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15> 새창조의 신학 : P. 첸치아

2021. 6. 29. 12:49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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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디페디 첸치아(Pandipedi Chenchia, 1886-1959)는 인도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독창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어린 소년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은 힌두교 개종자로서 그는 언제나 자기 선조들의 신앙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 그 개종자는 힌두교를 자신의 영적인 어머니, 즉 과거의 영적 가치들이란 의미에 있어 자신을 양육해 준 어머니로 생각한다 …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심은 힌두의 유산을 존중하는 태도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Rethingking Christianity in India (2nd edn. 1939), p.49.

 


첸치아는 평신도로서 뛰어난 법률가였고, 푸두꼬따이(Pudukkottai) 주의 주심 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청년 시절에는 그의 친구이자 처남인 차까라이와 함께 훌륭한 스코틀랜드 선교사요, 마드라스 기독교대학의 학장이었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 박사의 영향을 받았는데, 밀러의 자유주의는 다른 측면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첸치아는 마드라스에서 활동하던 모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인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출판물, 「다시 생각하는 인도 기독교」(Rethinking Christianity in India)의 제목에서 유래한 이름인 ‘재고 그룹’(Rethinking Group)으로 알려진 다소간 비정통적이지만 대단히 자극적인 사상가들의 집단에서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이 책은 1938년 마드라스 탐바람(Tambaram)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의 선교대회 전날 저녁에 있었던 핸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의 바르트주의적인 공격, 즉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메시지」(The Christian Message in a Non-Christian World)에 대한 인도의 응답으로 등장한 유명한 책으로서, 그 안에 그려진 1938년의 인도교회는 서양에서 수입된 사상과 형식을 추종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첸치아는 이 책의 주요 기고자 중 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 스스로 어떤 책도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적인 글들은 마드라스 「가디언」(Guardian)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참여한 두 권의 주요도서, 즉 「다시 생각하는 인도 기독교」와 ?「아스라마의 과거와 현재」(Asramas Past and Present)에서 수집되어야 한다.

신학적인 글쓰기에 있어 첸치아는 몇 가지 뚜렷하고 눈에 띄는 요소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 힌두교에서 개종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20세기 인도의 세속 사회에서 성공적이고 명예로운 경력을 스스로 개척한 사람으로서 첸치아는 자신이 가진 인도적이고 진정 힌두적인 문화유산이 가장 조직적인 형태의 기독교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할 수 있는 한 그 유산을 최대로 유지하기를 열망했다. 따라서 그는 제도권의 교회와 어느 정도 갈등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평생 동안 그 교회의 구성원으로 남아있었다.

그에게 교회는 기구주의에 빠진 것처럼 보였고, 서구 열강에 세워진 교회를 맹목적으로 모방한 하나의 복제품으로 보였다. 이런 기구화된 교회를 향한 그의 반감은 동시에 교회의 공식화된 교리로도 확장됐는데, 이는 그 교리들이 성령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억제하는 짐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교회의 교리적 진술과 고백에서 벗어나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가공되지 않은 진실’이라고 명한 그것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간 진화의 새로운 단계를 대표했다. 그분은 참된 인간이자 새로운 인간이다. 만일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그와 같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오는 것을 보게 되고, 그 나라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들’이며, ‘새로운 피조물’, 그리고 ‘성령의 요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는 기대하는 것이다.

그의 글의 철학적 배경을 구성하고 그 특징적인 요소들의 많은 부분을 제공해준 두 가지 큰 영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두 가지는 저명한 폰디체리의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의 ‘통합 요가’(integral yoga)와 꿈바꼬남(Kumbakonam)의 마스터 CVV의 실제적인 가르침이다.

첸치아에게 있어서 이 두 힌두 사상가들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마치 플라톤이 순교자 저스틴을 도왔던 것이나 상까라가 우빠디야이의 통찰력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이 두 사상가는 그의 신학적인 탐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첸치아가 스승으로 모신 것으로 알려진 마스터 CVV는 카우베리강 제방에 위치한 꿈바꼬남에 있는 한 요가학파의 구루였다. 그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실제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집착(non-attachment)을 가르치는 힌두교의 주된 흐름에 대한 반전이었다.

마스터 CVV의 가르침은 세계-긍정(world￾affirming)이다. 창조는 그에게 있어서 단순히 마야가 아니며, 오히려 그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의 능력(shakti)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생에는 의미와 희망과 약속이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 발산은 새로운 삶의 질을 가져온다. 이 삶의 속성은 마스터 CVV가 ‘즐거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삶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고립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발견된다. 이 새로운 삶은 특별한 요가나 삶의 규율을 통해 공동체에서 실제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 삶의 주요 특징은 새로운 종류의 영적인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첸치아는 스스로 마스터 CVV의 제자가 됐고, 이 접근법을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의 본질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힌두교 분파들과는 달리, 인간의 외부(outside)로부터 들어가서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도래를 바라보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 방식은 창조라는 사실에서 움츠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기뻐하면서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

