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12> 기독교 박띠시인들 – 크리슈나 필라이 & 나라얀 띨락

2021. 2. 23. 09:00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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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박띠 전통


인도 종교철학의 전형적인 형태를 상까라의 순수한 일원론(monism)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동양과 서양이 마찬가지였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인도사상가인 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 박사는 궁극적으로 철저한 일원론적 종교와 그것을 철학적인 해석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찍이 브라흐마반답이 기독교가 인도에서 성공하려면 아드바이타(advaita) 베단타만큼 높은 수준으로 힌두교가 요구하는 주장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인도 종교와 철학에는 또 다른 전통이 있으며, 이 전통 역시 동일하게 영감을 받은 베다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루돌프 오토가 “영원한 신을 통한, 그리고 그분과의 교제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박띠 종교의 전통이다. 인도의 종교에서 이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는 아마도 결코 없을 것이다.

스와미 비베카난다(Swāmi Vivekānanda)가 베다경전의 본질이 일원론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다경전들에 인격적인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베다경전들을 해석함에 있어 후대에 일원론으로의 발전은 물론 모든 형상들 또는 화신들의 뒤에 존재하는 이슈와르(Ishvara), 즉 하나의 인격적인 신을 전제하려는 경향 역시 발견된다. 이 인격적인 신은 사랑받고 숭배 받을 수 있으면서도 숭배자와는 구별되는 신이요, 깊은 사랑과 개인적인 헌신의 감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신이다.

이 교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광범위한 가르침은 바가바드기타에서 발견되는데, 실제로 많은 다른 관점이 이 경건한 고전 속에서 표현되어 있으며, 라다크리슈난 박사는 이런 가르침에 대해 일원론적 해석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에서 비슈누의 화신인 끄리슈나에 대한 인격적 헌신이 중심을 이루는 박띠 전통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후 대략 주후 10세기 무렵에 기록된 바그와뜨 뿌라나들(Bhāgavata Purānas) 속에서는 서정적인 유형의 박띠 문학이 발전했다.

이 뿌라나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선택한 신(이쉬트 데브, ishta deva)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라는 주제가 때로는 관능적이고 심지어는 성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까라의 일원론에 대한 반작용은 매우 명확하다. 이 시기에는 타밀 지역의 큰 흐름인 비슈누파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알바르(Alvar)라고 알려져 있는 주로 박띠 찬가들을 작곡한 영감 받은 가수와 시인들을 통해 시작됐다.

그러나 이 운동에 견실한 신학적인 내용을 부여하고 실제로 힌두교의 개혁을 수행한 사람은 11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라마누자(Rāmānuja)이다. 젊은 시절에 라마누자는 따밀나두의 깐치뿌람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그는 상까라의 아드바이타 지지자였다. 그러나 훗날 그는 비슈누 종파에 속하는 알바르들의 영향으로 이미 번성하고 있던 박띠 전통에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기초를 제공해 준 새로운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라마누자에게 있어서 상까라의 비인격적인 니르군 브라흐만은 쓸모없는 신이었다. 그는 박띠 시인들과 함께 인격적인 신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면서, 구원을 찾는 사람이 마침내 그 구원을 얻을 때는 더 이상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상까라의 견해를 신랄하게 공격한다.

라마누자는 속성을 가진 신, 즉 이슈와르를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체계를 구축한다. 그는 영혼이 육체에 대해서 갖는 관계처럼 신은 세계와 관계한다고 보았다. 이는 동일성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라마누자의 체계를 비쉬쉬트아드바이타(Vishishtādvaita), 또는 ‘수정된 비이원론’(modified non-dualism)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함에 있어 박띠는 아드바이타주의자들의 즈냐나 마르그(jñāna mārga)를 거부한다. 이와 유사하게 까르마 마르그(karma mārga)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비록 바가바드기타 안에서 선한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들이 구원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마누자의 전통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이어졌다. 라마누자의 다섯 번째 계승자였던 라마난다(Rāmānanda)는 인간의 인격이 갖는 가치를 완전하고 자유롭게 인정하면서 카스트와 완전히 결별했다. 그는 말한다. “아무에게도 카스트나 분파를 묻지 말라, 누구든지 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신의 소유다.”

