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14> 박띠 마르그로서의 기독교 - 아빠사미 ②

2021. 3. 29. 18:28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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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는 A. J. 아빠사미 주교의 생애와 지도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의 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지난 포스팅에 이어 이번에는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 몇 가지를 추가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포스팅은 필자가 번역한 로빈 보이드 박사의 저서 「인도기독교사상」(CLC, 2020)의 내용을 발췌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재정리한 것으로서, 무단전재를 금하며 인용하거나 공유하실 때는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각주를 포함한 상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인터넷 서점에서 '인도기독교사상'을 검색하여 책을 구입하시면 큰 도움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박띠 마르그로서의 기독교 - 아빠사미 ①
http://blog.daum.net/samuellim/191 


 

<인도기독교사상 13> 박띠 마르그로서의 기독교 - 아빠사미 ①

아이야두라이 예수다센 아빠사미(Aiyadurai Jesudasen Appasamy) 주교는 스스로를 박띠 전통과 동일시해 온 인도 신학자이다. 그는 40여 년간 작가와 교수로서, 또한 목회자와 주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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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과 세상


우리는 아빠사미가 내재하시는 영원한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가 자연에 의해, 어쩌면 감추어진 것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제시된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분의 선재하심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온 세상에 존재하신다. 왜냐하면 로고스와 같이 그분 또한 창조의 주역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요 1:3)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기독론의 범주 안에 있으면서도, 주지하다시피 궁극적으로 브라흐만과 창조가 하나라는 아드바이타적 관점이 주는 어마어마한 압력 때문에 항상 인도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들 중 하나인 ‘창조와 하나님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아빠사미는 요한복음의 본문에 기초하여, 그리고 라마누자의 철학의 도움으로 하나님은 우주와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로고스로서 그 안에서 현존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대해 갖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상과 관계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브리하드-아라냐까 우빠니샤드(Brihad-Aranyaka Upanishad)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을 인용한다.

하늘에 거주하시는 그분은 하늘이라기보다는 하늘이 알지 못하는 분, 하늘이 자신의 몸이신 분, 하늘을 그 안에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 그분은 그대의 영혼이며, 내면의통치자(안따리야민)이며, 불멸하시는 분이시다.
마음에 거주하시는 그분은 마음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알지 못하는 분, 마음이 자신의 몸이신 분, 마음을 그 안에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 그분은 그대의 영혼이며, 내면의 통치자이며, 불멸하시는 분이시다. (Br. Ar. Up. 3, 7, 8-20)


아빠사미는 이 문장을 설명하면서 힌두경전들에 수없이 많은 곳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가 생명을 불어넣는 세상과 다른 존재로 느껴지고 인식되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인간의 영이 육체 안에 있어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모든 세상의 뒤에는 하나의 정신(Mind) 또는 이성(Reason)이 존재한다 … 이는 세상과 동일하지 않으며, 세상과 다른 존재다. 하지만 세상은 그 존재의 작용으로 인해 움직인다 …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밑바탕은 이 보이지 않는 인격적인 힘의 작용이다.”(Moksa, p.168)

이 라마누자의 ‘몸과 영혼의 유비’(analogy)는 아빠사미의 신학에서 매우중요하며, 그는 네 가지 분명한 맥락에서 이 비유를 사용한다.

① 여기에서와 같이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묘사할 때
②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다룰 때
③ 성례전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 논할 때
④ 교회 안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 토론할 때

라마누자의 이 유비가 가진 효용성에 대해서는 따로 고찰해 볼 것이다.


5.  아브따르 (Avatara)


아브따르(avatāra)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아빠사미가 센이나 우빠디야이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아빠사미가 박띠와 라마누자의 전통에서 자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센과 우빠디야이는 생각하기를 예수를 아브따르로 부르는 것은 그분을 대중 힌두교의 여러 아브따르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을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절대자 브라흐만의 낮은 단계의 현현(顯現)이란 개념을 내포하는 '이슈와르(Ishvara)의 아브따르'로 만드는 것을 최선으로 보았다.

아빠사미는 특정한 안전장치를 찾을수만 있다면, 자신의 다른 관점들과 더불어 ‘아브따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유용하고 생산적으로 적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미 살펴보았던 구절, 즉 아브따르에 대한 힌두의 이해를 분명하게 언급하는 기타(Gita)의 유명한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오! 아르주나여,
법도가 쇠퇴하고 무법이 발호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다시 태어난다.
선한 이들을 보호하고, 악인을 멸절하며,
법을 세우기 위해서 대대로 다시 태어난다. (Gita, IV. 7.8.)