비슷한 방식으로 첸치아는 스리 오로빈도의 작품 속에서 매력적인 여러 요소를 발견했다. 그는 폰디체리에 있는 오로빈도의 유명한 아쉬람에 방문했다. 그가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오로빈도의 사상적인 측면은 변혁시키는 힘을 가지고 외부로부터 오는 영적인 힘이라는 개념과 위로부터의 이 하강 때문에 능력을 부여받은 새로운, 그리고 더욱 나은 인간성의 유형이란 진화의 개념이었다. 여기에는 베르그송의 영향이 드러나는데, 그의 영향력은 오로빈도와 첸치아 자신의 사상 모두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상과 더불어 그는 세 번째 가르침, 즉 ‘통합 요가’(integral yoga)의 사상으로 나아간다. 이 통합 요가는 이 새로운 종류의 삶을 실제로 실천할 수 있고, 사실상 새로운 친교를 키워갈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새로운 영적인 권능에 의해 힘을 얻은 이 통합 요가의 새로운 삶이 한 아쉬람에서는 일상적인 현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두 명의 힌두 사상가들이 어떻게 첸치아의 신학을 위한 기폭제로 작용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만일 피할 수만 있다면 서구적인 개념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상까라의 절대적 일원론을 창조와 몸에 대한 모호한 태도와 그 이론이 갖는 금욕주의 및 비집착의 경향성으로 인해 거부했다. 유사하게 그는 박띠의 접근법도 거부했는데, 이는 그에게 너무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로빈도의 작품 가운데서, 그리고 마스터 CVV의 실제적인 지침 가운데서 그는 전적으로 힌두적인 사상의 계보를 찾았으며, 특히 첸치아 자신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진화론과 유전학 분야에서의 근대 서구사상의 발견들을 참고했다. 이런 사상가들을 자신의 ‘도구’로 삼아 그는 자신이 20세기의 교육을 받은 힌두교도들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해주는 위치에 있다고 느꼈다.

첸치아는 자신의 견해를 완전하고 종합적으로 제시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기독교 신앙을 조직적으로 해설하려는 생각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저술들을 조사함으로써 주요 기독교 교리들에 대한 그의 이해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의 관점이 그의 선배들의 작업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요소들을 보게 될 것이다.

 

1. 그리스도에 관한 가공되지 않은 사실

 

첸치아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며, 따라서 그의 사상을 꿰뚫어 보려면 그 어떤 시도보다 그의 기독론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첸치아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구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자. 교회의 교리와 교의는, 서구로부터든지 아니면 과거로부터든지, 사도들로부터든지 아니면 현대의 비평가들로부터든지, 그것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시험해 보아야 한다.  - Rethinking, p. 130.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실은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적으로 접촉하기 위해 나아오는 신자들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아누바브(Anubhava)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이시며, 그의 본성은 무엇인가?

첸치아는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경험의 그리스도’라는 사상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그것은 역사의 예수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림과 맞지 않았듯이, 자신들의 선입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순한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성, 인간성은 알렉산드리아식 접근법이라기보다는 안디옥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오직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성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사실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인간(그리스도)이라는 사상을 통역하셨고, 그분을 삶의 전쟁터 속으로 내보내셨다.  - Rethinking, p.56.

 

엄밀히 말하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상이 단순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가능성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가 역사적이고, 참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행위 속에서 볼 수 있었으며, 그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시고, 아직도 완전한 인간이시며, 여전히 ‘새로운’ 인간이시다.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은 창조 안의 새로운 질서의 탄생이다. 이는 까르마에 의한 한계가 아닌 생명의 출현이며, 죄로 오염되지 않고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이요,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불멸 본성에 참여하는 인간의 출현이며,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다.  - Rethinking, p.166.

 


그러나 이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적인 요소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인간적인 요소는 영구적이며, 실제로 첸치아는 그리스도의 통상적이고 영구적인 행위의 영역이 오히려 삼위일체의 영원한 두 번째 위격으로서보다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느낀다.

여기서 그는 의식적으로 힌두교의 아브따르 교리를 반대하는데, 이 아브따르는 제한된 기간, 그리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한 이후에는 다시 완전한 신격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첸치아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영원함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인자’(Son of Man)라는 호칭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인도 기독교 신학은 예수를 근본적으로 사람의 아들로 간주하며, 그분은 변화의 한복판에서 이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을 간직하고 계신다 … 성육신을 하나의 모험과 에피소드로 만드는 고전적인 교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구속사역이 완수된 후에 예수께서 삼위일체 안의 예수 이전의 지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이 고전적인 교리는 예수가 불변의 핵심이라는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분을 ‘영원히 인간이신 분’으로 해석하는 인도 기독교 신학은 그분을 역사 속에서 우리 인간을 향해 변치 않으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  - The Guardian, 1943, p.6, 2, 47.

 


기독교 신앙의 ‘영원히 인간이신 분’으로서, 그리고 ‘변치 않는 핵심’으로서 예수님은 성육신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를 포함한 모든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데, 이것이 첸치아 기독론의 주된 사상의 일부이다. 첸치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의 관계를 다루는 방향으로 전환함에 있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회피한다. 
「다시 생각하는 인도 기독교」의 흥미로운 한 구절에서 그는 말한다.

 

(예수님은) 결코 절대적이고, 접근하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며… 예수님은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하여 서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수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이시다.
- Rethinking, p. 158

 

여기서 첸치아는 두 가지 전선, 즉 크래머의 「기독교 메시지」(The Christian Message)에서 매개된 것으로서의 바르트에 반대하여, 또한 니르군 브라흐만(Nirguna Brahman)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아드바이타적 개념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다.

