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11> 인도의 컵에 담긴 생명의 물 – 사두 순다르 싱 ②

2021. 2. 11. 07:58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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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순다르 싱(썬다 싱)의 생애와 그의 영적인 체험, 그리고 가르침의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어서 그의 가르침에 담긴 사상적 측면을 몇 가지 주제에 따라서 고찰해 볼 것이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필자가 번역한 로빈 보이드 박사의 책, 「인도기독교사상」의 내용을 발췌하여 재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순다르 싱의 사상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의 신학은 어떤 유신론적 사고체계로부터가 아니라 그가 경험한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순다르 싱이 설명한 황홀경의 환상들 중 하나에서 우리는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처음 천국에 들어갔을 때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그들이 내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지상에서보다도 더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무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도 오직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빛나는 물결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물결은 평화를 가져다주며, 마치 무더운 날씨에 물이 나무에 원기를 북돋아 주듯이 성도들과 천사들 사이를 흐르면서 모든 곳에 신선함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물결이 성령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B. H. Streeter and A. J. Appasaamy, The Sadhu (1921), p.54)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오로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내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다. 순다르 싱은 때때로 아브따르(아바타)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성육신의 개념을 완전히 수용하면서 이를 생동감 있게 예증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살피고 돕기 위해 이름을 알리지 않은 채 백성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임금과 같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았고 여전히 그분을 보고 있지만, 그분의 신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예화는 우유가 담긴 붉은색 유리병을 본 농부이야기다. 농부는 겉으로 보이는 붉은색 때문에 그 병에 담겨있는 것이 우유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앙과 직접적인 경험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앙은 마음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자라간다.”

세 번째 토속적인 예화는 북인도 어느 지역에서 공기로 부풀린 염소 가죽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에서 가져온 이야기이다. 사람은 공기 위에서 건너간다. 그러나 공기가 가죽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는 한 그 공기는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야 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강을 건너 천국에 이르기 원하는 이들을 운반하실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책, p.57)



우리는 그가 경험한 환상들 중 하나를 무척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는 문장에서 순다르 싱의 사고가 지닌 근본적인 그리스도 중심성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어느 정도는 라마누자의 ‘육체와 영혼’의 유비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또한 창조의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 구절은 사두가 경험한 환상으로부터 오는 통찰의 전형이기 때문에 그 내용 전체를 인용하고자 한다.

또 다른 기회에 나는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존재는 모든 것의 배후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으면 우리는 따뜻함을 느낍니다. 이는 그 옷이 감싸고 있는 몸이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옷 자체는 열이 없고 열은 그 안에 있는 몸에서 나옵니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 속에 있는 생명은 그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파생됩니다. 피조물의 생명은 그 생명의 공여자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몸은 단지 우리가 입는 옷에 가려져 있지만 그 옷의 형태와 열기가 몸 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모든 채소와 동물들은 생명의 공여자가 지지하는 외형적 형태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빛과 사랑의 물결을 보았습니다. 그분 안에는 육화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이 물결은 영적 생명을 부여해 줍니다. 또한 이 생명과 사랑의 물결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모든 종류의 살아있는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합니다. 재료나 움직임은 생명을 산출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생명입니다.
나는 내가 본 빛의 물결이 성령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마다 마치 달이 머리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물결과 함께 여기에, 저기에, 모든 곳에 보였습니다. 나는 영화로운 몸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내 곁에 계시네, 그분이 내 곁에 계시네.”
(위의 책, p.131 ff)



창조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순다르 싱은 자연스럽게 창조된 물질을 환각으로 보기보다는 실제적이고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힌두교의 마야의 관점과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 따라서 순다르 싱은 자신의 친구 스톡스가 소개해 주고 스스로 자주 언급했던 성 프란시스처럼 자연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랑은 자연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때문이었다. 자연신학은 성경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들에게만 그 메시지를 전한다.


거듭난 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과 자연의 언어는 그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솔직한 반면에, 자연의 책에 담긴 메시지는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판독해야만 합니다. (위의 책, p.134)


 

죄와 까르마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죄인이다. 그리고 하나의 죄, 가장 작은 죄, 심지어 악한 생각도 우리를 천국의 바깥에 세워두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죄인이지만,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벽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다. 천국에서의 경험을 묘사하는 다른 그의 환상들 속에서 사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서 내가 보는 모든 영의 얼굴은 그리스도처럼 보였지만 그보다는 열등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마치 태양의 형상이 여러 개의 물 항아리에 비슷하게 반영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형상은 참되지만,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불완전하게 찍혀있을 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분처럼 인식하게 되는 느낌을 설명해 줍니다. 이 느낌은 천국에 처음 들어갈 때 모두가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의 본래적인 연결을 보여줍니다. 모든 죄인은 자신 안에 자신의 거룩한 창조자의 상처입은 형상을 가지고 있기 에 회심할 때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합니다. (위의 책, p.124)