여기서 시작하여 아빠사미는 여러 인도의 언어에서 아브따르라는 단어를 실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묘사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아브따르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요약한다. 그러나 그는 그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힌두교와 기독교 사이의 명확한 구별이 필요한 요소들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는 많은 아브따르들이 있으며, 이런 신들은 대부분 단순히 부분적으로 현존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통상 받아들여지는 유일하고 완전한(뿌른, purna) 아브따르는 끄리슈나 안에 성육신한 비슈누의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하나님의 전존재의 성육신이시며, 그분 안에서 신격의 완전함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또한 기타에 묘사된 아브따르의 목적 역시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악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타는 필요할 때마다 신이 거듭 반복하여 화신이 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실제로 고전 힌두교는 일련의 아브따르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스리 라마끄리슈나와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위대한 인간 지도자와 스승들까지도 신의 아브따르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한 번에 모든 사람을 위한’(once for all) 것이고,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아브따르였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오직 한 번만 사람으로 땅 위에 사셨고 그분이 예수님이셨다 … 세상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인물 가운데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고한 우리 기독교 신앙이다. (Gospel., p. 259.)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실재성과 역사성에 대한 질문은 힌두교의 아브따르가 사실 성육신이라기보다는 신의 현현(theophany)이라는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힌두교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아브따르가 걸어갈 때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아야 하므로 그 발이 땅에 닿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남인도 사이바 싯단뜨(Saiva Siddhānta)에 속하는 인격주의 박띠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신이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신은 어린아이로 태어나지 않는다 … 그 신은 오랜 세월 동안 육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육체를 사용할 뿐이다. (Gospel, p.262.)


만일 기독교에서 이런 아브따르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선택한다면, 반드시 그와 같은 모든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주장을 피해야 한다. 힌두교 사상가들은 거의 일관되게 아브따르, 즉 화신의 역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빠사미는 라마끄리슈나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스도와 끄리슈나가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이상, 또는 끄리슈나의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시기에 그리스도 또는 끄리슈나로 살았기 때문이다. (Gospel, p.261)


아빠사미는 이 관점을 거부하면서 창조된 세계의 실재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의 역사성 둘 다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조건을 갖추었다는 전제아래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아브따르라는 용어의 사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이 아브따르 개념은 우리가 보았듯이 그의 신학 전체의 구조에 잘 들어맞는 용어이며, 철학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상까라의 경직된 일원론이 아니라 라마누자의 인격주의 유신론 및 박띠와 연결되어 있다.


6. 인격적인가 비인격적인가?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아빠사미의 사상에 있어서 또 하나의 모호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적인 하나님 개념의 기초가 될 수 없는 비이원론(advaita)과 그것이 지닌 비인격적 브라흐만을 명확히 거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사미는 여전히 일례로 에크하르트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신비적인 경험이 때때로 비인격적인 용어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하나님 이해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느낀다.

기독교 신비주의를 포함하여 신비주의는 대체로 두 가지 경향성을 갖고 있다.

첫째는 모든 경험적인 원천을 초월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경향이요, 둘째는 따뜻하고 인격적이며, 사랑이 가득하며, 은혜와 진리이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아빠사미는 이 두 가지 경향성 모두를 제4복음서 안에서 발견한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문, 포도나무, 빛, 길, 진리, 생명과 같은 단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경향성의 흔적들을 발견하면서, 공관복음 속의 예수는 자신을 이런 구체적이고 비인격적인 용어들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그의 해석은 다소 과격하게 느껴진다. 또한 그는 아마도 ‘반인격적인’(semipersonal) 존재로서의 로고스 개념을 말할 때 보다 더 확실한 근거 위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그와 같은 인격적인 측면에 반하는 것으로서 인격성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요약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경험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속성들 아래서 실현된 신성으로부터 영원 속에서 실현되는 신성”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경험 속에서 그 확실한 타당성을 찾는다.