다른 말로 아빠사미처럼 첸치아는 형이상학적으로 성부와 하나이신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전적 기독론의 이해에 반대한다. ‘동일한 본질의’라는 말은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아빠사미나 람 모한 로이와 같이 그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면서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라는 본문을 인용한다.

 

기록 가운데 묘사된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시다. 그분은 그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신다(요 14:28). 우리는 그분을 바로 그 하나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분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인간의 척도를 초월하신다. 우리는 그분을 다름 아닌 인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단순히 하이픈을 넣은 하나님-인간이 아니라 신인(God man)의 조화로운 그림을 제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모두를 각자로부터 분리하여, 그리고 두 분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여 유지하기를 원한다.  - Rethinking, p. 54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칼케돈회의의 기독론에 대한 명백한 공격이다. 첸치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어떤 새로운 존재, 하나님이나 인간과는 무엇인가 다른 존재이며, 첸치아 자신이 선택한 생물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새로운 출현 또는 ‘변종’(mutation)이다. 그는 심지어 다소 아리안적인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산물’(product)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예수님이 인간에 대해서 갖는 지위는 인간이 동물에 대해서 갖는 지위와 같다 … 인간은 단지 성취할 뿐 아니라 열등한 피조물을 초월하기도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나 인간이 아니며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 또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를 덮으셨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그분은 새로운 피조물, 곧 우주의 새로 창조된 부류의 주인이요 스승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들어가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인간이신 어머니, 즉 여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는 우리가 동물을 초월하듯이 우리를 초월하신다. 이성은 우리의 (동물에 대한) 차이이고, 성령은 그분의 (우리에 대한) 차이이다.  - Rethinking, p.62

 


이는 이 진술이 양자론이라는 것과 아울러 마지막 문장은 분명히 아폴리나리스의 이단적인 언명이라는 점을 지적하여 이를 전통적인 기독론적 방식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첸치아는 예수가 첫 번째이자 최초의 사람, 곧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들어가신 사람이자 성령이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에게로 들어가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첸치아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폐기될 수 없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창조’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새로움’에 있다.

 

그는 새로운 창조의 아디-뿌루쉬(adi-purusha)다 … 예수 안에서 창조는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종족의 기원이다.  - National Christian Council Review (1943), p.363

 


따라서 비록 첸치아가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호칭은 새로운 존재, 살아있는 존재, 신인(神人),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로서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육신을 통해 무엇이 되셨는가에 대한 생각은 그에게 그분의 선재에 대해 숙고하는 것보다도 훨씬 흥미로운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만일 진화가 인도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 되어야 한다면,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의 선재가 아닌 새로운 형태와 능력으로 그분이 우주적인 과정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어쨌든 예수를 모든 인간적인 상황 밖으로 끌어올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제시하려는 불안함 가운데 있던 라틴의 고립주의는 우빠니샤드와 상까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이후의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인간을 하나님과 동일화하는 데 있어 상당한 어려움이 발견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의 교리와 그 자체로 결코 화해할 수 없다.  - The Guardian, 27-2-47.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 안에서 연합된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간극은 연결되고, ‘아들’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출현한 것의 ‘새로움’이라는 하나의 표징을 갖게 된다.

 

‘아들’이란 단어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성보다는 약간 낮은 연합의 척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범주의 차이 이상의 어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 그 두 존재는 예수 안에서 만났는데, 단지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융합되어 하나로 섞여 있었다. 힌두교는 항상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갈망한다. 그 선언은 ‘아함브라흐마 아스미’(Aham Brahma Asmi)라는 브라흐마의 격언에 대한 우리 주님의 확언이었다 … 예수 안에서 이는 실현되지 않은 동경이 아닌 역사 안에서 최초로 성취된 실재였다.   - Rethinking, p.168.

 


여기서 다시 한번 서구의 비평적 방법으로 기독론적 범주들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첸치아가 언급하는 융합과 혼합은 칼케돈 신조에 대한 유티케스(Eutyches)의 비판과 비슷해 보인다. 위대한 명제들, 즉 마하바끼야(mahāvākya)를 적용하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로운 연합과 우리가 힌두교 개혁가들에게서 이미 살펴보았던 아들과 아버지의 실질적인 연합 사이에서 같은 혼란을 발견한다.

그러나 첸치아의 목표는 우주의 역사에서 출현한 완전히 새로운 요소인 그리스도의 새로움과 인간과 세계의 변화 열쇠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형이상학적 연합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분을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으로부터 기인하는 하나의 ‘인격’(personality), 즉 ‘새로운 창조’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의 구절 중 일부는 유티케스적이거나 아폴리나리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는 그를 가현설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실제로 기독교적 논쟁의 전통적인 범주는 그의 관점에 전혀 적용될 수 없어 보인다. 첸치아가 아브따르의 개념을 예수께 대해 적용하기를 거부했다고 할지라도, 성육신에 대한 그의 이해가 유대교나 전통적인 기독론의 철학적 범주들로부터 보다 힌두교로부터 더 많은 영감을 끌어낸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2.  죄

 

첸치아는 자연적인 인간과 그의 상태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별로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전체 신학이 ‘새로운 창조’를 지향하며,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야 할 존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는 비베카난다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구 신학이 죄에 집중하면서 해야 할 말을 다하고 어쩌면 그 이상을 말해 왔다고 느낀다. 그는 바르트와 크래머의 이른바 ‘급진적 성서적 실재론’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구속의 드라마가 시작됐을 때 인류가 처한 곤경을 꽤 잘 묘사하고 있지만, 그 대속과정의 결과에 대한 그림을 충실하게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 Rethinking, p.178.

