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13> 박띠 마르그로서의 기독교 - 아빠사미 ①

2021. 3. 8. 13:38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728x90

아이야두라이 예수다센 아빠사미(Aiyadurai Jesudasen Appasamy) 주교는 스스로를 박띠 전통과 동일시해 온 인도 신학자이다. 그는 40여 년간 작가와 교수로서, 또한 목회자와 주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도교회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브라흐마반답이 상까라 철학을 인도 기독교 신학을 정교하게 다듬는 도구로 사용하고 첸치아(P. Chenchia)가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 쪽으로 눈을 돌렸다면, 아빠사미는 박띠의 인격주의적인 전통과 라마누자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철학적 해석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빠사미 주교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데완 바하두르 아빠사미 필라이(Dewan Bahadur A. S. Appasamy Pillai)는 24세에 시바파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그의 개종은 부분적으로 그 집안의 존경받는 친구가 된 시인 끄리슈나 필라이(Krishna Pillai)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빠사미는 티루넬벨리와 마드라스에서 공부한 후, 1915년에 미국으로 떠났고, 미국과 영국에서 7년을 보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힌두 박띠 문헌과 관련하여 보는 제4복음서의 신비주의”(The Mysticism of the Fourth Gospel in its Relation to Hindu Bhakti Literature)였다. 아빠사미 자신이 공부해 온 학문과 더불어 폰 휘겔(Von Hügel), 하일러(Heiler), 오토(Otto) 같은 작가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은 그로 하여금 요한공동체의 문서 속으로, 그리고 서구의 신비주의 특히 에크하르트와 같은 사람들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이 과정들은 시바파 및 비슈누파 전통 양쪽에 속한 타밀 경건주의 시인들을 연구하던 아빠사미 자신의 작업에 대한 관심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인격적인 신, 그리고 그 신과 교감하고자 하는 강렬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 이런 시인들의 확고한 믿음을 통해 깊은 동요를 느꼈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도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과, 이 전통은 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인도인의 보다 완전한 이해를 이끌어 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확실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이 시기에 시작되어 그의 삶에 또 다른 깊은 영향을 끼친 요인은 1920년에 사두 순다르 싱이 옥스퍼드를 방문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아빠사미는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스트리터(B. H. Streeter)와 공동으로 순다르 싱에 관한 책, 『사두』(The Sadhu)를 저술하였다.

1922년에 인도로 돌아온 아빠사미는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면서 이제 따밀어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원문에도 눈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매력을 느낀 박띠 전통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탐구하면서 라마누자와 그의 철학체계에 대한 연구로 나아갔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연구의 결실은 아마도 그의 최고의 작품이자 가장 독창적인 작품들인 두 권의 책, 『박띠 마르그로서의 기독교』(Christianity as Bhakti Marga, 1928)와 『목쉬란 무엇인가?』(What is Moksa?, 1931)의 출판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제4복음서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들은 따밀 박띠 시인들로부터 가져온 풍부한 예화들을 통해 영감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의 헌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삶의 목표, 즉 힌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목쉬(moksa, 해탈)나 해방 또는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신앙적인 연합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신성 안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그분과 사랑이 가득한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이는 아빠사미가 자신의 후기 저술들 가운데서 충실하고자 했던 주제이며, 그의 신학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운율로 들린다.
 