아빠사미는 이 점에 있어서 아마도 라마누자와 상까라의 입장을 종합하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인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은 니르군 브라흐만으로서 신 개념이 어떤 종류의 인격적인 계시로서의 신 개념보다도 항상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도 요한이 제공한 하나님을 상상하는 이런 모든 방법의 조합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 우리는 역사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성육신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고 인도하는 작업적인 가설일 뿐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다. (Moksa, p.11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넘어서서 그분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가리킨다. 아빠사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거대한 산맥의 한 부분임을 증명하는 높은 산마루와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뚝 솟은 봉우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그러나 하나님 곁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비로움이 멀리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만족했다는 것을 교리적인 확실성으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분을 통하여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추구한다. (Moksa, p.112)


상까라에게 있어서 인간은 절대자를 이해할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과 인격적인 신에 만족해야 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기독교는 그러한 이분법을 용납할 수 없으며, 아빠사미는 단순한 신자들조차도 요한복음의 접근법을 통해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물론, 인격적인 존재 이상의 존재로서의 하나님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전에 우리의 지식 바깥에 있던 별들과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의 예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늘들을 살피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까지 뻗어나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그 하늘들의 깊이와 거리를 그 하늘들의 모든 신비와 더불어 깨닫게 된다. (Moksa, p.116)


이 그림은 생생하긴 하지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기록된 그분의 말씀에 대해 사용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7. 죄와 까르마


인도의 보통 사람들은 까르마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죄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아빠사미는 “까르마를 제거하는 문제는 죄를 제거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긴급하다”고 말한다. 아드바이타 힌두교에는 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지만, 아빠사미가 그렇게 친밀감을 가졌던 박띠 전통은 17세기의 구자라트 출신 시인 다두다얄(Dadudayal)의 그것과 같은 몇몇 감동적인 고백을 만들어냈다.

주님 앞에서 저는 모든 신경과 혈관 속에서 죄를 짓고 있으며
순간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옵소서!
저는 단 한 가지도 선한 일을 하지 못했고
내안에는 그 어떤 미덕도, 그 어떤 공덕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죄많은 자녀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님이 아니라면 나는 어디로 피할 수 있으리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욕심, 교만, 분노와 거짓이 나를 이끌었습니다.
오!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요?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니 주님의 자애로운 너그러움의 감로수로
나를 씻으시고 상한 나의 마음을 치유하소서. (A. J. Appasamy, Temple Bells, p. 62)


그러나 이와 같은 죄를 깊이 인식하는 표현은 힌두교에서 비교적 드문 사례이며, 사람들은 아빠사미가 성경과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너무나 명확히 강조되는 죄의 치명적이고 능동적인 힘에 대해 적극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빠사미는 힌두교 청중들에게 죄가 가진 죄의 본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반복적으로 노력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한 선교사 친구를 언급하면서 다른 하나의 접근법을 제안한다.

내가 확신하는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힌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열정을 갖고 있다 … 그 힌두는 특히 갈보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담고 있는 경이와 깊이를 이해하는 데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한다. (Gospel, p.98.)


그러나 까르마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되는 일은 모든 힌두교도들이 열망하는 바이며, 아빠사미는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죄와 까르마의 교리를 연결하는 열쇠를 발견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그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면서 이 개념은 생명과 사랑을 강조하는 요한복음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분과 연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스스로 까르마를 담당하시기에 그들의 까르마로부터 해방된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을 심판하고 그들의 행위의 결과가 그들에게 되돌려지는 까르마의 법칙에 계속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심지어 지금도 끊임없이 인과응보의 심판이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좋고 나쁜 선택으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있다 …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속에는 그 자체로 계속되는 까르마의 작용이 있다. (Moksa, pp. 218-20)


이 까르마의 교리를 기독교적으로 제시함에 있어 아빠사미는 자신이 순다르 싱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 언제나 까르마의 필연적인 결과로 주어지는 윤회 또는 삼사라(samsāra)의 사상을 거부한다. 나는 이 현생의 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있으며, 내 영혼이 그의 몸에 성육되어 있는 동안 어떤 다른 사람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죄에 대해서는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는 까르마로부터의 구원을 열정적으로 갈망하고 있는바, 아빠사미는 그 까르마 교리로부터 참되고 심오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회개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이들에게만 죄 용서가 주어지며, 그 죄 용서와 더불어 까르마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주는 데에 열정적이다. 그는 14세기의 개혁자인 까비르(Kabir)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는데, 여기서 까비르는 하나의 육체로부터 다른 육체로 옮겨가는 영혼의 진절머리나는 윤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 속에, 그리고 움직이는 동물 속에 있었습니다. 벌레 속에 있었고, 좀나방 속에도 있었습니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출생을 거쳐 왔습니다. 그안에서 나는수많은 몸을 차지했습니다. 오하나님, 그러나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게 됐을 때 나는 요기(yogi, 힌두수행자)였고, 여띠(yati, 자이나교 수행자)였으며, 고행자였고, 브라흐마차리(Brahmachari, 베다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때로는 왕이었고, 때로는 황제였으며, 때로는 거지였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는 점점 더 지쳐갑니다. 우리를 온전케 만들어 주옵소서. (Gospel, p. 119)


아빠사미에게 있어서 박띠 마르가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설명은 그 온전함에 대한 설명이다.