 


따라서 그는 죄의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도 신학에서 중심을 차지해야 할 주제는 죄라기보다는 ‘새로운 생명의 충만’임을 느끼면서, 전통적인 타락의 교리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인류가 존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비참한 몰락에 빠지고, 역사를 통틀어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는 삶의 관점은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볼 수 있다.   - Rethinking, p. 165.

 


단지 예수가 참된 인간, 즉 ‘까르마가 없는 인간’이듯이, 첸치아에게 있어서 자연인의 죄성은 까르마에 속박됨으로써 드러난다. 모든 죄, 모든 악한 행위는 열매를 맺으며 인간은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이 형벌에서 벗어날 그 어떤 수단도 없다.

 

3. ‘재생산하는 예수’

 

첸치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분이 하시는 일보다는 그분이 누구이신가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새로운 인간이요, 인류 진화의 새로운 단계이자 새로운 ‘변종’이시며, 인간을 위한 구원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이 새로운 유형의 존재의 첫 번째 열매이시며, 그분의 사역은 그와 함께 이 생명을 나누기 위해 인간들을 부르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분, 그 새로운 인간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며, 여전히 온전한 인간성을 유지하고 계신다. 그 안에서 그분은 그 인간성을 나눠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따라서 첸치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표현이 허락되는 한, 십자가보다는 부활과 오순절을 중심으로 한다.

첸치아는 그리스도와 어떤 종류의 연합을 마음에 그리고 있는가? 인도의 박띠는 목쉬(moksha), 또는 신과 연합하는 네 가지 특징적인 유형에 대해 말한다. 목쉬의 최고단계이자 가장 완성된 단계는 ‘사유지야’(sāyujya)인데, 신과 완전히 ‘결합’하거나 연합해 있는 상태다.

첸치아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연합을 사유지야의 한 종류로 본다. 그러나 이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화’(identified)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그 스스로 ‘하나의 그리스도’처럼 탈바꿈하는 사유지야이다. 우리는 이미 케샵 찬드라 센에게서 매우 유사한 표현을 보았다. 첸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인도 기독교인들이 가진 두 가지 큰 충동을 예수와 직접 접촉하고 싶은 욕망(쁘러티야끄쉬, pratyaksha)과, 예수의 이미지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중생에 대한 열망(뿌나르저늠, punarjanma)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즉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예수와의 사유지야를 위해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하고 말하게 했던 그 열망이다.   - The Guardian, 6-2-47.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관계를 설명함에서 있어서 첸치아는 아주 전형적인 자신의 신학이자 베르그송과 오로빈도의 영향을 보여주는 생물학적인 언어, 또한 그가 그처럼 관심을 가졌던 생물학적 연구들을 사용한다.

여기서 대체로 첸치아는 최근의 비평가인 H. 바그너가 ‘이중 종합’(double synthesis)이라고 부른 인도의 문화유산과 성경적 메시지의 종합과 더불어, 당시 서구의 신자연주의(neo-naturalistic) 철학과 성경의 메시지 사이의 종합을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음에도 신자연주의 철학에 아주 깊이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 안에서 거주하고 그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상태로 가는 것은 중생을 통해서다. 그리고 그 중생의 과정은 생물학과 유전학의 언어로 해석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면, 우리는 예수를 재생산해야 한다. 기독교는 법령이나 법률상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학의 문제다 … 예수에 대한 독특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기독교의 미래는 영적인 실험실에 놓여 있다. 인도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스스로 ‘중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복음전도는 예수를 재생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도의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새로운 생명의 창조에 이용해야 한다.   - D. A. Thangasamy in The South India Churchman, Oct. 1960에서 인용.

 


첸치아의 논지는 인간의 운명이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인종으로 진화하는 것이며, 그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로마서 8장 19절에서 발견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생산하는’ 과정, 또는 심지어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이다. 구원에 대한 그러한 견해는 용서와 죄를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여지를 남겨두는가? 우리가 보았듯이, 첸치아는 서구 신학이 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긍정적인 역동성보다는 죄의 제거라는 부정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자주 인용했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속은 죽음이 아니라 더 큰 생명에 의해 효력을 갖는다 … 구원은 단지 ‘죄없음’(sinlessness)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lifefulness)이다.   - NCCR (1943), p. 362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의 어떤 하나의 행위 때문에, 나아가 그 행위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우리가 받아들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그 자신의 ‘사실’(fact)에 의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변혁시키는 모험’에 의해였다.

결과적으로 첸치아는 속죄에 관한 모든 법률적이고 희생제의적인 이론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희생적인 해석이 힌두교의 배경을 가진 인도인들에게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지적하고, 속죄와 화해의 생각은 결코 역사적인 예수의 사역을 소진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기독교의 법리적 개념은 예수를 유대교의 이데올로기, 또는 로마 국가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축소하려는 시도다. 다시 말하면 이는 예수를 법률과 범죄, 형벌에 있어서 희생제물과 속죄라는 용어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 Rethinking., p. 164.