라마난다는 비인격적인 신에 대한 숭배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신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그의 영향력을 통해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박띠 전통의 지도자들에 의해 유신론적 사고가 모든 방향으로 전파됐다. 힌디어 사용 지역에서의 툴시다스(Tulsidas), 마하라슈트라에서는 남데브(Namdev)와 투까람(Tukaram), 벵갈의 차이따냐(Chaitanya), 구자라트와 라자스탄의 경계지역에서의 미라바이(Mirabai)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기독교회가 인도의 여러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인도 전역에는 광범위한 박띠의 신학적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전통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띠 사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라마누자의 체계가 가진 특징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이 인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갖고 있는 탁월한 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박띠와 라마누자의 철학체계를 통해 우리는 상까라의 차가운 세계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는 따뜻함과 사랑, 인격적인 헌신이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경험이 있으며, 수많은 기독교 성인들을 특징지어 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향한 완전한 자기포기도 있다.

그렇다고 볼 때 많은 이들이 나라얀 바만 띨락(Narāyan Vāman Tilak)에 대해서 갖게 되는 약간의 놀라움은 박띠의 세계와 기독교 신앙의 세계를 연결하는 직접적인 다리가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이 다리는 박따가 건너갈 수 있는 다리일 뿐 아니라, 여전히 그로 하여금 자신의 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는 다리이다.

 

기독교 박띠전통


우리는 기독교 박띠의 기원을 살피기 위해 19세기 초반의 몇 년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가 자신의 브랜드인 ‘유일신교적인’(Unitarian) 비이원론을 통해 기독교를 해석하려고 애쓰는 동안, 자신들이 떠나온 힌두교의 박띠 전통에 깊이 빠져있던 따밀나두의 개종한 기독교 시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발 앞에 박띠의 제물을 바치는 기독교 찬송시를 쓰고 있었다.

크리슈나 필라이 (H. A. Krishna Pillai, 1827-1900)

최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따밀 기독교 시인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를 꼽는다면 크리슈나 필라이를 들 수 있다. 필라이는 1827년, 비슈누 종파의 상층카스트에 속한 비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띠루넬벨리(Tirunelveli)에 있는 CMS 대학의 젊은 교수 시절 복음에 사로잡혔고, 1858년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크리슈나 필라이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은 『천로역정』에 바탕을 둔 서사시 ‘락샤냐 야뜨리깜’(Rakshanya Yātrikam)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쁨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락샤냐 마노하람』(Rakshanya Manoha￾ram)이다.

필라이는 직업적인 신학자는 아니었다. 굳이 그의 신학을 분류하자면 그가 기독교인이 된 초창기에 접촉했던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죄의 힘과 십자가에서 그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민감한 감수성이 그의 작품에 나타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동시에 그는 타밀어와 산스크리트어 힌두 문학의 생생한 배경을 가진, 풍부한 시적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접한 기독교 신앙에 매력적인 인도의 형식을 부여하는 용광로가 된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찬송시 가운데 하나에서 하나님을 ‘왕이신 사치드아난드’(King Sachidānanda)라고 부르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선호를 통해 브라흐마와 비슈누, 시바의 트리무르띠(trimurti), 즉 삼신일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박띠 시가들 가운데서 흔히 그렇듯이, 모성은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창조와 보존, 그리고 파괴라는 세 가지의 권능과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를 일치시키신 분;
세 분이 한 분이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그 세 분 중 한분은 누구신가;
육체와 말과 정신에 있어서 거룩하신 분,
모든 선한 행실에서 비길 수 없는 어머니의 형상 속에
모든 칭송을 받아 마땅하신 분 -
스스로 죄를 치료하는 보배로운 치료제가 되신분 -
그분은 내가 십자가에서 만난 바로 그분이시다.
(Tamil Christian Poet, p.51. Tr. E. E. White, 한역 : 임한중)



필라이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 다른 이미지들을 또한 사용한다
.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강이시며, 구원의 산이시고, 은총의 바다이시며, 은혜의 비를 뿌리는 구름이요, 생명을 주는 약, 보석 중의 보석이시다. 그분은 죄를 씻어내는 하늘의 강가’(Gangā, 갠지스강)이시다.