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표현’


투까람(Tukarām)의 노래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죄악의 덩어리입니다. 당신은 순전함 그 자체이십니다.
하지만 당신은 죄악 덩어리인 나를 반드시 데려가시고
나를 위해 내 짐을 져주십니다. (Gospel, p.125, Tr. N. Macnicol)


하나님은 나를 위해 어떻게 내 짐을 져주시는가? 우리는 아빠사미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설명하는 것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결합하는 삶의 ‘긍정적인’ 측면에 더 집중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그의 해석은 흥미롭고 전형적이다. 그는 요한복음의 두 가지 본문을 읽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첫 번째 본문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와 더 밀접하게 연합된다는 고난의 보편적 필요성을 제시하기 위해 선택됐으며, 두 번째 본문은 대속에 있어서 ‘도덕적인 영향’ 이론 진술의 기초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 위해서 죄를 용서하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의 힘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아빠사미가 십자가를 단지 죄를 용서하는 수단이나 사건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한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오히려 이 십자가는 인간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예증이다. 아빠사미는 이를 연상시키는 순다르 싱의 예화를 소개하면서 아이의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약해지지 않는 어머니에 대해서 말한다.

결정적인 시간이 다가와 아이가 어떤 심각한 도덕적 실수로 인한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때때로 그 인격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희생과 고통의 순전한 힘을 분출하며 아이에게로 달려간다. (Bhakti, p.112)


하지만 여기서는 순다르 싱의 이야기와 달리 ‘도덕적인 영향’이 작용하는 유일한 힘이며, 하나의 효과적인 ‘상호작용’(transaction)에 대한 어떤 힌트도 없다. 십자가는 그 대가로 우리의 사랑을 얻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manifestation)이다. 이렇게 볼 때 아빠사미의 속죄교리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첫 번째 기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박따에게 미친 도덕적인 영향이다. 두 번째 기둥은 순다르 싱이 말했듯이 ‘십자가의 길’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박따가 자기-동일화(self-identification)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찾으려는 자는 그분을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십자가 위에서 보낸 순간들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자신을 고통 받는 주님과 동일시해야 하고 심지어 그분의 고뇌를 공유해야만 한다. 오로지 예수님과의 그런 완전하고 자발적인 일치만이 영원한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다.(Bhakti, p.110)


아빠사미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의 교제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기독교적 관점을 힌두교도들이 받아들이는 데 있어 두 가지 주요한 장애물을 보고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실 수 있는가?’라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거의 예외 없이 힌두 교사들은 ‘신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까타 우빠니샤드(Katha Upanishad)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모든 세상의 눈인 태양이 눈에 보이는 영원한 더러움들과 접촉하지 않듯이 모든 사물들의 하나의 내재적 자아는 세상의 슬픔과 접촉하지 않으며, 그 바깥에 있다. (Katha Up. 5. 11.)


힌두에게 있어 브라흐만은 아난드, 즉 지고의 희락이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 가운데서 함께 고통을 당하거나 고통을 나누는 존재로서의 브라흐만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이 고통당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 중 하나인 『고통당하시는 하나님』(The Suffering God, 1932)이란 흥미로운 책에서 폴(C. S. Paul)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결정하는 개개인의 도덕적 세계에서는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 유일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둘째, 힌두교의 까르마 교리는 대속적인 고난이라는 개념과 조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은 현생이나 전생에서의 악한 행위의 결과이며, 대리적인 고통을 위한 여지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까르마의 교리가 전면적으로 수정되지 않는 한 순다르 싱에 의해 그렇게 됐던 것처럼 이는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고난을 포함하는 어떤 대속의 교리를 수용하는 데 있어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우리는 아빠사미가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사실과 그 진정한 필요성을 받아들이면서, 이 개념을 어떤 종류의 죄를 가진 대상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필요에 대해 적용하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해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계시되지만, 이 용서의 계시가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그 희생은 누구를 위해 이루어졌는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저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토의되어 왔다. 갈보리의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최상의 표현이다 … 이 위대한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성취하시며, 만일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표현한다면, 그분의 사랑의 풍요로움을 온전히 깨닫게 하신다. (Bhakti, p.125.)