 


첸치아는 바울의 신학으로 바로 되돌아가는 ‘논리적 변별’(distinguo)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받아들인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믿음의 연합과 의심스러운 가치로 간주하는 속죄에 대한 법리 이론의 두 가지 사상의 입장을 분리하려고 노력한다.

 

예수의 유일성의 핵심에 도달함에 있어서, 우리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받아들인 바울신학의 절반으로부터 교리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기능을 하지 않고 있는 신학의 나머지 절반으로 바꾸어야 한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둘 다 예수를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피조물의 출현이자 인간의 운명에 있어서 새로운 장으로 간주한다 …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적 질서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전해진 우리의 스릴 넘치는 발견이다.  - Rethinking., p.59.

 


첸치아는 법리적인 이론을 거부하지만 그리스도와의 구원 관계가 단순한 도덕적 영향보다는 훨씬 깊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와 마주할 때 어떤 객관적인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생물학적인’ 사건, 즉 우리가 부활한 인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변화하는 사건이다. 이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어떤 단순한 도덕적 영향이 아니다. 그리고 특별히 감동적인 한 구절에서 우리는 악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깊이 이해하는 함축적인 의미를 포착하는 듯하다. 첸치아는 십자가의 전장을 기타(Gita)에 묘사된 쿠룩쉐트라(Kurukshetra)의 전장과 비교하고 있는데, 여기서 전차몰이꾼으로 위장한 끄리슈나는 아르주나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십자가의 감동적인 비극 속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열광주의와 보수주의, 사제의 반계몽주의와 스스로 결탁한 모든 권력과 모든 힘, 제국주의의 오만한 침략군이 사랑 이외에는 다른 갑옷이 없이 자신의 생명을 건 단 한 사람을 대항하여 배치됐다. 십자가와 십자가 그 자체로 이어진 사건 모두에서 우리는 세상의 권세들이 사랑의 절제와 부딪치고, 육체의 권세가 영의 권세와 격돌했던 역사를 보게 된다. 예수의 부활은 불행스런 비극에 대하여 정의감이 만들어 낸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성령의 승리, 현재에 대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승리, 전사와 지배자의 열정에 대한 사띠야그라하(satyagraha)의 승리다.   - Ashramas Past and Present, 1961, p.322.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 영향이론과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뉘앙스를 감지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강조점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에 있으며, 구원의 상호작용보다는 새로운 영적인 힘의 방출에 있다. 궁극적으로 첸치아에게 있어서 구원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실과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성령의 요가와 종말론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은 첸치아가 ‘성령의 요가’(the yoga of the Spirit)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기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신자는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의 삶은 성령의 요가가 되며, 그 삶의 영역은 하나님의 나라다. 첸치아는 로마서 12장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기독교 요가를 ‘스스로 그리스도의 모습과 형상으로의 변화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마펫(Moffatt)의 번역을 사용하여 그가 말하는 기독교 요가는 ‘그대의 숭배, 즉 영적인 의례’이다. 우리의 과업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깊은 단계의 영적인 경험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관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증언이 때때로 힌두교도를 실망하게 하고 실패하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힌두교도는 오직 우리 가운데 있는 흔해 빠진 기독교만을 본다. 그는 힌두의 보다 깊은 차원의 영적인 경험에 상응하는 어떤 것도 기독교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 성령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 Ashramas Past and Present, p.267.

 


첸치아가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이 기독교 요가는 반드시 오순절 이래로 이 땅에 영구히 거하시는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요가는 인간이 영적인 인격으로서의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을 통한 상당히 실제적인 활동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재창조하는 임무에 적용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는다. 첸치아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서, 다소 간결하고 생략된 문체로 쓰고 있다.

 

성령은 새로운 우주적 에너지요,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질서요, 그리스도가 개시한 하나님의 자녀의 새로운 유형이다. 복음은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든 것이다 … 하나님의 자녀는 진화의 다음 단계며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다음 단계다.  - Rethinking, p. 57.

 


첸치아는 성령을 ‘새로운 세계의 에너지’라고 말할 때 ‘마하샥띠’(mahāshakti)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위대한 힘’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 ‘샥띠’(shakti)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힘에 대해서 쓰이는 단어이지만 때때로 힘을 가진 여신으로 인격화된다.

우리는 브라흐마반답이 어떻게 이 단어를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리키기 위해 마야와 연결해 사용했는지를 보았다.

샥띠와 마하샥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첸치아는 성령의 인격성과 우주적 에너지 모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인격화된 신적인 에너지로서의 샥띠의 의미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함께 그는 인도가 성령의 요가라는 용어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개발하고 깊게 하기 위한 좋은 위치에 있다고 느낀다.

 

만일 내 직관이 건전하다면 ‘성령’(그 교리와 인격)은 인도 신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해석을 수용할 것이며, 인도 기독교 신학의 정초가 될 것이다.   - Rethinking. p.161.

 


새로운 창조와 성령의 요가라는 첸치아의 개념은 미래를 향해 지향된다. 그리스도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분과 이미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삶을 공유한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들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그리스도로 편입될 때가 오고 있다. 그리스도는 개인을 위해서 오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위해서도 오셨다.