인류의 유산 끈적끈적한 죄를 말끔히 씻어내셨으니
그분은 순전하고 만족스러운 양식과 음료가 되었도다!
이로 인해 건강한 지혜의 생명이 자라고
진정한 구원의 열매가 맺히도다!
그것은 모든 인류 위해 쏟아내린 살아계신 강가(Ganga),
임마누엘 구세주의 보혈이 아니었던가!
(Tamil Christian Poet, p.47. Tr. R. Rangachari, 한역: 임한중)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조하는 수영선수의 관점에서 구원의 과업을 묘사하는데, 이는 인도 기독교의 찬송 가사에 종종 사용되는 하나의 상징이다.

세상을 삼킨 죄악의 구름,
어디에나 퍼져 고통의 물을 쏟아 부었네.
그 물이 쏟아지는 죽음의 강에서
위대하신 구세주는 홀로 헤엄치셨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을 그 팔 아래 안고서.
그분은 홍수에 끌려가면서도
영혼들을 잃어버리지 않으신 채 고투하셨고
그들의 구원을 염려하며 고난을 받으셨네.
(Rakshanya Yatrikam, I, p.225. Tr. R. Rangachari, 한역: 임한중)



끄리슈나 필라이는 죄가 가진 죄성과 더불어 선한 행위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철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확신하고 있다. 그 노력을 비교하자면 마치 불의 강 위에 버터로 다리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스스로 가져가시는 그 대가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당신의 머리에 잔혹한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운 이가 누구인가?
당신의 손에 거친 홀을 쥐어 준 이는 누구인가?
당신의 연꽃 같은 얼굴에 침을 뱉은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당신을 모욕적인 손가락질로 조롱한 이는 누구인가?
당신의 아름다운 이마를 친 이가 누구이며,
당신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이가 누구인가?
인류를 구원하실 당신의 자비로운 손,
당신의 양손과 양발에 박힌 못은 누구의 것인가?
그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오호라, 가엾은 나여!
당신의 고통은 바로 나로 인한 것이 아니었나요?
오! 당신은 죽어가는 강도를 부르시고,
그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오, 천국의 왕이시여!
영원토록 나의 인도자, 나의 기쁨이 되소서!
(Rakshanya Manoharam, III, v.2. Tr. E. E. White. 한역: 임한중)



인도 기독교가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 이 위대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박띠 전통 안에 있던 사람들 덕분이었고, 사실상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서정적인 역량과 어휘를 힌두교 안에서 가져온 개종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구자라트의 까한지 마다브지(Kahānji Mādhavji)와 같은 일부 시인들은 전통적으로 노래와 시에 헌신했던 카스트 출신이었다.

 

나라얀 바만 띨락(Narāyan Vāman Tilak, 1862-1919)

아마도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마하라슈트라 시인 나라얀 바만 띨락으로서 그는 느헤미야 고레와 빤디따 라마바이를 배출한 치트빠완 브라만과 같은 공동체 출신이었다. 열차 안에서 자신에게 신약성경을 준 이방인 기독교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띨락의 마음속에는 신앙적인 갈등이 시작됐고, 그는 마침내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띨락은 많은 박해를 겪으면서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의 명성이 결코 기독교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19세기 말 마라티 문학의 ‘낭만주의 부흥 운동’을 주도한 널리 알려진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충실한 봉사의 삶이 끝날 무렵 그는 사냐시의 이상에 끌리기 시작했고, 선교회 안에서 안정된 지위를 포기하면서 1917년에 기독교 사냐시가 됐으며, 자신을 중심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과 세례를 받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형제단인 ‘하나님의 정원’(God’s Darbār)이라고 불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우빠디야이가 그러했듯이 그는 다음과 같이 믿었다.

