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사상 3> 원천② - 드 노빌리

2020. 10. 19. 10:38인도기독교 이야기/인도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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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신학의 두 번째 원천을 꼽는다면 드 노빌리(De Nobili)와 로마 가톨릭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초반에 본격 시작된 로마 가톨릭의 인도선교는 1542년, 예수회에 속한 한 위대한 개척자가 고아에 도착함으로써 크나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가 바로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로서 그의 사역은 인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섬, 코로만델 해안까지 확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552년에 중국을 향해 떠난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력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역했다.

여기서 사비에르와 그의 포르투갈 예수회 동료들, 그리고 그의 계승자들이 사용했던 복음전도 방법들까지 논의를 확대할 필요는 없다. 그 뒤에 이어진 선교는 불행히도 서구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형태로서, 로마식 기독교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절대 왕권으로 위협하고 그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교황이 포르투갈 왕에게 해당지역 선교와 교회설립, 운영의 전권을 부여한 파드로아도(Padroado)는 인도의 기독교화를 제국주의 확장의 목표 중 하나로 규정했다. 따라서 초기부터 인도교회의 과업에 큰 해악을 끼친 선교와 제국주의 사이의 연결 고리가 형성되었다.

1605년, 예수회의 젊은 선교사 로베르토 드 노빌리(Roberto De Nobili)가 부임해온 인도교회는 그처럼 서구화된 교회였다. 그는 즉시 유럽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는 결코 인도 현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드 노빌리는 그리스도인 사냐시(sanyasi)로 살기를 결심했으며 그에 적합한 옷차림과 생활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쳐줄 한 브라만 교사를 만났는데, 당시 외국인에게 경전의 언어를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를 통해 드 노빌리는 힌두교 경전의 언어를 마스터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외부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보호되어온 베다연구가 오히려 힌두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주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새롭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드 노빌리는 베다경전들은 물론 베단타(Vedanta) 경전까지도 통달하기를 원했고, 이를 통해 인도 철학과 철학 언어를 기독교 신학의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원했다.

더 나아가 드 노빌리는 브라만 교사와의 독서 및 토론을 통해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초로 자기 신학을 세워갔던 방식으로는 베다나 베단타 경전 중 어느 한 곳의 기초 위에서 직접 기독교를 변증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그가 마두라이(Madurai)의 브라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기독교 신학을 제시하기 위해 무척 흥미로운 문학적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인도교회가 살아남으려면 인도의 전통에 따라 가능한 한 많은 교육을 받은 자체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5년 과정으로 기독교 철학을 연구할 수 있는 브라만신학교를 열 계획을 세웠다.

드 노빌리는 모든 종교적인 전문용어들이 포르투갈어로 되어있던 상황에서 자신의 미래 성직자들이 인도인들을 향해 그들 자신의 언어로 기독교를 제시하기를 원했다. 드 노빌리는 그들이 잘 훈련된 기독교 신학자임과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힌두들의 종교에 대한 전문가들이 되기를 원했으며, 외국인들이 아닌 자기 민족의 지원과 보호를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 건축을 위한 재정 지원이 늦어졌지만, 드 노빌리는 결코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인도교회를 위한 예전 언어로서 라틴어 대신에 산스크리트어를 채택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다. 그 허락을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드 노빌리가 그 제안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인도의 언어와 진정한 인도의 형식으로 기독교적인 작품을 쓴 최초의 개척자는 드 노빌리가 아니었다. 그 영광은 뛰어난 영국인 예수회원으로서 1579년에 고아에 도착하여 현재의 뭄바이 근처인 살세떼 반도에 정착한 토마스 스티븐스(Thomas Stevens)에게로 돌아간다. 대중적인 지역 언어로 된 힌두 신화, 즉 뿌라나들(Puranās)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콘카니어(Konkani)가 혼합된 구어체 마라티(Marathi)로 구약 및 신약의 이야기들을 장편 서사시로 만들어 엮은 기독교 뿌라나를 저술했다.

