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10> 인도의 컵에 담긴 생명의 물 - 사두 순다르 싱 ①

2021. 2. 1. 20:52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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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연재에서 우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 초반에 걸쳐 인도에서 성취신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그에 대한 반응과 평가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그들과 동일한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여러 측면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적인 발전의 외부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바로 썬다 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금까지 살았던 인도의 기독교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히는 사두 순다르 싱(Sādhu Sundar Singh, 1889-1929)이다.

사실 우리는 순다르 싱을 전문적인 신학자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저작물과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서들은 신학, 특히 인도의 신학으로 가득 차 있고, 이점에서 그는 그 업적에 있어 우리가 살피고 있는 가장 위대한 이들 중 하나로 여겨져 마땅하다. 그가 공식적으로 받은 신학훈련은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매료되었고, 본능적으로 신학적 사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어쩌면 영감을 받은 인물이었다. 아빠사미와 같은 선도적인 신학자들 뿐 아니라 인도 기독교 세계에 속한 모든 이들의 삶에 끼친 그의 영향이 너무 컸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순다르 싱의 유년기와 회심과정


순다르 싱은 1889년에 인도 빠띠얄라(Patiala)주의 람뿌르(Rampur)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시크교도였지만 훌륭한 사랑과 헌신의 여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시크교 가르침과 더불어 힌두교의 박띠 전통(bhakti Tradition) 속에서 훈련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가슴으로 바가바드기타를 배웠다

어머니의 사랑과 본보기, 그리고 어린 시절에 받은 박띠적인 헌신 훈련은 그의 삶의 모든 부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어머니가 결코 기독교인이 된 적은 없지만 순다르 싱은 언제나 자신이 어머니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적 본성을 가진 어머니의 영혼(anima naturaliter Christiana)이 천국에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소년 순다르 싱은 미션스쿨에서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지만 이를 극렬히 거부했다. 그는 성경의 복사본을 불태우기까지 했고, 엄격한 시크교도인 아버지마저 그의 그런 행동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 기타와 우빠니샤드, 그리고 심지어 꾸란에 대해 공부하고 요가의 기술을 연마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안식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던 어느 날 밤, 그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다음 날 아침 철로 위에 누워 자살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른 새벽, 순다르 싱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움에 빛나는 예수의 환상을 보게 되었고, 그 환상 속의 예수는 그를 향해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예수께 엎드렸다. 그리고 즉시 그의 마음은 놀라운 평화를 맛보게 되었는데, 그 평화는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 땅에서 천국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는 1904년 12월 18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추가적인 교육을 받은 그는 1905년 9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늘 언젠가 순다르 싱이 사두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열여섯 살이 된 그는 마침내 사두가 됐다. 그러나 그가 황토색 사두의 가운을 입은 것은 시크교도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였다.

유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두의 삶


순다르 싱은 초창기 유랑생활의 와중에서 젊은 미국인 스트록스(S. F. Strokes)를 만나게 된다. 스트록스는 성 프란시스의 삶을 인도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수도자였다. 그들은 한 동안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순다르 싱은 스트록스로부터 성 프란시스와 그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1909년에 순다르 싱은 선교사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펀잡주 라호르에 있는 성 요한신학교(St. John’s Divinity School)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구적인 삶은 그에게 맞지 않았고 그는 학문적인 신학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 1910년에 그는 라호르 교구의 설교자 자격증을 가지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주교의 말에 복종하여 성공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로부터 설교자로 초청받았을 때 기꺼이 부름에 응했다.

그때부터 순다르 싱은 인도 전역은 물론 티베트에 이르는 유랑전도자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항상 휴대하고 다녔던 유일한 책인 신약성경으로부터 자신의 영적인 삶에 풍성한 자양분을 공급받았으며, 자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신비적인 체험을 가졌다. 예를 들면, 그가 티베트에서 죽은 시신으로 가득한 마른 우물에 던져졌을 때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인간적인 행위가 없이 구원받은 일, 그리고 300년을 살았다고 알려진 히말라야의 기독교인 리시(rishi, 현자)와의 만남 등과 같은 많은 신비적인 사건들이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지자 일부 사람들은 순다르 싱을 사기꾼으로 여기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실한 단순성을 소유한 진정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고는 그의 저작물들과 그의 삶을 연구하기가 어렵다.