 

하지만 그 타락한 형상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다룰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죄에 대한 순다르 싱의 가르침은 놀랄 만큼 흥미롭고 본래적인데, 이는 그가 힌두교의 까르마(karma) 교리의 많은 특징들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윤회법칙(samsara)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윤회교리는 인간은 이전 존재들 가운데서 행한 일의 결과를 받기 위해 반복하여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순다르 싱은 죄의 무게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죄를 악의 능동적이 원리로 보기보다는 선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한다.


죄는 독립된 실재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것이 창조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이는 단지 마음의 상태나 기질에 대한 명칭입니다 … 사탄은 오로지 이미 창조된 것들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뿐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 따라서 죄나 악은 독립된 실재를 갖지 않습니다. 이는 단순히 선의 부재이거나 부정일뿐입니다. (F. Heiler, The Gospel of Sundar Singh (1927), p.164.)


 

이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전적으로 타당한 설명이지만 그러나 순다르 싱이 죄의 권세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죄의 효력에 관해서, 그리고 형벌에 관해서 그는 죄가 까르마와 같이 그 자체의 효력들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죄이며,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죽습니다 …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으십니다.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죄입니다. (Sundar Singh, At the Master’s Feet, p.16.)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물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죄는 까르마라고도 부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과정 가운데 내적인 변화와 인간 성품의 완고함, 그리고 전 인격의 타락을 통해 스스로 징벌을 가져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스스로 이용하지 않는 한, 우리의 죄악된 행위의 결과인 이 까르마는 우리를 지옥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

스트리터(Streeter)와 아빠사미(Appasamy)는 죄에 대한 이 관점의 배후에 감추어진 두 가지 영향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 특히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두의 열정적인 이해이며, 다른 하나는 힌두 개념인 까르마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순다르 싱은 징벌을 만드는 이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을 ‘내적 변화의 결과, 성격에 타고난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까르마는 이를 ‘주로 외부 환경에 의존한다’고 표현한다.

까르마의 교리에 따르면 용서의 가능성은 없으며, 모든 고통은 형벌, 즉 현생 또는 전생에서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순다르 싱은 고통은 반드시 형벌이 된다는 이 관점을 거부한다. 그는 강풍에 밀려 자신의 무릎 사이로 떨어진 한 마리 작은 새가 어떻게 매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진술을 예증한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고통의 강한 바람이 우리를 하나님의 무릎 사이로 몰아간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징벌적 고통과 영원한 형벌이라는 사상을 부인함에 있어서 순다르 싱은 느헤미야 고레의 엄격한 가르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사실상 그는 까르마와 유사한 징벌의 자동적인 과정과 하나님의 사랑을 분리한다. 세상에는 실제로 고통이 존재하며 때로는 이것이 죄에 대한 형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형벌을 창시하신 것이 아니며, 그분의 유일한 바람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하나의 ‘치료약’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배우기 위한 기회로 인식될 때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순다르 싱은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극과 고통을 통해서 진주를 생산해 내는 진주조개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영적인 삶에 있어 고통과 시련이 없이는 ‘참된 진주’를 얻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사역


