스로 아시며, 그 출생하신 자아로 돌아옴으로써 알려진다 … 하나님은 지식 안에서 상응하고 인정하는 자기형상을 재생산하시며, 이 이성의 대화로부터 무한한 기쁨으로 하나님의 품을 즐거워하는 ‘그분의 사랑의 영’으로 나아가신다.(The Twentieth Century, 1901, pp.116,117)


이 전체 구절의 분위기는 케샵 찬드라 센이 사용한 표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또한 우빠니샤드의 울림, 즉 찬도기야 우빠니샤드에 담긴 다자성의 기원에 대한 묘사를 체감할 수 있다.

태초에 이 세상은 순수의식(Being)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순수의식은 생각했다. “내가 여럿이라면 좋을 텐데! 나 자신을 태어나게 하자!”(6:2)


이는 또한 사치드아난드에 대한 깊이 있는 기독교적 해설이다. 우빠디야이는 사치드아난드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베단타의 가르침이 어디까지나 참되고 유익하다고 보면서도 이 가르침의 완성과 마침은 오직 계시에 의해 교회에 주어진 완전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교리는 힌두들에게 반드시 그들에게 친숙한 용어로 설명되어야 하며, 바로 이 설명의 과정에서 다른 전통의 빛으로부터 끌어온 개념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기독교 진리 그 자체의 내적인 의미들 위에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

3) 창조와 마야


창조의 문제,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 일자(the One)에 대한 다자(the many)의 문제는 어쩌면 인도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베단타의 마하바키야, 즉 핵심명제인 ‘따뜨 뜨왐 아시’(tat tvam asi)와 그것이 주장하는 ‘그대가 그것이다’(thou art That)는 하나님, 즉 브라흐만과 신자와의 동일성,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물과의 동일성을 상정한다. 라마누자의 인격주의 학파는 이 문제를 몸이 영혼에 관계하는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관계한다고 말함으로써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이들은 세상에 대해 확실한 실재성을 부여하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차인격적인 관계를 위한 길을 열어두고 있다.

그러나 힌두 사상의 주된 유형이자 오늘날 힌두 사상가들이 가장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유형은 브라흐만이 홀로 실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환상, 즉 마야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상까라(Sankara)의 사상이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브라흐만의 일부이며, 종교의 목적은 우리가 마야의 산물인 우리 자신의 무지(avidyā)를 제거하고 지식(jñāna)을 통해 브라흐만과의 진정한 동일성을 깨닫는 데에 이름으로써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우빠디야이는 초창기에 기독교 신학의 도구로서 상까라의 아드바이타(비이원론)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후에 그는 상까라의 체계가 그 정점에서, 최소한 대부분의 힌두들의 마음속에서 힌두 사상을 대표함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이 설립하려고 한 체계의 철학적 기초로 아드바이타를 사용해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창조의 문제였고, 마야에 대한 상까라의 가르침에 대해 새롭고 본래적인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대담하게 그 문제와 씨름하였다. 뵈트(Väth)와 다른 이들은 이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고 우빠디야이로 하여금 기독교 정통에서 멀리 벗어나게 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인도 기독교 신학을 위한 가장 독창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공헌으로서, 진지하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우빠디야이는 만일 힌두 철학이 기독교 신학을 건축함에 있어 ‘목재를 자르거나 물을 끌어오는 데’ 사용되었다면 가장 순수한 물과 가장 튼튼한 나무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며, 그 물과 나무는 다른 어떤 체계보다도 상까라의 체계 안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브라흐만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는가라는 질문에 상까라는 “마야에 의해서”라고 답한다. 우빠디야이는 “마야에 의해서 다음은?”이라고 질문하고, 이를 토마스주의 및 헤겔 철학의 개념과 연관하여 마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끌어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전통적인 베단타의 가르침은 하나님 또는 브라흐만은 싸트(Sat), 즉 존재(Being)이며, 세상에 있는 나머지 모든 것은 아싸트(asat), 즉 비존재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우빠디야이는 이제 이를 싸트로서의 하나님은 필수적인 존재인 반면, 피조물(asat)은 단지 무(nothingness)일 뿐이고, 오히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 존재할 필요가 없는 존재, 즉 무상한 존재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는 아싸트를 ‘존재하지만 존재할 권리가 없는; 무엇이었든 그리고 지금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 학문적인 언어로 무상한 존재(contingent being)’로 설명한다.