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케샵 찬드라 센은 성부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물질적인 것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두 분 사이의 ‘깊은 교통’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연합을 ‘위격의 연합’(unio hypostatica)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이라고 믿었으며, 이 관계를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와 비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아빠사미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제안들 중 일부를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하는데, 그 제안들은 ‘박띠의 길’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그의 전체적인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좋은 지점은 인도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 있는 요한복음의 본문,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성부와 연결되는가? 그 관계는 본질에서의 동일성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의 해결방안이라고 할 수 있는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ousia)인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형이상학적인 연합(일치)이 있으며, 그리스도는 선험적으로(a priori) 성부와 하나다. 이는 이를테면 두 위격 모두 근원적으로 동일한 본질(ousia)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빠사미는 이 견해에 도전하면서 성부와 성자의 연합은 형이상학적 연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인 연합이라고 주장한다. 즉 성자는 영원으로부터 성부의 뜻에 일치하셨으며, 복종에 있어서 완벽하시고, 두 인격은 형이상학적인 방식보다는 도덕적인 방식으로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아빠사미가 논쟁을 벌인 이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빠사미는 칼케돈 신조를 그것이 단순히 서양의 것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람 모한 로이 등에게서 나타나는 일원론적인 힌두교의 경향성, 즉 요한복음의 위대한 두 가지 명제(mahāvākyas)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와 “내 안에 거하라”를 사용하여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자가 궁극적으로 모두 하나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경향성에 대하여 정면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일원론적인 경향은 각 경우에 있어서의 연합이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형이상학적 연합을 얻거나 실현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신자도 그리스도도 아닌, 단순히 차별화되지 않은 신격의 연합만이 있을 뿐이다.

아빠사미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결합이 사랑과 복종에 기초한 도덕적인 연합이며, 성부와 성자의 연합은 이와 정확히 유사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일원론적 관점에 도전한다. 그의 주장은 요한복음 14장 28절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와 같이 아들을 아버지께 종속시키는 것을 확언하는 제4복음서의 몇몇 구절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를 주석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표면적으로 이 구절이 아드바이타를 제시한 우빠니샤드 원문과 같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가 전적으로 자신을 아버지께 의존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동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과 목적에서의 조화로운 완전함’이다. (A. J. Appasamy, The Gospel and India’s Heritage - 1942, pp. 35-6.)


우리는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하나가 됨으로써 마무리된 가공할만한 투쟁인 겟세마네의 이야기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의론(monothelitism)의 연합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인간으로서 자기의 뜻을 갖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올려 드리신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분의 하나됨의 본질을 행하는 것이었다.” (What is Moksa? - 1931, p. 59) 아빠사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신자와의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요한복음 17장 20절 이하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


그는 말하기를, 이 ‘같이’(as)는 두 가지 관계가 같은 종류의 것임을 암시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기도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교제의 정신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도는 제4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연합이 사랑과 구속사역에 있어서 연합이지 근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정체성의 연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Gospel, p.38)


이 해석은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아드바이타적인 의미에서 ‘하나’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역할의 차이며 인격의 차이기도 하다. 이는 오로지 순수하게 형이상학적 일치를 배제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인격적인 사랑의 도덕적인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빠사미가 브라흐만의 근본적인 연합의 표현으로 사트, 씨트, 아난드의 다양성을 보았던 브라흐마반답과는 매우 다른 해법에 도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목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체성에 있어서의 하나가 아니라 친교(fellowship)에 있어서 하나’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 자신의 관계의 본질을 계속 고려할 때, 우리는 연합에 대한 아드바이타적인 견해가 박띠의 견해를 선호함으로써 거부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동일성이 있을 수 없다 … 하나님과의 교제는 …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유사함을 실현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각의 안개에 가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존재하며, 실재에 대한 어떤 열광적인 희미한 빛에 의해만 영혼에게 분명해질 수 있는 유사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과 상상 속에서, 목적과 의지에 있어서, 겸손한 행위와 숭배하는 헌신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과 개별적인 영혼 사이의 조화다. (Moksa, p.68)


힌두교에서는 윤회로부터 영혼이 최종적으로 해방되는 것에 대하여 목쉬(moksha)나 묵띠(mukti)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들의 산스크리트의 근원적인 의미는 해방된 상태 혹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단어들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흔히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이 용어들은 단지 까르마(karma)나 삼사라(samsāra)로부터 탈출한다는 부정적인 사실보다는 오히려 신과의 연합이 주는 기쁨을 암시한다.