 

우리는 각 개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한 가지 방법에서 소진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질서의 구속이나 우주적 진화에 관한 관계에서 우리 주님의 목적과 성취를 발견해야 한다 …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머리로서, 또는 인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더욱 높은 목적에 대한 창조적인 표현으로서 예수를 깨달아야 한다.  - Rethinking. p.161.

 


여기서 첸치아의 사상과 떼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사상 사이에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다. 둘 다 생물학적인 용어로 생각하고, 둘 다 베르그송의 창조적인 진화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첸치아는 드 샤르댕의 개념들, 즉 어쩌면 인류와 우주가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되는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와 ‘오메가포인트’(Omega-point, 궁극의 종착점이지만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환점이라는 의미-역주)라는 개념에 전적으로 동의해 왔던 것 같다.

첸치아의 해석이 결코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사역과 역동적인 방법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하나님의 내재적인 임재를 수동적으로 즐기는 것일 수가 없다. 그는 아마도 아빠사미를 염두에 두고 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깨달음(God-realization)의 수단으로서의 박띠 마르그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참된 길은 역동적인 길이요, 우주적 구원의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길인 반면, 박띠 마르그는 뒤로 물러서는 길이다. 그는 냉혹하게 언급했다. “인도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도외시해 왔으며, 기독교 메시지로부터 박띠 마르그를 조각해 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의미 있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능력에 의식적으로 복종하고, 그 능력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은 오직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힌두교는 때때로 종교 생활을 바다로 흐르는 강, 모든 구별이 사라지고 신과 합일하는 바다라고 말한다. 첸치야는 이 그림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거부한다. 그런 다음 그것을 뒤집는다.

 

영원한 생명은 강물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속박된 영이 창조되지 않은 절대자의 광활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해방이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 절대자를 옷입는 것이다. 
- Rethinking. p.313.

 


영원한 삶, 그 나라의 삶은 오로지 우리의 삶이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침략을 당할 때만 찾아오며, 성령의 힘이 우리에게 미치는 장소, 바로 그곳에 서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우리의 임무다. 숲속 은자의 집에 대한 이상으로부터 거대한 폭포가 있는 곳에 자리잡은 현대의 수력발전소로 돌아서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스도 이후 우리는 신에 대한 깨달음(God-realization)의 숲속에 거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폭포를 찾는데, 그 폭포는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한 새로운 에너지를 방출할 것이다.   - Rethinking. p.313.

 


이 변혁을 위해 우리는 오메가포인트가 도래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종말론이 실현되고 그 나라가 시작될 수 있고 또 지금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5. 구약성경인가 힌두 경전인가?

 

첸치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구약성경이 인도에 가치가 있는지를 질문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견해들을 마르시온주의로 분류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 구약성경의 하나님 개념을 비판하면서 마르시온에 대한 동의와 함께 그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의 견해는 구약성경은 신약에 비해 훨씬 열등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구약은 사실상 거의 필요가 없고, 결정적으로 구원을 위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의 가르침, 특히 예언자들과 몇몇 시편의 윤리적 가르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의 최종 평결은 부정적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들 가운데 로마인 또는 그리스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산상수훈을 파악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힌두교도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복잡한 바울신학을 이해해야 하는가?
- The Guardian, 20-2-47.

 


그는 제안하기를, 그리스적이거나 힌두교적인 사고형태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성육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구약성경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육신의 개념은 그것이 이슬람교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유대교 사상에 대해서도 완전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를 반대하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바울이 비 유대적 배경에서 온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성경 전체가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결정한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이는 첸치아로 하여금 왜 힌두교의 경전(shastras)을 하나님이 인도 사람들을 위해 선택한 복음의 예비(praeparatio evangelii)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지 계속 질문하게 한다. 그는 마태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제공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자들의 언급이 사건 이후에 선택됐으며,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비슷한 예언은 힌두교 경전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에 비추어 선택지들을 만들고, 힌두교 안에서 구약성경에 해당하는 자료를 고를 수 있다. 이것이 정확히 초기 기독교인들이 한 일이었고, 나중에 힌두교 개종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 The Guardian, 20-2-47.

 


많은 시선을 끄는 ‘기독교의’ 예언들은 다양한 힌두 박띠 문헌의 형태로 알려져 왔다. 예를 들어 마이소르의 「링가야트들」(Lingayats)과 구자라트의 ?날랑까 아브따르(흠이 없는 성육신),
그리고 어느 한도까지는 아빠사미의 명시선집 「사원의 종들」(Temple Bells)을 비롯한 다른 유사한 책들이 그가 여기서 지적한 방향의 한 단계를 대표한다.

하지만 모든 인도의 신학자들은 첸치아의 선례를 따르기를 거부해 왔다. 그리고 그의 성서적 식견과 비판적 감각은 그가 가진 신학적 통찰력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성경에 깊이 정통한 평신도였지만, 주석적인 작업보다는 신학적인 작업에 훨씬 더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많은 힌두 문헌이 ‘예비’(praeparatio)로서의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인도는 서구에서 그러했던 것보다 구약성경을 폐기해야 한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6.  왜 교회인가?