인도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순다르 싱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보다는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에 대해 더 집중한다. 오히려 그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 특히 그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적인 사랑에 주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은이나 금도, 다이아몬드나 어떤 다른 보석도 영혼에 생명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과 더불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을 넘겨주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반드시 영혼을 넘겨주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 자신의 생명을 세상의 구속을 위해 내어주신 이유입니다. (Heiler, 위의 책, p.150.)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치환 이론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는 특정한 사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기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많은 비유들을 통해서 더욱 정교하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두 마을 사이에 길을 연결하기 위해 산 아래로 터널을 파다가 목숨을 바친 사람의 이야기, 심하게 다친 아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수혈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죽어가는 아버지 이야기, 둥지를 튼 나무가 불에 탈 때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둥지로부터 탈출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어린 새끼들과 함께 불타 죽은 어미새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순다르 싱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설명하는 다수의 ‘그림’을 이어 붙여 동시에 들고 있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 얻을 가능성이 없다면, 까르마 마르그는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종교는 “선한 일을 하라, 그러면 너도 선해질 것이라”라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러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순다르 싱은 우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기어 나올 수 없기에 결국 위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밧줄을 던져줘야만 하는 예화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단순한 도덕적 영향만으로는 우리를 돕는 데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히려 산 아래로 터널을 파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어떤 일을 성취하는 하나의 ‘사역’이거나, 생명을 나누어주는 수혈(blood-transfusion)처럼 역동적인 ‘힘’을 제공한다. 한 어머니에게 감옥에 갇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은 거액의 벌금을 내야만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다. 아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들이 풀려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기 위해 온종일 커다란 돌을 옮기는 노동을 한다. 아들은 감옥의 창문을 통해 부르트고 피가 흐르는 손으로 고된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본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인 영향 즉, 고통 받는 어머니의 모습과 벌금을 내기 위해 돈을 버는 적극적인 노력의 조합을 발견하게 된다.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어머니의 고생으로, 수고로, 그리고 그 몸에 난 상처들로 풀려났습니다.” 이어서 사두는 말한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과 스스로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우리의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음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 하나님께 그런 고통을 안겨주는 죄 짓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Streeter & Appasamy, 위의 책, p.62.)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스러워하는 사랑이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며, 죄인의 회개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랑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고, ‘그 십자가가 천국’임을 스스로 발견할 준비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순다르 싱에게 있어서 구원은 죄의 용서로 인해 고갈되지 않는다. 오히려 개혁신학에서 ‘성화’로 알려진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사람은 구원이 죄의 용서라고 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고 완벽한 구원은 단순한 죄의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줄 생기 넘치는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는 것은 그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Heiler, 위의 책, p.166.)



이 진술은 물론 완벽히 바울의 것(고후 5:17)이지만, 그 개념이 나중에 첸치아의 ‘새로운 창조’ 신학에서 상당히 상세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새겨지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체가 되는 것은 믿음 때문이다. 순다르 싱은 특정한 곤충들이 가진 위장술의 본질을 예로 든다. 그런 곤충들은 자기들이 쉬는 나뭇잎이나 막대기처럼 보인다. 또한 줄무늬 피부를 가진 호랑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정글의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인이나 천사들처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 속에 사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공유하며, 그의 모양대로 변화되어 간다.’

하지만 이 관계는 결코 동일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관계 안에는 베단타주의적인 흡수(absorption)가 없으며, 그리스도와 신자가 자신들의 분리된 정체성의 연합을 유지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면 우리의 삶 전부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물속에 용해된 소금은 사라진 것 같지만 그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물을 찍어 맛을 볼 때 소금이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와 공유하는 사랑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Heiler, p.170.)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 예화는 마치 찬도기야 우빠니샤드(Chandogya Upanishad)에서 가져 온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찬도기야 우빠니샤드에서 이 예화는 근본적인 베단타 철학의 명제인 ‘따트 뜨왐 아씨’(tat tvam asi), 즉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에 대한 논증으로 등장한다. 거기서 예화의 의미는 순수의식(브라흐만)은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디에나 현존한다는 것이다. 예언자 웃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ni)는 자기 아들 스베타케투(Svetāketu)에게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진실로, 나의 아들아!
너는 여기에 있는 순수의식(Being, 실재)을 인식하지 못한다.
참으로, 진실로, 순수의식은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본질—
이 모든 세상은 자신의 영혼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참자아(Reality)요,
그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니라, 스베타케투야. (Chand. Up. 6:13)



순다르 싱의 의미는 오히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분이 그분 자신의 정체성으로 거기 계시며, 우리의 삶의 질을 그분 자신의 그것과 일치되도록 변화시키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신앙적 연합은 신자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 모두가 유지된다. 사두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로 남아있습니다.”

계속 유지되는 자아정체성과 결합된 침투(스며듬)를 포괄하는 이 신비로운 연합에 대한 예화로서 그는 석탄과 불, 또는 물을 머금고 있는 스펀지를 제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본 결과, 우리가 보아왔듯이 순다르 싱에게서 ‘구원의 길’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설명은 발견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그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특징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즉 그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이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야 할 삶이기도 하다.
 

그분을 따르는 것,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고귀한 일입니다. 만일 내가 천국에서 져야 할 십자가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그분의 선교사로 보내달라고 간청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지옥에 있게 된다면, 적어도 거기서는 내가 십자가를 질 기회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존재는 지옥조차 천국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Sundar Singh, The Cross is Heaven, pp.39f)

 

교회와 사두 이상


교회와 순다르 싱의 관계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미 그가 성공회 신자로 세례를 받는 과정과 성공회에 속하지 않은 교회에서의 설교가 금지되었음을 알게 된 후 설교자 면허를 포기했던 사연을 살펴보았다. 그는 평생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초대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설교했다. 순다르 싱은 어디에서든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찬식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가시적이고 제도화된 기관으로서 교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교회를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 전체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 즉 참된 교회에 속해있습니다. 그 교회는 재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체로서의 몸입니다. 그들은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빛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 모두를 가리킵니다. (Heiler, p.201.)