우빠디야이는 여기서 스콜라 신학과 일치시킬 수 있고, 아드바이타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도 있는, 최소한 이해 가능한 용어로서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을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비존재’(asat)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무’(nothing)이다. 창조의 과정은 존재(Sat)에 의해 야기되고, 비존재로부터 파생된 존재의 유출이다. 분명 무상한 존재가 비존재로부터 출현하는 과정, 그리고 우빠디야이가 마야에 대한 주석에서 자기 설명을 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약간의 추가적 설명은 필요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창조의 수동성’(creatio passiva), 즉 수동적인 창조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이는 브라흐만이 아닌 모든 것의 특질이며, 천사박사(아퀴나스)는 이를 ‘타자로부터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의 습성’으로 정의한다. … 베단타주의자들은 브라흐만이 아닌 모든 것은 환각이란 의미에서 마야라고 단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르치는 것처럼 스스로 브라흐만과 분리된 피조물들은 진정 어둠이요, 거짓이며 무(falsitas et nihil)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옳다. (Animananda, p.84)



여기서 마야는 단순한 환각보다 더 역동적인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이는 유한하고 피조된 세계가 실재하게 되는 신적인 권능이며, 이 세계는 실제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우빠디야이는 전통적 힌두교의 용어를 따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샥띠(shakti) 또는 능력이란 이름으로 마야의 성격을 규정한다.
 

마야는 … 다자를 생산하는 분신력(Shakti)이다 … 이는 영원하지만 이 능력의 작용은 하나님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마야에 의해 비존재(asat)는 존재(sat)가 된다. 마야에 의하여 그 자체로 무(nothingness)인 것이 존재의 풍성함으로 채워진다. 마야에 의하여 실재의 흐름으로 어둠은 밝아진다. 이것이 진실로 마야이다. (Animananda, p.84)


따라서 마야는 유한한 피조물을 존재 안으로 가져오는 신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대중적 의미에서 마야는 보다 일반적인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마야의 철자 아래에서 산다’고 말할 때의 맹목(blindness), 또는 환영(illusion)이 그것이다. 우빠디야이는 마야의 이런 측면에까지도 긍정적이고 기독교적인 내용을 부여하려고 한다. 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각 개인을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그의 진정한 자아 바깥에 있는 것처럼 투사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에 있어서 죄에 매인 상태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힘으로 살면서 그 자신에게로 돌이키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게 하는 것이 마야인데, 반면 인간의 마음을 안절부절못하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역시 바로 그 마야이다. 따라서 마야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인간을 창조한 다음 모든 인간이 만든 쾌락이 환각 또는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브(jiva, 아트만과 동일한 자아)가 자기 자신이나 어떤 유한한 일에 안주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에 따라 우빠디야이는 마야를 단순히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분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욕구를 일깨우는 하나님의 예비적인 은혜라는 의미로도 본다. 하지만 그는 마야를 어떤 특정 기독교적 개념과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상까라 철학에서 발견한 개념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아퀴나스의 무상한 존재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까이 이끌어 줄 방법으로 이를 해석하고자 한다. 마야를 창조의 수동성으로 보는 해석은 베단타 힌두들이 친숙하게 여기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독교의 창조교리를 재진술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그 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먼저 뵈트(Väth)는 우빠디야이가 상까라를 당대의 모든 힌두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상당히 다르게 억지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인 철학 개념들을 취하여 그것을 변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훌륭하고 건설적인 신학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는 실제로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러했듯이 그 개념들을 상당히 새로운 신학적 발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둘째로, 어쩌면 더 심각한 비판은 브라흐마반답이 단지 아퀴나스의 출발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오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독창성을 발휘하고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나면 사람들은 천사박사(아퀴나스)가 너무나 커 보이고, 성경은 너무나 작아 보일 것이다. 만일 그가 성경 안에서, 아니면 초기 4세기 동안의 분열되지 않은 교회 안에서 발견한 것들 가운데서라도 신앙의 유산을 자유롭게 취한 다음에 클레멘트나 오리겐이 했던 과업을 수행했더라면 얼마나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20세기 인도를 위해 아퀴나스가 13세기의 유럽에서 했던 일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느꼈고, 그 결과로 그가 이룬 업적이 축소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신인(God-Man)이며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브라흐마반답의 가르침을 소개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다시 한 번 그의 훌륭한 산스크리트어 찬송인 「성육신의 찬가」(the Hymns of the Incarnation) 중 하나를 인용하는 것이다. 
 