아빠사미의 초기 저서에 따르면, 중요한 사실은 죄를 짊어지는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하나되는 ‘긍정적’인 면이었다. 이 하나됨은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던 고난의 사랑으로 강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며, 이 사랑은 우리의 고난으로 함께하여 그리스도와 더 깊은 결합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후기 저작인 『복음과 인도의 유산』(The Gospel and India’s Heritage, 1942)에서 아빠사미는 용서의 본질을 다루는 데에 더 확실한 관심을 보인다. 여기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도덕법칙’으로 서술된 까르마의 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그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한 것으로 인정된다. 아빠사미는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룬 계시이다. 그분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그들이 무엇을 해도 그분은 용서하지 않으신다 …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판단 그 너머에 있다 … 도덕법칙은 어떤 의미에서든 고려되지 않는다. 죄가 있는 곳에는 고통이 따른다. 인간의 죄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가져왔다.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가 없이 용서하신다면, 그분은 사람들 사이에 세운 자신의 도덕법칙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경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십자가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하나님께 쉽기 때문이라거나, 그분이 세상에서 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법을 지지하는데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Gospel, pp.124-5)


이 진술은 사실상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아빠사미는 그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인간은 까르마의 짐, 그들 자신의 죄의 열매의 짐 밑으로 가라앉고 말지만, 이 짐은 ‘우리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진다. 까르마의 법칙에 의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행동의 모든 열매를 책임진다. 그러나 우리가 뉘우치면서 스스로 들리신 분, 그리고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분께로 돌이키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열매 맺는 밀 이삭의 열매들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우리의 까르마를 담당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과 연합된 삶을 위하여 자유로워진다.


9. 권위의 원천들 – 쁘라만 (Pramana, 쁘라마나)


아빠사미는 힌두교의 세 가지 전통적인 기준 혹은 쁘라만(pramānas)이라고 할 수 있는 슈루띠(shruti, 경전)와 육티(yukti, 이성), 그리고 아누바브(anubhava, 경험)를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힌두교에서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한 종교적 토론을 할 때는 먼저 영감된 경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 후에 합리적인 논쟁을 견딜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이성(yukti)의 경전들을 그 요점에 적용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천에 있어서 진실과 연결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여 시험하는 세 가지 단계를 진행하는 것이 관례다.

아빠사미의 연구에 대해 첸치아(P. Chenchia)는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혹은 매개되지 않은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지식은 항상 성경과 교회의 전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중요한 것으로, 다소 다른 형태로 유럽 종교개혁의 시금석이었으며, 오늘날 힌두교와의 어떤 종류의 대화에서도 필수적인 질문이다. 아빠사미는 ‘오늘날 인도에서 기독교 신학의 일차적인 과제는 우리 권위의 근원을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쓰면서, 그 중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단언한다.

그는 스스로 망설이지 않고 성경 또는 슈루띠(shruti)에 우선순위를 둔다. 단어 슈루띠는 문자적으로 ‘듣는 것’을 의미하며, 힌두의 용법 속에서는 리쉬들(rishs)이나 선견자들에 의해 절대자로부터 직접적으로 ‘들려온’ 것이어야 하는 베다에 대해서 사용한다. 그 후 이 단어는 ‘계시’를 의미하기 위해 파생어 형태로 등장하며, 따라서 단순히 사람들에 의해 ‘기억’(스므리띠, smrti)됐다기보다는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경전을 독점적으로 지칭한다.

아빠사미의 용법에 있어서 주요한 계시는 복음서에서 나온다. 예수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제공하는 ‘해석’ 또한 근본적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삶과 가르침만큼의 동일한 중요성을 갖지는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역사적인 성육신이 일어난 배경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다. 이에 대한 그의 생생한 묘사를 보자.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은 집의 문지방 위로 비취는 빛에 대해서 말한다. 그 빛의 광선은 각각의 방향에서 흩뿌려진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가르침은 그의 앞에서 그리고 그의 뒤에서 모두 그러한 계시의 기나긴 역사의 과정을 조명하는 빛이다. 그로부터 뻗어 나오는 그 빛 속에서 우리는 그의 앞에 있었던,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지혜자와 예언자들의 직관 속에 있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아빠사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며, 우리가 읽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포함하는 모든 성경은 그의 빛 가운데 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이 그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 신앙의 첫 번째 법칙 또는 쁘라만이다.