그를 향해 어떤 교회에 속해있느냐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항상 다음과 같았다. “나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것으로 제게는 충분합니다.”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판단은 또한 교회의 교리 체계에도 적용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인도인들은 신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충분히 넘치도록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조들 때문에 지쳐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인도는 단지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과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는 사람을 원합니다. (Heiler, p.266.)


여기에는 분명히 한 가지 위험이 존재한다. 실제로 사두는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그 자신이 황홀경의 상태에서 받은 계시에 그 우선권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은 사실 다른 몇몇 인도 신학자들의 가르침보다 더 성경적이고 심지어 ‘정통적’인데, 의심할 여지없는 한 가지 사실은 그의 모든 환상들이 성경의 판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그 방식으로 추적 가능하다는 것이다.

순다르 싱은 분명 ‘외로운’ 사두였다. 4백여 명의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고 남인도의 한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그를 위해 아쉬람을 세워 주기 원했지만, 그는 이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부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집단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형태의 교회 예배도 깊은 영적세계를 체험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명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며, 언제나 자신들의 영혼 속에서 그분의 복된 임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Heiler, p.306.)



이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인도교회가 과연 순다르 싱이 자신을 위해 도입하고 널리 대중화시킨 사두 이상(Sadhu-ideal)을 가져야 하는지 그 타당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순다르 싱의 경우 이 특별한 형태는 힌두교의 사냐시 이상(Sannyasi-ideal)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가 친숙한 외모와 가르침의 방식을 통해 인도에서 많은 청중을 얻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의 선례들, 즉 사막의 교부들이나 유랑 수도자들, 성 프란시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개신교 기독교인들에게 추천해 온 생활방식은 아니었다. 따라서 인도와 서양 모두에서 이러한 방식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품어온 이들이 있었는데, 특히 현재 인도에는 순다르 싱을 흉내 내는 많은 기독교 사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진짜 사두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한 사람의 사두로서 순다르 싱의 사역이 갖는 진실성과 그 효력은 분명해 보인다. 인도교회가 더욱더 진정으로 인도적이 되어감에 따라 하나님은 교회내부와 외부세계를 향하는 증인으로서 그와 유사한 특별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듯이, 너무나 많은 거짓 사두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참된 기독교 사냐시들은 그들의 열매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알려지게 될 것이며, 이런 헌신적인 사람들이 많으면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물론 그런 사역은 결코 교회의 통상적인 사역이 될 수는 없으며, 교회는 정기적인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래의 인도교회 안에는 다양성을 위한 많은 공간이 있어야 하며, 적어도 헌신된 소수가 아닌 경우에는 따라야 할 패턴이 있다.
 

힌두교에 대한 순다르 싱의 태도


순다르 싱은 자기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인도의 비기독교 성인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센이나 우빠디야이가 그러했듯이 긍정적인 것이었다. 순다르 싱은 특정한 종류의 힌두들의 종교적 경험이 가진 효용성을 받아들이면서, 그 경험이 진실하고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한, 그것이 인정받거나 실현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그리스도와 성령에 귀속된다고 믿는다. 그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의 필요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신다”라고 기록하면서, 나아가 비기독교 사상가들 역시 의로우신 태양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영혼이 공기 중에서 숨을 쉬듯이,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든 영혼은 심지어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성령을 들이 마신다.’(Heiler, p.218.)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분만이 홀로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빛이시다. 동방박사들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도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성실하게 별을 따라가지만, 그들을 안내하는 것은 별빛일 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태양의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Heiler, p.220)



그는 오히려 파커와 같은 입장에 가까웠으며
, 바로 이 기간 동안 파커가 말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자신의 여러 친구들을 통해 계속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해 그는 생생한 표현으로 말한다.