 

많은 인도 기독교 신학들처럼 조직된 교회에 대한 첸치아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힌두교 배경에서 교회에 들어온 그는 교회가 질식할 정도로 외래적이고 서구적이며, 내향적이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그리스도인의 삶보다는 행정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도교회의 삶에는 그런 비판을 정당화할 만한 것들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들이 신앙의 근간이 되었던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직접 접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의 행정과 계층구조, 재산, 전례, 고정된 교의와 교리들을 비롯한 기타 모든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제거되어야 할 특징들이었다. 첸치아는 제도화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고, ‘새로운 피조물’의 성령 충만한 교제가 그가 친숙했던 가시적인 형태의 교회보다 더 그리스도의 뜻과 부합됨을 믿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스스로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서 교회로 향했을 때 기독교는 잘못된 변화를 택했다 … 기독교는 하나의 실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대신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베드로가 3천 명을 그들 가운데 더했을 때 교회는 그 나라를 체포했다. 이날은 그 나라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날이었으며 교회를 위해서는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 The Guardian, 8-2-51.

 


이는 제도화된 교회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데, 그는 분명히 그런 제도화가 성령의 사역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새롭고 생명력 있는 형태를 찾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통상 한 구루의 제자로서 가장 위대한 단순성을 가진 삶을 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인 고대 힌두교 개념의 아쉬람(ashram)으로 전환했다.

이 아쉬람에 대한 이상은 수 세기 동안 힌두교에서 기능하지 못했지만, 타고르와 간디에 의해 민족 투쟁을 위한 훈련장으로 성공적으로 부활했다. 많은 기독교 아쉬람들이 시작됐고, 이들에게 첸치아는 매우 큰 호소력을 갖게 됐다. 첸치아와 그의 친구들이 ?아쉬람의 과거와 현재?(Ashramas Past and Present)라는 책을 1941년에 출판했고, 이는 그처럼 기구화된 교회 생활에 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본회퍼와 같이 그는 ‘종교 없는’(religionless) 기독교에 매력을 느꼈고, 그에게 있어서 종교 없는 기독교는 또한 ‘교회 없는’(Churchless)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교회의 이상이 전적으로 힌두들에게 호소하는 데 있어 실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교회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가장 커다란 장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는 전방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힌두교가 그러하듯이, 또한 예수께서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왔을 때처럼 개인의 영적인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조직된 교회의 설립이 처음부터 실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생각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고 성령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전형적인 문장으로 말한다.

 

성령이 먼 현실이 되고 이어서 교리가 됐을 때,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를 세웠다.   - Rethinking, p. 96.

 


첸치아가 교회를 순수하게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제도로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는 기껏해야 예배, 교제, 선교라는 세 가지 목적을 위한 유용한 인간의 제도이지만, 51 개인이 성령의 삶, 기도와 명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가장 필요한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삶의 기법들(sādhana)에 있어서 기독교 아쉬람으로 돌아가 지도를 받아야 한다.

첸치아의 교회에 대한 태도는 성례전에까지 확대되며, 그는 예수님이 실제로 성례전을 시행했는 지의 여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많은 힌두교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첸치아는 힌두교도들이 어떻게 기독교의 아쉬람에 끌리는지 지적하는데, 적어도 이는 부분적으로는 성례전을 준수하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인도를 위해 염원하는 것은 의식적인 성례전이 없는 ‘종교 없는’ 기독교이다.

 

거기에는 세례도, 신앙의 고백도, 신조의 선언도 없을 것이다 … [힌두]는 호칭이나 명명법의 변화 없이, 천천히 그리고 다른 정도로 그리스도의 영의 영향 아래로 오게 될 것이다 … 그 변화는 ‘남’(nāma, 이름)과 ‘루쁘’(rupa, 형식)의 영역이 아니라, 영혼의 영역에 있게 될 것이다.  - Rethinking, p.190.

 


여기서 한 가지 되새겨 볼 것은, 첸치아와 동시대의 사람이자 브라흐마 사마즈를 통한 영적인 순례의 길에 따라 1918년에 세례를 받은 구자라트의 자인교도(Jain) 마닐랄 C. 빠레크(Manilāl C. Pārekh)의 흥미로운 태도이다. 그는 생애 대부분의 기간 동안 조직된 교회와 떨어져 있었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더 힌두교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덜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는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너무 심하게 다른 공동체에 가입하는 행위인 사회적 의식의 하나로 간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말로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에 필요하지만, 그 강조점은 카스트와의 단절과 같은 사회적 의미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두어야 하며, 빠레크 자신이 50여 년간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제자들’(그는 ‘개종자’라는 단어를 거부했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힌두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1938년에 쓴 글에서 첸치아 역시 세례를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실제 영적인 삶과는 관계없이 종교-사회적 의미만 있는 힌두교의 어떤 의식행위에 비견되는 일종의 종교의식의 일부로 본다. 비슷한 방식으로 그는 주의 만찬도 불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실상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을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가공되지 않은 사실’(raw fact), 즉 그리스도의 ‘원초적인 자극’에 접근하는 자유를 허락하는 대신에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매개하고 있는’(mediating) 것으로 나타난다.

 

왜 교회와 책들이 개입하여 멀리 떨어진 분수대에서 나오는 물처럼 그분을 우리에게 데려오는가? 예수님과 직접 접촉할 수 있다면 왜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그것을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왜 20세기 이전의 일들에 관해 쓴 책을통해 그분의 말씀을 듣는가?   - The Guardian, 13-2-47.