순다르 싱은 1920년에 영국과 미국, 호주를 방문했으며, 1922년에는 몇몇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여 모든 곳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당시 서구인들은 인도에서 온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케샵 찬드라 센(Keshab Chandra Sen),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에 대한 기억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베단타를 통해 인도가 서구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선포했다.

순다르 싱은 그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인도적이었고, 철저하게 인도적인 방식으로 심오한 종교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지만 그 메시지에 담긴 내용만큼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곧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고, 그가 방문한 모든 나라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왔다.

순다르 싱의 설교는 영향력이 있었으며, 그는 비기독교인들은 물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와 대화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믿음이 깊어짐을 느꼈다. 그는 인상적인 외모와 함께 감성이 풍부한 이야기, 그리고 단순하고 생생한 표현으로 일반 청중들을 매료시켰으며, 신학자들은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정신적인 경험과 영적인 경험을 간직한 그로부터 복음에 대한 인도적인 해석을 듣고 싶어 했다.

인도에 돌아온 후 그는 인도와 티베트로의 유랑 여행을 재개했고, 이때까지 그는 8권의 소책자를 저술하였는데, 그 중 첫 번째 작품인 『스승의 발아래서』(At the Master’s Feet)가 1922년에 출판됐다. 외국 선교사들에 대하여 문을 닫아걸었던 티베트는 그를 매료시켰으나, 그곳에서 그와 교제했던 이들은 그리스도인 순교자로서 죽어가야 했다. 그들 중 한 순교자의 죽음은 그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순다르 싱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1929년, 그는 건강이 약해진 가운데 티베트로 여행을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아마도 순교자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순다르 싱은 마지막까지 자기 스승의 뒤를 따랐다.
 

순다르 싱의 영적 체험의 본질


순다르 싱의 신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하고 명확한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듯이, 순다르 싱에 있어 그의 영적인 삶은 바울의 삶처럼 기도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통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베단타주의자들뿐 아니라 박띠 전통에 속하는 수많은 힌두교의 박따들(bhaktas)과 달리 그의 기도는 단순히 절대자 안으로의 자기몰입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대화, 곧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실천’이며, 이 과정에서 자신과 인격적인 그리스도 사이의 구별은 뚜렷하게 유지된다. 순다르 싱에게 있어서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지만 이는 신성 안에 흡수되는 연합이라기보다는 반드시 두 자유로운 인격들의 연합이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과 달라야 한다. 만일 맛을 볼 때 이것과 저것 사이에 맛의 차이가 없다면 혀는 단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 - F. Heiler, The Gospel of Sundar Singh (1927), p.247.


많은 힌두 신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연합의 경험은 때때로 그에게 황홀한 경험이었고, 그는 자신의 저서 『영적 세계의 비전들』에서 이러한 황홀한 순간들에 대한 묘사를 남겼다. 그는 일생 동안 이 황홀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을 한 달에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자주 경험했고, 그것은 보통 한두 시간 정도 지속됐다. 이러한 황홀경은 잠자는 상태일 때가 아니라 깨어있을 때 찾아왔다. 그 경험들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을 때 사두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 속에 진주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려면 당신은 바닥까지 들어가야 한다. 황홀경은 영적인 것들의 바닥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무아지경이 아니라 잠수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잠수부가 숨을 멈추어야 하듯이 황홀경 속에서 외부의 감각들은 반드시 멈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 B. H. Streeter and A. J. Appasamy, The Sadhu (1921), p.132.