육띠(yukti)라는 단어는 논쟁, 추론 또는 이성을 의미한다. 쁘라만의 맥락에서 아빠사미의 의미는 성경으로부터 유래된 모든 신학적인 신념은 이성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신학을 위한 핑계거리가 아니고, 오히려 신학적인 진술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과 논쟁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며, 그 진술들이 솔직하고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두 가지 의미에 있어서 슈루띠인 성경을 통한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에 의해든, 전통적인 힌두교도에 의해든 논리적인 검토의 막대로부터 자기를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 속에서 진실이라고 입증할 수 있을 때만 하나의 신념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빠사미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순다르 싱을 추억하면서, 그리고 그 자신의 깊은 영적 경험과 더불어 모든 신학적인 진술들에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아누바브, 또는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세 번째 전통적인 쁘라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이들만이 그분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다.

아빠사미가 세 가지 전통적인 힌두교의 쁘라만에 추가한 네 번째 쁘라만은 바로 교회, 혹은 사바(sabhā)다. 이로써 그는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를 자신의 네 가지 기독교 쁘라만을 배열함에 있어서 두 번째 자리, 즉 성경의 바로 다음이자 이성 또는 경험의 앞자리에 배치하곤 했다. 이 방식으로 그는 ‘교회교의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부여하는데, 이는 첫 번째 권위인 성경의 통제를 받는 두 번째 권위로서 자기 자신의 사상을 따르는 각 개인들의 경향성을 검증하는 권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단순히 각 개인에게가 아니라 당신의 교회에 계시 하신다는 것은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갖는 본질에 속한다. 힌두교는 이런 점에서 비참할 정도로 결핍되어 있다. 신이 각각의 개인을 다루는 것은 완전히 인정하지만 하나의 집단으로서, 또는 집단적으로 모인 신자들 가운데서의 신의 임재를 명확히 하지 못한다.


아빠사미의 쁘라만, 특별히 성경에 대한 그의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구약성경과 힌두교의 경전들(샤스뜨르[shastras])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잠시 살펴볼 것이다. 일부 인도 기독교인들, 특히 첸치아는 구약성경이 인도교회에는 거의 의미가 없으며, 적어도 어느 정도 그 위치와 기능을 힌두교 경전들에 의해 취할 수 있다고 주장해 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첸치아와 달리 아빠사미는 구약성경을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거부하는 마르시온주의의 인도적 형태를 지향하는 어떤 경향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힌두경전들이 구약성경을 보충하고 인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예비(praeparatio evangelist)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본다. 파커의 『힌두교의 왕관』(The Crown of Hinduism)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아빠사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도의 고대 경전에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 경전들 속에는 또한 열정적으로 흡수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할 많은 교리와 이상이 있다. 예수께서 동시대인들이 모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책망하셨다면, 그와 동등한 강도와 격렬함으로 그분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을 지시하는 소멸되지 않는 가치를 지닌 교훈을 남겨두고 떠나간 라마누자(Rāmānuja)와 마니까바츠까르(Manikkavacakar), 투까람(Tukaram), 까비르(Kabir), 차이따냐(Chaitanya)등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다. (Bhakti, p.166.)


그가 소개하는 성인와 현자들의 목록에는 박띠 마르그에 속하는 이들만 포함되어 있으며, 상까라가 이 목록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빠사미가 1930년에 출판한 『사원의 종들』(Temple Bells)이 바로 이 ‘동화’(同化, assimilation) 사상에 대한 추구였다. 이 『사원의 종들』은 아빠사미가 힌두의 종교 문헌들로부터 읽은 내용을 선별하여 만든 책으로서 지금까지 출판된 이런 종류의 명시선집들 중 최고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영어로 번역된 최고의 힌두 박띠 서정시들을 담은 진정한 보석이다.


10.  “이는 내 몸이라”


조직화된 교회에 대한 아빠사미의 태도는 많은 인도 신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며, 안수받은 성직자로서 그의 뛰어난 경력은 그 교회 내부에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성례전의 본질에 대하여 기록한 흥미롭고 심오한 글들을 살펴보고, 그가 자신이 가진 힌두교에 대한 지식을 성만찬 신학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지점들 가운데서 두 가지를 간략히 검토할 것이다.