브라흐만의 초월적인 형상이시며,
가득히 넘쳐흐르는 영원한 지성 안에서
꽃이 피고 거울처럼 비취이시는 -
하나님이시며 신인(God-man)이신 그분께 찬송을!

순전한 동정녀의 어린 아이,
우주의 안내자, 존재 안에서 무한하신 분
하지만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관계로 존재하시는 -
하나님이시며 신인이신 그분께 찬송을!

성인들과 현인들의 모임에서
광채를 발하시는 분, 두려움의 파괴자요,
악한 영들을 응징하시는 -
하나님이시며 신인이신 그분께 영광을!

다른 이들을 위해 생명을 부어주시며
영혼과 육체의 연약함을 쫓아내시는 분
그가 하신 일들은 거룩하시니 -
하나님이시며 신인이신 그분께 영광을!

자기 생명을 희생 제물로 주신 제사장이요,
고통의 한 복판에서 자기 영혼을 내어주신 분.
죄악의 독을 파괴하신 분 -
하나님이시며 신인이신 그분께 영광을!

부드럽고 사랑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마음을 달래시며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
흉포한 죽음의 정복자이신 -
하나님이시며 신인이신 그분께 영광을!


여기서 한 번 더 주로 힌두 용어로 나타난 함축된 신학의 기독교적 정통성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브라흐만)이며, 그분 안에 신성으로 충만한 영원하신 말씀(지성, Cit)이 거하신다. 후렴구에서 승리(jai) 또는 영광(glory)은 진정한 ‘나라-하리’(Nara-Hari, 신인)이신 그분께 귀속된다. 그분은 무한하시며, 우주를 보존하시며,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다. 그분은 존재 안에서 무한하심에도 불구하고(nirguna), 관계로 존재하시며(saguna), 인격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과 도덕성 사이의 필수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그가 하신 일들은 거룩하시니’라는 구절은 어쩌면 크리슈나의 행위와의 하나의 함축적인 대비일 것이다. 그분은 다른 이들을 위해 영혼의 고통 가운데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면서 자기 생명을 쏟아내신다. 여기서 그분은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희생양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독을 마신 시바 종파의 시바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말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두려움을 파괴하며 악의 영인 사단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그 쓴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심으로써 죄의 독을 파하셨는지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오로지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된다. - ‘부드럽고 사랑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마음을 달래주시는 분’

우빠디야이는 성서적이고 인도의 개념과 이미지가 풍부한 시어들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술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가 더 근접한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한다면 아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흥미로 가득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 즉 ‘브라흐만의 초월적인 형상’일 뿐 아니라 ‘순전한 동정녀의 어린 아이’라는 확신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한 분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이 두 가지 본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에게 ‘나라-하리’ 또는 ‘신인’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이 단어의 두 번째 요소인 ‘하리’(Hari)는 실제로 비슈누 신에게 사용된 고유명사이며, 그 이유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브라흐마반답이 이 단어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예외로 취급했다. 하지만 실제로 간디가 불가촉민들에게 하리잔(Harijan, 신의 자식들)이란 단어를 사용했듯이 이 단어는 힌두사회에서 단순하게 신(God)의 동의어로 사용되며, 브라흐마반답이 그런 의미에서 ‘하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는 성육신에 대한 찬송 후렴구인 ‘하나님이시며 신인이신 그분께 영광을’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또한 우빠디야이는 스스로 필명을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헌신을 가리키는 ‘나라하리 다스’(Narahari Das, 신인의 종)로 사용한다.