인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그 단어들을 ‘구원’(salvation)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아빠사미의 저서, 『목쉬란 무엇인가?』의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영원한 삶에 대한 분명한 기독교적인 개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그분와의 믿음의 연합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대중적이면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힌두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사미는 요한복음의 영생에 대한 개념 속에서 목쉬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발견한다. 여기서(here), 지금(now) 실현된 목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쩌면 박띠의 삶으로, 혹은 박띠 마르그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도의 세 가지 전통적인 ‘방법들’(ways), 즉 즈냐나 마르그, 박띠 마르그, 그리고 까르마 마르그 가운데 아빠사미는 물론 박띠 마르그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는 제4복음서에서 그리스의 영지(Gnostics)나 인도의 즈냐나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즈냐나 마르그를 발견하고, 이 즈냐나 마르그를 박띠의 한 형태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해석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사용한다. 요한복음의 즈냐나,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그리고 아는 가운데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성부)에 대해 얻게 되는 ‘지식’은 단지 무지 혹은 아비디야(avidyā)를 제거하는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가장 친밀한 벗들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형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사랑, 즈냐나와 박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으로서의 목쉬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결합될 수 있다. 아빠사미가 말하는 목쉬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를 보자.

목쉬는 실재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며, 인격적이고 의식적이며 그리고 기쁨으로 빛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삶과 같다. 그것은 동일성의 실현이 아니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아버지와의 도덕적 조화의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높은 영역들 가운데서 그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는 하나의 인격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공동의 경험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에 이르기 위하여 자신의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현재의 삶속에서 시작되며 무작정 무한한 미래를 기다리지 않는다. (Moksa, p.31)


순다르 싱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아드바이타 전통 또는 에크하르트와 수소(Suso) 같은 유럽 신비주의자들의 일원론에 반대하여 아빠사미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 각각 독립된 인격으로 보존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투까람의 말을 인용한다.

나를 당신과 하나로 만드는 지식은 저주를 받으리라 … 나는 당신의 종, 당신은 나의 주님 … 물이 자신을 맛볼 수 없고, 나무들이 자신의 과일을 맛볼 수 없듯이, 예배자는 예배를 받는 분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며, 따라서 기쁨은 오직 구별에서만 오는 것이다. (Moksa, p.91)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은 ‘하나님을 향한 전인(全人)으로서의 깊고 이타적인 사랑’의 형태를 취해야 하며, 이는 아마도 박띠의 최상의 번역이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에 대한 것이며, 박띠가 인격적이기 때문에 이 반응은 우리의 모든 성품과 의지, 감정과 생각을 동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힌두교의 특정 형태의 헌신과 달리 기독교 박띠는 의지적인 응답과 윤리적인 생활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께 우리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새로운 사랑의 법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 법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켜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감정 역시도 반응해야 한다. 과도한 희열로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라 라마누자가 ‘끊임없이 흐르는 기름의 시내’로 비교한 바로 그 박띠와 더불어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확고한 윤리적 행위와 고요한 기쁨을 위해서는 지식, 즉 즈냐나도 추가되어야 하는데, 이 즈냐나는 고통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우리의 영혼에 빛의 홍수를 쏟아 붓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힌두 박띠의 목표는 신의 임재가 명백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비전’(다르샨, darshana)과 연계되어 있지만,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즈냐나는 아드바이타, 즉 고레가 돌의 상태에 비유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의 동일성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아드바이타 추종자들은 황홀경의 상태, 즉 사마디(samādhi, 三昧)에 도달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런 경험이 박띠 마르그를 따르는 이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박따들에게도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박따들에게 있어 이 황홀경의 상태는 개인의 감각이 보존되는 교감으로서, 이는 쁘러띠약쉬(pratyaksha) 혹은 직접적인 인식으로 묘사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많은 인도의 기독교 성인은 이런 유형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일부 사람들, 예를 들어 순다르 싱이나 아빠사미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이들은 그런 경험의 실재와 그것의 내용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남겼다.