첫째, 제4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가르치심과 동시에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를 먹으라고 권하신다. 그러나 힌두들이 이 이상하고 심지어 혐오스러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묻는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그리고 성례전은 때때로 정통 힌두들에게 혐오스러운 행위인 고기를 먹도록 기독교인들이 강요당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례로 오해를 받는다. 성례전의 사상을 힌두에게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아빠사미는 따이띠리야 우빠니샤드의 한 구절에 주목한다.

음식이 브라흐만이다.
음식으로부터 생물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식으로 생물들은 태어나고 살아가며
그들은 음식으로 들어가 소멸한다. (Tait. Up. 3.2)


이 글은 힌두교에서는 흔하지 않은 방식인데, 여기서 음식으로 보이는 물질이나 신체는 신의 힘과 은총의 매개체가 되거나 효과적인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힌두교는, 특히 현대 간디주의 형태에 있어서만큼은, 몸과 그 욕망을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초기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이었고, 이에 따라 그들은 예수께서 진정한 육체를 소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제4 복음서의 저자는 그런 가현설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로고스가 육체가 됐고, 몸과 물질, 음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기 위한 적절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들을 논하면서 아빠사미는 성례전, 특별히 주의 만찬의 의미에 대한 훌륭한 진술을 하고 있다.

보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물과 음료가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 되는 것과 동일한 유기적인 방법으로 우리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을 만드신다 … 그리스도는 스스로 떡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의 영적인 에너지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보호하심에 굴복시키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내면의 자아로부터 우리를 지도하신다. (Bhakti, pp. 142, 147.)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육체적인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인간의 몸을 가지셨으며, 우리 자신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라는 선택된 물리적인 요소를 통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오는 것이다.

둘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말씀, ‘이는 내 몸이라’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아빠사미는 실제적인 임재, 즉 화체설에서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 등등에 대한 그들의 논의와 함께 서구의 성례전 신학의 논쟁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모든 피조된 존재들이 ‘하나님의 몸’이라는 라마누자의 관점으로 눈을 돌린다. 그는 라마누자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지각 있는 존재와 지각없는 존재들은 함께 절대적 자아의 몸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그 존재들은 완전히 통제되고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에 의해 지탱되며 절대적으로 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Ramanuja, Sri Bhashya II. 2. 9)


그래서 예수는 떡과 포도주라는 피조된 요소들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취하신다.

떡과 포도주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희생하신 그 지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 그 떡과 포도주는 우리 주님의 새로운 몸이 되어야 했다. 그것들을 맛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된다 … 진실로 떡과 포도주는 그것들을 통해 주님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자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며, 사람들을 자신과 내밀하고 친밀한 교제 속으로 모으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몸과 피가 되었다. (Gospel, p. 208.)


이는 참으로 인상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본질(substance)과 사건(accident), 심지어 기호와 상징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떡과 포도주의 이 ‘몸’을 선택하여 그것을 사용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으면서 그 뒤에 있는 ‘정신’, 즉 그리스도 자신을 받는다.


11.  라마누자의 유비


아빠사미는 라마누자가 인도 기독교 신학을 철학적으로 구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그가 강조한 하나님의 ‘사랑’(박띠 문헌의 중심에 비추어), 그리고 그가 사용한 ‘안따리야민’과 ‘아브따르’의 개념들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각각 어느 정도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개념 이외에도, 아빠사미는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하나님과 창조된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라마누자의 ‘영혼-육체’의 교리를 가장 흥미롭게 사용할 수 있는 용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그가 네 가지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유비로 변형시킨다. 일부 서구 신학자들은 ‘기독론적 유비’ 또는 ‘은혜의 역설’에 대해 말했는데, 이 경우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의 결합이라는 신비는 성경과 교회, 그리고 성례전에서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의 역설에 대한 하나의 유형이 된다. 어쩌면 라마누자의 이런 유비에서 적절한 보호 장치를 갖춘 개념들이 인도의 교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칼케돈 신조보다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아빠사미가 그 생각을 펼치는 첫 번째 맥락은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자신의 몸으로 만들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다 …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성품이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객체로서의 세계는 그분이 스스로의 본성을 알려주며 그분의 신자들의 예배와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이다. (Gospel, p.206)