동시에 우빠디야이는 그리스도를 신적인 지혜, 즉 사치드아난드의 씨트로 여김으로써 케샵 찬드라 센의 뒤를 따르고 있으며, 그의 간행물 제목인 소피아(Sophia)는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반영한다. 그는 캘커타에 있는 자신의 학교 학생들을 위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싸트-씨트-아난드이시다. 그분의 모든 면이 경배를 받아야 하지만 학생으로서 우리가 그분을 경배할 때 씨트, 지성, 지식, 지혜의 측면을 예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 힌두들은 세계의 베일을 뚫고 혼돈(Chaos)에 질서(Kosmos)를 명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 (Animananda, p.121)


우리는 그가 ‘측면’(aspect)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단순히 신격의 한 ‘양태’(mode)임을 암시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소피아는 신격의 한 측면 그 이상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해서 죽으신 성자이시다.(Animananda, p.132.)


우빠디야이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어떻게 한 위격 속에 결합되어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도의 심리학 속으로 들어가 매우 흥미로운 여담을 남긴다. 그의 최종적인 결론은 케샵 찬드라 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논쟁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다.

베단타 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육체, 목숨, 정신, 지성, 지복이라는 다섯 계층의 몸(꼬쉬, kosha)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이 다섯 개의 몸은 그 자신을 인식하는 개별자아(ahampratyayi)의 지배를 받는다. 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개인(지브-차이따냐)은 그러나 지고의 이성(꾸따스타-차이따냐)을 반영하는 섬광이다. 이 지고의 이성은 생명과 빛의 최고의 근원으로 각 사람 안에 내주한다. 시대별로 성육신하는 신 또한 다섯 개의 코쉬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성육신하는 신은 오직 로고스의 인격 그 자신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을 뿐 어떤 창조된 인격성(aham)으로부터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 신적 이성에 의해 생기를 얻고 밝혀진 그 다섯 계층의 몸과 그 개별적인 작인(作因)이 … 인간을 만든다. 그러나 신인 안에서 다섯 덮개들은 로고스-하나님(Logos-God)에 의해 직접 행위 할 뿐 어떤 개별성을 가진 매개체를 통해서도 행위 하지 않는다. (The Twentieth Century, 1901, p.7)


우빠디야이는 여기서 자신이 가톨릭 정통이라고 이해하는 것들의 자리를 베단타의 용어로 재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 해결책이 초기 교회가 이단이라고 주장했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의 그것에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그리스 심리학을 사용하는 것처럼 타당성을 주장하기에 충분한 이 접근 방법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나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과 같이 정통 칼케돈 신조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단성론과 양태론 모두를 피하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후자로 기울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 렐튼(H. M. Relton)의 말처럼 그는 아마도 자신이 이 두 신학자들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신인의 인성은 태초부터 신성과 분리될 수 없게 연합되었으며, 그 연합 덕분에 로고스-인격으로부터 그 인격성과 더불어 그 완전함을 얻게 되었다. (H. M. Relton, A Study in Christology, p.90)


그러나 그의 진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고대든 현대든 서구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신과 인간 그리스도의 상호 관계에 대해 명료하게 기술했다는 사실에 있다.

5) 아브따르인가, 성육신인가?


힌두교의 인격신적 요소, 특히 비슈누 전통에서는 하나님, 즉 이슈와르가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낄 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의 아브따르로 지상에 내려온다고 주장한다. 아브따르라는 단어는 그 어근이 ‘내려온다’는 의미에서 온 것이다. 비슈누 전통에 따르면 비슈누는 자신의 개입이 필요할 때 람이나 크리슈나처럼 하나의 아브따르로 내려온다. 아브따르 교리에 대한 고전적 진술은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오, 아르주나여, 법이 쇠퇴하고 무법이 발생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성육신한다오. 선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해, 그리고 법을 세우기 위해 나는 시대를 뛰어넘어 태어난다오. (Gita IV, 7:8)