 

3.  로고스와 안따리야민


지금부터 우리는 아빠사미의 또 하나의 독특한 개념에 관심을 돌려보고자 한다. 이는 힌두교의 안따리야민(antaryāmin) 혹은 내주자(indweller)라는 개념을 그가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제4복음서를 무척 사랑했던 아빠사미는 필연적으로 로고스 개념에 자주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개념을 내재하시는 하나님, 즉 내부에서 다스리시는 분으로서의 안따리야민이라는 힌두교의 사상과 결부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그의 논점은 요한복음 1장 10절의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He was in the world)라는 구절의 해석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를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셨던’(came), 그리고 세상에 ‘계셨던’(was)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빠사미는 그 표현을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도 세상에 내재하셨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타이띠리야 우빠니샤드(Taittiriya Upanishad)의 신비로운 구절 “그것을 창조하면서 그는 그 속으로 들어갔다”에 대한 랑가-라마누자(Ranga-Rāmānuja)의 주석을 인용한다.

아빠사미는 말하기를 이 구절이 “절대자는 오로지 세상의 중심에서만 알 수 있다”라는 의미라고 했다. 따라서 요한은 여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다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성육신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한편,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은 ‘육체가 되셨다.’ 성육신은 단순히 내재(immanence)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보여 주는데 있어서 더 효과적인 수단이다. (Bhakti, p.49)


이 점은 그 다음 구절, “그가 자기 땅에 오셨다”(요 1:10)에 대한 주석에서 이어진다. 아빠사미에게 있어서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며, 이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어떤 특별한 ‘새로운 출생’을 경험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본래적인 자녀로서의 모든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재하시는 그리스도 혹은 안따리야민으로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 가운데 현존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그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보다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성육신하신다. 하나님의 세상 안에는 어디에나 빛이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 계신 빛이 가장 밝은 빛이다. 아빠사미는 다음과 같이말한다.

각 사람은 로고스의 완전한 불꽃이 거주하는 곳에 자신을 던질 수 있도록 힘써야한다…지혜의 길은 온통 빛으로 가득한 곳을 선택하는 데에 놓여있다. 그런 빛이 넘쳐흐르는 곳이 예수 아닌가! … 비록 로고스가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왔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예수 안에 완전히 구현 되신다. (Moksa, p.174)


여기서 우리는 아빠사미의 가르침의 핵심에 근접하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 그리고 사람들 속에 내재하신다.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밝게 혹은 희미하게 현현되어 온 그 빛을 보아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빛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빛으로 나아와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완전한 빛은 예수 안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만 로고스가 완전하게 거하시기 때문이다.

아빠사미는 '안따리야민'이라는 용어를 다소간에 모호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여기서 우리는 '내주하시는 로고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왔지만, 다른 문맥들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빠사미는 자신의 초기 저작들 속에서 성령의 오심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 것과 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기독교의 관념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느낀다.


하나님은 우리와 매우 가깝게 계신다. 하나님은 접촉할 수 없는 분이 아니며, 멀리 떨어져계신 분도 아니고, 머나먼 하늘에 살고 계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어디에나 임재하고 계신다. 그분은 영으로서 모든 우주에 편재하신다 … 한순간도 지나가지 않지만 그분의 임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준다 …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밖에서만 그분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노동일 뿐이다.


아빠사미는 오랜 목회 경험의 하나의 결과물로서, 그리고 타밀나두 주 코임바토르(Coimbatore)에서 상당기간 주교로 일할 때 경험했던 부흥운동을 통해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목회사역을 마친 이후에 성령께서 그분의 새로운 생명으로 모든 공동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필요가 내게 매우 명백해졌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가 자신의 주요 작품들에서 오순절과 성령강림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곤 한다.


*     *    *    *    *    *    *


아빠사미의 '박띠 기독교'에 대한 글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