 


교회와 그 성례전과 더불어, 첸치아는 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공격한다. 통상 그가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정형화된 교리와 조직신학에 있어서, 첸치아는 마드라스 「가디언」에 실린 자신의 주요 소논문 시리즈 중 하나를 통해 마커스 워드(Dr. Mrcus Ward) 박사가 그의 저서 「우리의 신학적 과제」(Our Theological Task, 1946)에서 제시한 교회의 교리적 관점을 집중적으로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1942년 뿌나(Poona)에서 열린 신학 교사 컨퍼런스의 결과물을 구체화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담은 이 책은 성경에 포함되고 신조들 가운데 공식화되어 있는 기독교 신앙의 되돌릴 수 없는 최소한의 ‘도그마’(dogma)와, 이 교의학적 자료에 대한 교회의 설명인 ‘교리’(doctrine)를 구별한다. 워드의 발견은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리를 해석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도그마’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목적은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를 포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인도 기독교 신학은 이 기본적인 자료에 대한 해석과 소통의 문제여야 한다. 인도적인 사고의 용어와 방식들은 해석의 임무를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교회가 받아들인 신념들의 정확한 의미는 반드시 존속되어야 한다.

첸치아는 전적으로 이 관점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특히 그리스 철학의 언어 속에서 흔히 존재하는 방식으로 언명된 공식화된 교리적 진술들은 그저 인간이 그리스도와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는 장벽일 뿐이다. 니케아와 칼케돈의 신조들은 “인도나 아시아의 분위기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들은 “동시대의 철학과 기독교의 항구적인 사실들을 결합한 것이다.”

 

사실 신학적 진술들을 공식화하는 전체 과정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모호하게 하는 데만 기여했다. 모든 역사적인 종교는 뛰어난 의미 또는 힘을 지닌 역사적인 인물과 함께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은 해석되었고,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지배적인 개념들과의 관계가 설정됐다. 다시 말해서 교리와 도그마, 예배와 의례, 신비와 의식들이 마침내 빛나는 핵이 거대한 전통과 증언의 세계로 둘러싸일 때까지 모인다.   
- D. A. Thangasamy, S. I. Churchman, June 1960. 에서 인용.

 


우리는 여기서 첸치아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해야 한다. 이는 성령의 요가, 하나님 나라의 삶, 살아계신 성령으로 충만한 교제로 반드시 입증되어야 한다. 첸치아가 볼 수 있는 한도에서 성찬식, 교리, 조직화된 삶을 가진 가시적인 교회는 이 이상의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7. 기독교와 힌두교

 

브라흐마반답과 같이 첸치아는 기독교 신앙이 반드시 인도의 문화로부터 새로운 통찰력을 얻는 데 열려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인 친구들로 하여금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인도의 문화를 향해 수문을 열어야 한다고 강권한다.

기독교인들은 힌두교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심지어 힌두교의 어떤 형태가 구시대의 매우 발전된 단계를 대표한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와 관계되듯이 힌두교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에 대한 새로운 피조물(창조)로 관계된다. 레이몬드 빠니카르(Raymond Panikkar)가 수년 후 했던 말을 예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을 창조했다. 힌두교에서는 옛사람을 완전하게 하려고 신을 추구한다 … 힌두교는 완벽한 인간을, 기독교는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 힌두교는 자연과 인간의 마하샥띠를 이용하고, 기독교는 성령의 새로운 샥띠를 진화 속으로 이끌어온다.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의 첫 번째 열매며, 힌두교는 오래된 창조의 마지막 열매다.
- Rethinking, pp. 181, 187.

 


힌두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이 견해에서 두 가지 실질적인 결론이 나온다.

첫 번째 결론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서구 교회가 그리스 문화의 접촉에서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 문화와의 접촉에서 실제로 더 많은 새로운 깊이와 풍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초기 교회가 존재했던 그 이른 시기의 그리스인들에게 그리스의 종교와 철학이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더 생동감이 있기 때문이다. 첸치아는 기념할 만한 특징적인 문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힌두교에 대한 해결책으로 개발된 예수의 부정적인 측면은 지금까지 상세한 내용의 알려지지 않은 그 초상화의 특징들을 드러나게 하며, 이런 특징들은 아마도 우리 시대를 위한 ‘복음’을 정확하게 증명할 것이다.  - Rethinking, p.162.

 


두 번째 결론은 좀 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복음전도와 기독교의 확장에 대한 첸치아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복음전도 설교를 거의 또는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오늘날에 ‘그리스도인의 현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가 힌두교 내부로부터 확산할 수 있다고 믿는 브라흐마반답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힌두교 문화속에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복음의 확산을 마음에 그린다.

 

힌두교 내에서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기독교 운동은 힌두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결정적인 이점이다 … 복음이 힌두교 외부의 사회 집단들이나 영적 집단들보다 삶, 의견 및 내적 변화로 확산한다면 복음의 확산을 위한 더 큰 가능성이 있다.
- Asramas, p.167.

 


기독교가 그와 같은 접근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도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런 과정이 결과적으로 인도의 불교가 힌두교 안으로 동화되어 온 것처럼 기독교가 힌두교에 동화되게 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 이 포스팅은 필자의 역서 "인도 기독교 사상"(CLC, 2020)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전재를 금하며,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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