여기서 기독교 신학자들이 아브따르라는 단어를 성육신의 동의어로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대체해야 하는지에 대해 즉각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에 대해 인도 신학자들이 서로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 브라흐마 사마즈 전통에 서 있는 케샵 찬드라 센은 이를 단호하게 ‘기독교 아브따르주의의 거짓말’이라고 부르며 예수를 아브따르로 언급하는 관습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우빠디야이는 상까라의 입장에서 유사하게 그리스도에 대해 아브따르라는 단어사용에 반대한다. 오직 하나의 성육신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그 분 안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신 하나님 자신, 즉 지고의 뻐르브라흐만이 성육신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하나님의 유일한 성육신으로 자리매김한 우빠디야이는 자신의 후기 저술에서 다소 놀라울 만큼 계속하여 크리슈나를 그리스도만 차지해야 하는 자리인 브라흐만의 성육신이 아닌 비슈누의 아브따르로 주장하는 데 대해 어느 정도 타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명백히 이상한 전개로서 파쿼(J. N. Farquhar)는 이에 대해 우빠디야이를 비판하였고, 그 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글을 읽지도 않은 채 그를 정죄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 그는 이런 식으로 크리슈나를 이기고 싶어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먼저, 자기 조국과 모든 종교-문화적 유산이 서구에 의해 지워지고 있다고 느낀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로서 우빠디야이는 자신이 초창기에 거부했던 많은 신념과 관습들을 방어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고 느꼈다. 둘째로, 그는 자기 관점이 힌두종교 및 문화와 분리될 가능성과 궁극적으로 힌두교의 종교 내용을 세속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보호되는 한에서는 힌두 신들에게 존경이나 숭배를 표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힌두교의 인격적인 신들을 향한 태도로 인해 우빠디야이는 그 신들을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여기거나 아니면 그들을 도덕적으로 해석해야 했으며, 또는 그 두 가지를 다 해야 했다. 따라서 그는 크리슈나의 역사적 실재를 옹호하면서, 바가바드기타의 고상한 가르침 때문에 그를 위대한 도덕적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뿌라나의 비도덕적인 이야기들은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우빠디야이의 입장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논리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힌두교는 그냥 가볍게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소중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의 동포들 중 어떤 이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면 이는 정화되어야 하며, 그는 동포들을 도와 그것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마가톨릭 교도로서 그는 자연신학을 믿으며, 힌두교가 최고의 합리적인 철학으로서 그 자연신학을 대표한다고 믿는다. 그는 실제로 힌두교를 서구의 그것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가진 자연신학이라고 믿으며, 힌두교의 사치드아난드 교리 안에서 단순히 존재하실 뿐 아니라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신학이라고 믿는다.

그 자연신학의 프레임 안에서 크리슈나는 그 자체로 지고의 비인격적인 브라흐만의 인격적인 현현인 비슈누의 성육신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크리슈나는 여러 번 신성이 제거되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나타나며, 그것과 분리되어서는 어떤 존재도 갖지 않는다. 다른 말로 그는 마야의 지배에 속하는 무상한 존재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기에 마야 너머에 계시며, 삼위일체의 영원한 대화 속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또한 인간 예수로 역사 속에 출현하시지만 그 인성은 영원히 하나님 안에 있다. 따라서 아브따르 크리슈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우빠디야이는 다소 거칠지만 생생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는 태양과 같으시며, 크리슈나는 … 물기를 머금은 공!’이라고 말한다.

우빠디야이가 힌두 유신론, 즉 아드바이타와 인격적인 유신론 양자에 그 자체의 영역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힌두들이 지녀온 종교적 경험의 실재가 부정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힌두교는 단지 그에게 있어 더 궁극적인 것으로 가는 여정의 한 무대일 뿐이며, 마지막 단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6) 인도의 교회


그리스도인으로서 브라흐마반답은 초창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시에 순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는 가톨릭 당국과 많은 갈등을 겪었으며, 한번은 자신의 출판사로 하여금 교회 당국자들에 대항하는 소송을 제기하도록 부추긴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인도 기독교인들과 달리 그는 말년에 정치 활동에 깊이 개입했기 때문에 교회에 불규칙적으로 참석하긴 했지만, 가시적인 제도권 교회, 그리고 정기적인 말씀과 성례전의 필요를 기꺼이 인정했다.