 

기독교는 힌두교의 성취입니다. 힌두교는 지금껏 수로를 뚫어왔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수로들을 통해 흐르는 물입니다. (Streeter & Appasaamy, 위의 책, p.232)



따라서 힌두교에 대한 순다르 싱의 태도는 고레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 그는 심지어 대중적인 힌두교의 악습들에 대해서조차 거의 비판하지 않으며, 오히려 실재에 대한 일원론적 관점, 즈냐나 마르그(지식의 길), 그리고 금욕주의의 실천과 같이 그 자체로 갖는 강점들로 인해 자신의 비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순다르 싱은 자신이 힌두교의 어떤 특정 학파나 ‘길’(방법)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인 헌신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가장 가깝게 느껴질 것 같아 보이는 박띠조차도 다른 요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처럼 거부하지만, 특히 즈냐나 마르그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진정으로 마음보다는 머리에서 오는 모든 종교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순다르 싱은 종교란 지식이 아닌 사랑과 헌신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자신을 둘러싼 힌두교적인 환경에 대해 사도 바울이 당대의 율법주의적 유대주의에 대해 반응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은 행위나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확신했다. 사두 역시 인간은 힌두교가 좋아하는 즈냐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는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이나 행위(까르마), 또는 새로운 철학(즈냐나)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 의미하는 바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순다르 싱이 힌두교의 주요한 마르그들과 신의 이미지, 곧 다르샨들(darshans)을 거부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는 다양한 힌두교의 용어들을 사용하고 우빠니샤드에서 자신의 비유를 인용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박띠 신앙과 라마누자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다고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그런 경향은 훗날 그가 그토록 깊이 영향을 주었던 아빠사미에 의해서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트리쉬나(trishna, 영적인 갈증), 사마디(samādhi, 영적인 황홀경의 상태), 샨띠(shanti, 평화), 마이트리(maitri, 우정 또는 아가페), 목쉬(moksha, 해방 또는 구원), 쁘렘-사가르(prema-Sagara, 사랑의 바다)로서의 하나님, 안따리야민(Antaryamin, 내면의 안내자)으로서의 하나님, 바그완(Bhāgavan)으로서의 하나님, 이슈와르-쁘라사드(Ishvara-prasada)로서의 하나님의 은혜, (여기서는 브라흐마반답과는 구별되는) 아브따르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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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다르 싱은 인도 기독교 역사에서 중심적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전기는 아빠사미와 B. H. 스트리터 등에 의해 출판되었고, 순다르 싱 자신의 글들은 다양한 역본으로 출판되어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보급되었다. 그에 대한 논쟁의 매캐한 연기들은 이제 사라진 듯이 보이며, 최근의 연구들은 순다르 싱의 위대함과 그의 단순성뿐만 아니라 진실성까지도 입증하고 있다.

어떤 하나의 전통과 순다르 싱을 동일시하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신학의 원천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하일러는 그를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오리겐,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오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에크하르트, 노르비치의 줄리앙 등의 라인에 두고 그에게서 루터의 반영들 또한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깔뱅주의자들은 그에게서 깔뱅을 찾아낸다. 예수회원 드 그랑메종(de Grandmaison)은 사두의 신앙이 “교부 시대 너머로 발전하지 않은 복음주의 기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 모든 가설적 유사점은 순전히 우연일 것이다. 사두의 소년 시절의 배경은 하나님과의 교통, 심지어 황홀경에 이르는 교통을 포함한 박띠 전통이며, 기대하고 경험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는 신약성경에 깊이 빠져있었고, 그의 모든 가르침은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그의 여러 친구들과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 즉,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와 성 프란시스의 작품들을 포함한 서구의 경건서적들에 흥미를 갖게 한 이들을 잊어서는 안되며, 말년에 그가 폰 휘겔(Von Hügel)처럼 잘 알려진 신비주의 사상가들과 만나고 대화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세례를 받았던 복음주의 전통에서 결코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서, 이 모든 원천들에 끊임없이 의지한다. 그의 신비주의는 실용적 신비주의로서, 서양 교과서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모든 방법과 사고에 있어서 진정으로 인도적이며, 결코 서구의 기독교 전통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복음의 핵심 속으로 들어간 한 사람을 갖게 된다. 자주 인용되는 글 속에서 그는 “인도인들은 생명의 물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만 유럽의 그릇 속에 있는 물을 원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빠사미(A. J. Appasamy)가 그에게서 아주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다른 인도의 신학자들은 순다르 싱의 신학적인 방법들을 따르는 데 있어 주저해 왔다. 그러나 마침내 성경 및 경험과 직관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그와 비길 만한, 그리고 기독교 교의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진술로 이끌어갈 만큼 더 깊고 정교한 신학적 지식을 갖춘 다른 위대한 성인들이 인도교회에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인도교회와 그 사상의 역사에서 순다르 싱은 궁극적으로 그의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복음전도자로서의 성공보다도 어쩌면 그의 신학과 그 방법론에 있어서 실제로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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