이것은 라마누자 자신이 사용한 유비로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상까라의 일원론을 피하기 위한 유비이다. 라마누자에게 있어서 창조는 실재로 간주되고, 하나님은 그 안에 안따리야민(antaryāmin)으로 내재되어 있다. 라마누자의 유비는 확실히 창조된 세계에 상까라의 아드바이타에서는 갖지 못한 정도의 실재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그 유비의 두 번째 사용은 참으로 기독론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2의 몸, 즉 예수의 육신을 취하셨다 …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Gospel, p.207)


아빠사미는 여기서 인도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는 서구의 기독론 논쟁 시대에 사용한 용어 대신에 라마누자의 유비를 사용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단일한 인격이시요, 육체와 영혼의 연합이시며, 완전히 인간적이고 피조된 육체를 가지셨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내면의 통치자 또는 안따리야민으로서 내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유비는 인상적이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너무 압력을 많이 가하면 무너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영혼’은 로고스이며, 따라서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아폴리나리스의 가현설적인 방향으로 너무 많이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함으로써, 정반대 방향이나 인본주의적인 방향으로 지나치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육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로고스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아빠사미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보편적인 인간 사이의 차이를 지적함으로써 후자의 어려움을 다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로고스가 모든 인간에게는 내재되어 있지만, 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육체가 되는’ 예상치 못한 단계를 ‘단순한 내재보다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더 효과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로고스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하시며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육신하신다. 그리고 믿음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이 박따의 심장부에 거하시게 된다. 내재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래서 성육신이 독특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빠사미가 성례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해 만든 유비의 세 번째 용도를 보았다. 네 번째 용도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또 다른 몸을 취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교회이다.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삶은 끝이 났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통치가 실현되는 도구로서 세상 속에 자신의 교회를 심으셨다. 그 교회는 또 다른 매개체가 되어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고 이를 세상에 효과적으로 표현해야한다. (Gospel, p.20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는 인간적인 기구이지만 또한 신적인 기구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통치자, 곧 안따리야민으로서 그 안에 임재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 몸의 영혼이라기보다는 ‘머리’라고 말하지만 그 머리는 분명히 그 구성원들을 연합시키고, 다스리며, 그들을 교회 자체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Mind) 또는 통치자의 의미라는 사고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유비는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단순히 자신의 교회 안에 계시는 ‘내재자’가 아니며, 역동적으로 현존하시고 지도하시며 인간의 기구, 곧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인간 구성원들을 통해 활동하면서 이를 자기 뜻과 목적에 따라 다스리는 분이시다.

아빠사미가 우리를 이끌고 온 것은 이 지점까지이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이 유비는 어쩌면 우리를 더 멀리까지 이끌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일차적인 라마누자의 유비, 즉 하나님과 세상의 유비를 철저히 기독교적으로 사용하는 데까지 꿰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 이루고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생각을 그분께로 사로잡아 오기 위한(고후 10:5) 하나님의 도구이다. 골로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사상을 서로 밀접하게 연결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우주는 ‘모든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언젠가 그분은 창조된 세계 전체에서 모든 것 가운데 ‘으뜸’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모든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분이시다.’(골 1:18)

지금 그분은 교회를 조직하는 원리인 머리이시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분은 ‘으뜸’, 즉 ‘만물’을 조직하는 원리인 머리가 되실 것이다. 우리는 라마누자의 세상은 지금(now) 하나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생각을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궁극적으로 마지막에는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것이요,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완전한 도구가 될 것을 믿는다.

따라서 이 유비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 곧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포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종말론적으로 만물가운데서 으뜸으로 인정되시기 위하여 ‘지금’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아빠사미가 제공하는 세 가지 파생된 의미들, 즉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례전, 교회와 관련된 라마누자의 유비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의미있게 신학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유비의 본래적인 적용, 즉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영혼과 몸의 관계로 묘사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볼 때만 기독교적 방식으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유비를 그렇게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물질과 역사의 세계에 목적과 참여라는 의미를 주게 되며, 따라서 그렇게 다루어질 때 이 유비를 사용하는 것이 인도 교회를 위해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된다.

아빠사미에 대한 논의의 결론을 맺으면서 우리는 그가 라마누자의 철학에 절대 얽매이지 않으며, 우상숭배와 윤회, 카스트 등 많은 점에서 라마누자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라마누자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다. 하지만 우리는 아빠사미가 박띠 전통과 라마누자의 철학적 표현이 기독교 메시지를 선포하고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인도적인 ‘도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도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힌두철학과 사상의 기초적인 내용과 용어들을 미리 익혀두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번역한 <인도기독교사상>(CLC, 2020)의 부록에 보면
이 책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설명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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