드 노빌리는 자기 이전의 사례를 참고하여 산스크리트어 구절로 된 「성모의 생애」(a Life of our Lady), 혼인과 장례식을 위한 찬송시들, 그리고 100개의 산스크리트 ‘슐로카’(shlokas, 네 구절로 이루어진 시)에 기독교 교리를 요약하여 작곡했다. 이 작품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가 타밀어로 쓴 저작물들일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은 「그나노빠데삼」(Gnanopadesam, 지식의 전수)으로 알려진 방대한 교리문답서인데, 이는 기독교 교리를 요약한 책이다. 드 노빌리는 이 책을 ‘인도인을 위한 진정한 신학대전’(a veritable Summa Theologia for the Indians)이라고 불릴 만큼 다섯 권의 전집이 되기까지 지속적으로 개정하고 증편했다.

그는 또한 새로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다양한 책들을 썼는데, 「그나나 산체비」(Gnana Sancheevi, 영혼의 치료제)를 비롯하여 힌두교 교리들을 토론하고 평가하는 논쟁적인 책을 여러 권 저술하였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책이 바로 「뿌누르-저느마-아크쉐팜」(Punur-janma-ākshēpam), 즉 ‘중생에 대한 논박’(Refutation of Rebirth)이다.

드 노빌리의 사역 방법들은 토착적이었으며 매우 근본적이었다. 특히 노빌리는 산스크리트와 타밀어 연구로 인해 크게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저서들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힌두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 토착화된 신학의 실험을 대표한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실상 종교로서의 힌두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부정적이었고 힌두교를 논박하기 위해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죄 용서를 얻기 위해 신의 이름을 반복하는 관습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보자.

죄를 제거하기 위한 이런 처방은 악마에게서 온다. 그 악마는 시바’(Siva)의 이름을 세 번 반복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악을 제거할 수 있으며 라마’(Rama)끄리슈나’(Krishna)의 이름들을 반복하거나 그 신전에서 예배함으로써, 카우베리 강에서 목욕함으로써, 이마에 신성한 재를 바름으로써, 그리고 루드락샤(Rudraksha)를 목에 두름으로써 죄가 사라질 것이라고 가르친다.


비슷한 방식으로 드 노빌리는 재생과 까르마(karma), 아브따르(avatāra) 또는 신의 성육신 등에 대해 그것을 다시 기독교적으로 해석해주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이에 대해 논쟁하며 조롱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설명 역시도 마찬가지로 보수적이다. 예를 들어 짧은 교리문답서 중 하나인 『그나노빠데삼 26 삐라상안갈』(Gnano-padesam Twenty-six Pirasangangal)에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자들의 논쟁을 반복한다. 또한 그는 비성경적인 마리아와 연옥 교리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가볍게만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드 노빌리의 산스크리트어와 타밀어 작품들은 라틴어로 된 신학적 어휘들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단어와 문장을 결합하는 실험으로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의 트렌트공의회 신학을 재현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힌두교의 용어와 사상 형식을 사용하려는 진정한 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드 노빌리의 위대한 업적은 힌두교의 관습과 의식에 대한 이해와 적용, 산스크리트어와 타밀어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 그리고 인도 언어들을 위해 기독교 신학의 어휘를 발전시키는 필수적 과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 전통에 있어 드 노빌리 사후 100년이 지난 1710년에 인도에 와서 드 노빌리가 추구했던 과업을 회복하려 했던 조셉 콘스탄티누스 베스치(Joseph Constantinus Beschi) 신부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스치는 요셉의 생애를 노래한 유명한 타밀어 서사시,「 템바바니」(Themba vani)를 썼으며, 이 책에서는 여러 힌두교의 신학적 개념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드 노빌리와 베스치의 작업 이후 베다와 베단타의 언어와 개념들을 기독교 교리를 전달하고 자세히 설명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노력은 19세기 기독교 박띠 시인들의 시대가 오기까지 다시는 진지하게 수행되지 않았다.■

 

 

* 위 내용은 본 필자가 번역한 도서 「인도 기독교 사상」(Robin Boyd 저, CLC, 2020)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전제를 금하며, 혹시 인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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