만일 그리스도를 서구의 조직, 서구의 교리, 서구의 예배 형식이라는 겉치레를 벗겨낸 후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인도에 소개할 수 있다면, 인도는 아마도 그분을 최고의 구루로 인정하고 그분의 발 앞에 가장 극진한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 J. C. Winslow, Narayan Vaman Tilak: the Christian Poet of Maharashtra (1930), p.118.



띨락이 쓴 기독교적인 운문들은 복음 선포를 위해서 뿐 아니라 회중 예배에서도 사용되는 많은 가사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많은 분량은 주로 강렬한 개인적인 헌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장대한 서사시를 쓰는 것은 그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크리스타얀’(Christāyan)의 적은 분량만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미완성 유고는 ‘기독교 아브따르의 위대한 뿌라나’로 인정되어 왔으며, 또한 그의 마지막 시집인 『아방간잘리』(Abhangānjali)는 통상 그가 쓴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띨락의 시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신앙적이다. 우리는 그의 깊은 감성과 헌신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작품들을 번역문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 첫 번째 작품은 어머니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최고로 자애로운 나의 어머니-구루시며 구세주시여,
당신의 사랑에 비할 사랑 어디 있으리오?

맹렬한 죄의 열기에 어찌할 바 모르는 영혼에게
시원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되시며

나의 첫 번째 부르짖음에 속히 응답하셔서
하늘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셨네.

슬피우는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겸손히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함께 하셨네.

나를 위하여, 바로 죄인된 나를 위하여
쓰디쓴 고통의 나무로 서둘러가셨네.

그분은 여전히 내안에서 나와 함께 살아계시며,
내 존재의 깊은 곳을 속속들이 채우시네.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오직 하나의 선율,
‘그리스도여, 당신께 영광을, 모든 영광을 당신께!’
- J. C. Winslow, 위의 책, p.85.



띨락이 쓴 많은 찬송시는 남데브나 투까람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과 유사한 특징들, 즉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한 영혼의 갈망으로서의 박띠의 본질을 보여준다.
 

주님! 내가 당신을 얻을수록
나는 당신을 더욱 더 갈망합니다.
아! 그것이 바로 내마음입니다.

내 눈은 당신을 향하고 당신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면
두 눈의 배고픔은 다시 깨어납니다!

나의 두 팔로 당신을 꼭 붙들었건만
이제 당신을 놓아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니요, 나는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내마음 속에 거하시는 주님,.
당장 다시 불을 붙여 주소서.
내 영혼의 욕망을 불태워 주소서.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말해주소서, 오 내게 진리를 말해 주소서.

당신의 종이 무엇을 해야 하나요?
- 위의 책, p.93.




대속에 관한 띨락의 찬송들은 단순한 사랑의 표현이며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들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주님을 그대는 보았는가?
그분의 상처 입은 두 손을, 그 상한 옆구리를 그대는 보았는가?

날카로운 가시로 엮은 그분의 면류관을 그대는 보았는가?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그분의 보혈을 그대는 보았는가?

그분에게 그 상처를 입힌 이가 누구인지 그대는 보았는가?
그분에게 모든 괴로움을 안겨준 그 죄인을 그대는 보았는가?

구원하시려고 그분이 어떻게 고통 받고 죽으셨는지 그대는 보았는가?
사랑의 눈으로 그분이 누구를 쳐다보고 계시는지 그대는 보았는가?