그는 교회의 종부성사를 받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은 힌두 친구들에 의해 화장되었다. 하지만 일간신문 산디야(Sandhyā)에 게재된 그의 부고는 그를 기독교인이라고 분명하게 소개했고, 아니마난드(Ānimānanda) 등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단지 기독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신실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소원했다는 데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저작 어디에서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의, 심지어는 그가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교도권’(magisterium)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가 인도에서 기독교 신앙의 서구적 올가미로 간주한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으며, 이에 대해 자주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우리 동포들로 하여금 우주의 본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 것은 주로 가톨릭 신앙이라는 외국의 옷이다. 가톨릭주의는 인도에 유럽의 복식을 입혀주었다. 우리 힌두형제들이 우리 신성한 종교가 지닌 섬세함과 고결함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럽식으로 단단하게 코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 가난이 어떻게 부츠, 바지와 모자, 숟가락과 포크, 고기와 포도주 등과 양립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 인도 가톨릭교회가 힌두의 복식을 입는다면 … 우리 동포들은 교회가 조국의 인종적 특징에 적응하기 위해 몸을 굽힘으로써 인간을 보편적 진리의 나라로 끌어올린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Animananda, p.74이하)



그는 한 사람이 힌두교도와 기독교도가 동시에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점점 더 그가 힌두교를 특정 종교보다는 민족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세속화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1898년 7월에 「소피아」(Sophia)에 기고한 ‘우리는 힌두인가?’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힌두이며 죽을 때까지 힌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례전적인 중생 덕분에 재생한 자(dvija, twice-born)로서 우리는 가톨릭이며, 모든 세대와 풍토를 아울러 쇠하지 않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우리의 사고와 생각은 절대적으로 힌두이다. 우리는 현실적이기보다는 사색적이며, 분석하기보다는 종합하려고 하고, 활동적이기보다는 명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고대 그리스인이나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 같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극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 고대 국가의 철학적인 주형 가운데 형성되어 있다. (Animananda, op. cit., p.71)


이를 계기로 그는 ‘힌두-가톨릭 사냐시’(Hindu-Catholic sannyāsis)라는 자신의 수도회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물론 자기 이전에 드 노빌리(De Nobili)라는 모범을 갖고 있었고, 자신 역시도 곧 그 뒤를 따르게 될 순다르 싱이나 다른 이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교회의 지원이 부족하여 자발뿌르에 있던 수도원을 포기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샤프론 가운을 끝까지 고수하였고, 정치적인 반역죄로 법정에 출두해야 할 때만 그 복식을 벗었는데, 이는 그 ‘자유의 복식’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힌두 금욕주의자들이 생활하고 힌두 수도승들이 설교하는 기독교를 보기 전까지는 쉴 수 없다. 동양적인 제의를 입고 출발하는 가톨릭 신앙의 아름다움을 보기까지 말이다. (Animananda, p.78)



브라흐마반답은 이런 사고방식에 있어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으며, 그런 생각들은 오늘날에야 지지자를 얻고 실천에 옮겨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적인 복식의 문제와 생활방식, 그리고 특히 기독교 신앙의 표현을 위해 힌두의 사고방식들을 사용하려는 광범위한 노력 등에 있어서 그는 특출한 개척자였다. 아니마난드는 그를 ‘그리스도께 이르는 자신의 길을 발견한 가장 위대한 인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을 찾은 그는 필사적으로 그리스도가 가장 높은 분이심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즈냐나 마르그를 따르는 어떤 이도 그에게 ‘당신은 기독교가 좋겠지만 브라흐만에 대한 나의 믿음은 더 높다. 브라흐만은 인격적인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씨트로서의 그리스도를 브라흐만에서 볼 수 있으며, 인간의 숭배를 받는 궁극적인 대상이자 인간의 사색의 궁극적인 대상은 삼위일체, 즉 싸트, 씨트, 아난드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그렇게 명료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신인, 즉 나라-하리(Nara-Hari)로서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적인 헌신과 결합시켰다는 점은 기독교와 힌두교의 대립의 와중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그는 증발하는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까라차리야의 베단타 안에서 가톨릭 신앙의 반짝이는 메시지를 통해 철학과 신학,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종합을 시도했다.


그는 ‘개념들을 증발시키지’ 않고, 그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만일 싸트, 씨트, 아난드가 이성이나 계시가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라면, 그래서 그곳에 홀로 존재하되 어떤 낮은 단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야 하고 숭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

 

** 본 게시물은 필자가 번역한 <인도기독교사상>(CLC, 2020)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으로서 전체를 옮기거나, 정당한 인용표시 또는 출처표기 없이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저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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