고통은 사두의 종교적 경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생활은 사심이 전혀 없었고 심한 고난을 자주 겪었지만, 그의 금욕주의는 그가 거부했던 하타 요가(hatha yoga)의 엄격한 금욕주의가 아니었다. 순다르 싱의 목표는 오히려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었고, 고통의 기쁨, 기독교적인 방식의 평화,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지상의 천국’으로 자주 이야기한다. 그는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엉덩이를 때려 울게 함으로써 호흡을 시작하게 하는 한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고통의 본질을 생생하게 예시해 준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하여 사랑 안에서 우리를 매질하신다.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다 … 그 십자가는 십자가를 진 자들을 천국까지,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실제적인 현존 속으로 데려 갈 것이다. - Heiler, 위의 책, p.117f.


그리고 다시, 일람(Ilam)에서 죽음의 우물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후 그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나의 감옥을 축복의 천국으로 바꾸어 놓았다”라고 고백했다.

순다르 싱이 체험한 많은 환상들의 배경과 내용은 성경에서 비롯됐다. 센과 그의 가르침(adesha)처럼, 그가 자신의 환상 경험들, 즉 직접적인 황홀한 직감이나 직접적인 인식(쁘러띠악샤, pratyaksha)을 성경과 동일한 평면에 놓았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아빠사미(A. J. Appasamy)의 증언을 고려해야 한다. 아빠사미는 순다르 싱의 직접적인 인식(pratyaksha)조차도 성경에 굴복해야 하며, 그것이 성경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일차적인 표준 또는 쁘라만(pramāna, 증거)이었다. 그리고 인도의 아주 많은 이들처럼 그는 사도 요한의 복음서를 선호했지만, 이 선호가 어떤 특별한 철학적 유사성으로 말미암은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보다 단순하다. “사도 요한은 내게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더 그리스도께 사랑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순다르 싱의 가르침의 방법


순다르 싱이 가르치는 방법은 그의 스승이 사용했던 방법, 즉 비유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상의 삶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우빠니샤드를 포함한 자신이 읽어 온 책으로부터, 때로는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으로부터 예화를 이끌어 낸다. 죄더블롬(Söderblom)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두에게 하나의 비유는 하나의 그림 또는 갑자기 떠오른 영감 그 이상이다. 그의 비유들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믿음의 기사들로 저장되어 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상상력을 제어하는 가운데 발견한 그림들은 그의 신학이다.  - Heiler, 위의 책, p.135.


순다르 싱은 논리적으로 부합되는 도식화된 신학을 구성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실제로 ‘머리’보다는 ‘가슴’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가 여기서 공인된 인도식 추론형태, 즉 분리된 지식의 기초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몇몇 학파들이 사용하는 유비(analogy), 즉 우쁘만(upamāna)을 따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라마끄리슈나를 비롯한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해 왔다. 순다르 싱에게 교리적인 질문을 던질 경우, 그는 면밀하게 논증된 근거에 따라 답하기보다는 그 문제에 즉각적인 빛을 던져주는 생생한 비유(parable)나 유비(analogy)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죄의식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이다. 이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위험하다. 한번은 수틀레지(Sutlej)강에서 목욕할 때 나는 깊은 물속으로 잠수했다. 내 머리 위로는 수천 톤의 물이 있었지만 나는 그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강둑으로 나와서 나는 물로 가득한 단지 하나를 들어 올렸는데 정말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물속에 있는 한 나는 그 물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서 살고 있는 한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 Streeter and Appasamy, 위의 책, p. 166.


이 글처럼 때때로 그의 ‘유비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단순한 사례들이었다. 어느 때는 이 유비들이 자신이 황홀경에서 본 환상들에 기초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신비적인 방법으로 그 상황에 필요한 대답이 주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논리적인 추론의 절차를 통하지 않고도 적절한 유비가 자신의 입술에 다가오는 것으로 보였고, 그는 청중들에게 이성적인 논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사두의 가르침은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체계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그 자신의 인격이 내적인 합일에 도달한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신약성경을 명상한 후에 나온 자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 대부분이 이처럼 비유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가 신학적인 논문을 쓰지 않았고 실제로 교의신학의 체계화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다르 싱의 가르침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가 여러 주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 주제별로 정리하여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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