그대는 지금까지, 지금까지 이런 사랑을 본적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분의 것이 되었는가?
- 위의 책, p.98. Tr. Nicol Macnicol



그의 작품 중 몇 편은 인도가 그리스도께로 향해 나아오기를 원하는 갈망과 교회가 진정으로 인도의 것이 되어 그 풍성함을 그분께 드릴 수 있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언제 채워질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함은?
그 갈망이 밤낮으로 내 영혼을 휘젓는다.
언제 나는 내 조국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그분을 향한 경외심을 바치는 것을 볼 수 있을꼬

그래,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 행복한 날을
이 나라 모든 예언자의 신비로운 전통과
이 나라 모든 고대 지혜의 보고가
그분 자신의 완전한 영향력을 소유할 때는 언제일까?

오! 사랑하는 구주시여,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가진 모든 은사, 모든 기술, 모든 생각들—
내가 엮은 살아있는 화관,
당신의 연꽃 발 앞에 드리리. 
- 위의 책, p.108. Tr. Nicol Macnicol



여기 그리스도와의 결합의 본질을 설명하는 몇 줄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 박따가 구원의 비밀이 가진 가장 깊은 단계를 대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달과 달빛이 하나이듯이
내가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한 나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나의 주님!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한 나의 간구입니다.

나는 당신을 붙잡고 영원히 놓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을 붙드는 아내의 사랑으로.
딸을 향해 팔을 벌리듯 당신을 환영하며,
당신께 누이의 찬양을 드리렵니다.

오! 나의 그리스도시여, 이 몸을 취하소서!

영혼이 그 육체 안에 있듯 내 안에 거하소서.
즉시 내게서 떼어내야만 하는 치명적인 죄를
나는 하나하나 헤아리렵니다.
- 위의 책, p.101. Tr. Nicol Macnicol



띨락은 박띠 전통에서 자라났고, 스스로 말한 대로 투까람(Tukaram)의 다리를 건너 그리스도의 발 앞으로 여행했다. 띨락의 시를 번역한 니콜 맥니컬(Nicol Macnicol)은 그의 친구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띨락에게 있어서 달은 그 달빛 계단을 밟고 내려와서 그의 마음 가운데 살게 된다. 이는 이 시인이 성취한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의 화해이며, 따라서 그는 스스로에게 있어서, 그리고 기독교 교회에 있어서 힌두의 유산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 N. Macnicol, India in the Dark Wood (1930), p. 128.



띨락과 많은 다른 기독교 박띠 시인들의 작품들은 영원한 경건 문학의 보고임과 동시에 초기 라틴 송가들이나 루터의 합창곡들, 또는 독일의 찬송작가들인 게르하르트(Gerhard), 터르스티겐(Tersteegen), 네안더(Neander), 그리고 영국의 웨슬리와 와츠(Watts)의 찬송들에 비교할 만한 인도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이 보화를 발굴하고 평가하는 작업은 아직 거의 시작되지
도 않았다.

우리가 박띠 시인들을 살펴보는 것은 복잡한 신학적인 해설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헌신 언어, 심지어 어느 정도는 전문적인 신학 언어가 인도의 여러 방언들 가운데 정착되어 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상대적으로 영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지만, 이는 아마도 그들이 자기 청중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경험으로 말하는 데 있어서,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용어들을 바꾸어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서정시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따뜻하고 인격적인 접근을 반영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결코 니르군 브라흐만이 아니며, 오히려 주님, 왕, 구루, 스와미, 긍휼의 바다, 어머니와 아버지 등이다. 같은 용어들이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 성령님은 기쁨의 물줄기, 마음을 치료하는 약, 천국으로 가는 열쇠, 행복의 기름이 흐르는 시내, 거룩한 우유 등으로 표현된다.

박띠 시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인도에서 기독교로 하여금 ‘집에 있도록’ 만든 사람들이다. 그들의 노래는 신학서적을 결코 읽지 않았을 수천 명의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불리고 가르쳐졌으며, 그들의 작품은 기독교회가 인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비옥한 토양에서 풍성하게 자라도록 북돋아줌으로써 자신의 꽃을 피워내는 데에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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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박띠시인들을 다룬 이 포스팅이 인도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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