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의 고대 유적, 빌립보 감옥, 루디아 기념교회

2022. 11. 14. 05:13세상의 모든 풍경/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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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Philippi)는 마케도니아 동부 트라키아 지역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본래 명칭은 크레니데스(Crenides)였으나 주전 356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이자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필리포스 2세(Philip II of Macedon)가 필리피(Philippi)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위대한 정복자이자 거대한 그리스(헬라)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가 죽고 난 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역동적인 헬레니즘 도시였던 이곳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작은 로마'로 불릴 만큼 크게 발전했고, 주후 50년 경 사도 바울이 이 도시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우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과 건축 양식, 그리고 초기 기독교 역사의 증거가 되는 유적등의 가치를 인정 받아 빌립보 유적지 전체가 201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위대한 선교사 바울은 A.D. 49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이 도시에서 유럽 땅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빌립보를 마케도니아 지경의 첫 성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행 16:12).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바울은 이 도시에 총 세 차례 방문하는데요, 2차 방문은 7년 뒤인 A.D. 56년, 3차 방문은 그 이듬해인 A.D. 57년입니다.  

바울이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 이곳에 유럽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매우 극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회심하게 된 이들에 의해서일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 가족과 자주 비단옷감을 파는 여성 실업인 루디아와 그 가족들입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성지순례중 담아온 사진을 통해서 차차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향해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 의하면, 이곳에 세워진 유럽 최초의 교회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적극 협력하면서 매우 건강하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빌 1:3-6).

번영했던 고대도시 빌립보의 중심가의 현재 모습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아크로폴리스와 주변 상업지역이 이제는 그 터와 잔해들만 남아 있습니다. 이곳을 통상 포럼 혹은 광장이라고 부르는데, 개역개정판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이를 장터, 즉 상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각종 송사를 직접 재판하는 재판정이 있는데 이를 베마(Bema)라고 합니다.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준 일로 바울이 끌려와 재판을 받은 곳도 이 베마입니다.

이건 구글에서 퍼온 아크로폴리스의 전경입니다. 폭 46m, 길이 100m의 직사각형 형태의 이 포럼은 대리석으로 덮인 광장이었습니다. 명상록을 쓴 철학자로도 유명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진에 보이는 구분된 공간은 각종 공예품과 옷감, 향료, 가구 등을 파는 상가라고 하겠습니다. 아마 사도행전 16장의 주인공 루디아 역시 이곳의 어느 한 칸에서 고위관료와 귀족 부인들을 상대하며 자주비단을 파는 사업을 했겠지요?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고대 로마의 군사도로인 에그나티아 호도스(Via Egnatia)가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번영을 누렸습니다. 

에그나티아 호도스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곳곳에 기둥과 기초석, 라틴어로 새겨진 명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에 이 도시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유물이지요.

우리가 어제 보았던 네압볼리 항구로 향하는 네압볼리 게이트(Neapolis Gate)로서 원형경기장과 잇대어 있습니다.

게이트 옆에 비교적 본래 모습이 잘 보존된 원형극장이 남아 있구요, 주로 맹수들의 싸움이나 검투사 경기, 그리고 연극 공연 등 각종 문화행사와 집회 등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원형경기장 주변으로 당시의 화려했던 부대시설들이 파괴된 채 남아 있습니다.

목욕탕과 술집, 상가 등 다양한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었을 이곳은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유럽최초의 교회였던 빌립보교회가 훗날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후 예배당으로 건축한 바실리카 A의 유적지로서, 빌립보에서 최초로 건설된 예배당 건물이지만 완공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덮친 지진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주후 5세기에 최초로 건설된 예배당의 기둥에 새겨진 십자가를 통해서 당시 이곳이 대성당, 즉 바실리카였음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에는 두 개의 큰 예배당, 즉 바실리카 A와 바실리카 B가 있는데, 이곳이 처음 건설된 바실리카 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성당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의 윗쪽에 아크로폴리스 광장과 거의 비슷한 규모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무척 웅장하고 화려했을 것입니다.  2층으로 건축된 이 바실리카 A는 길고 넓은 안뜰 주변에 다양한 크기의 부속실들을 갖추었으며,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었습니다.

바실리카 내부의 예배당 모퉁이는 하나의 대리석 기둥을 하트 모양으로 가공하여 두개의 기둥을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특수한 공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재료가 최상급의 대리석이라고 하네요.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의 위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단의 십자가 문양과 하트 모양의 활(화살촉?)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해 바실리카 A 의 서쪽 아래, 그리고 에그나티아 호도스의 북쪽에 또다른 팔각형 형태의 바실리카가 발견되었는데요, 이 바실리카는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대리석 재료들로  잘 지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곳이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었던 빌립보의 감옥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시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인을 고쳐준 일로 고소를 당해 이곳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며, 죄수들을 매고 있던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 있어나게 되지요. 그러자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자결하려고 합니다. 이 때 바울이 간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포했고, 이 일을 통해 간수의 가정에 구원이 임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위를 파서 만든 이곳 좁은 감옥에서 바울 일행은 찬송하고 기도했지요. 찬송은 옥문을 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때만 해도 검은 머리에 안경도 쓰지 않았는데, 9년의 세월이 저를 많이 바꾸어 놓았네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교사 바울 선배님이 갇혔던 옥터앞에서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일었났던 당시 상황을 묘사한 미술작품을 하나 보시지요.

지금부터는 빌립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꼽히는 바실리카 B, 즉 성 바울교회입니다. 약 6세기 중반에 건축된 이 건물은 당시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건축된 다른 예배당들과는 달리 거대한 돔을 가진 건물로 설계되었습니다.

검투사들의 연습장소와 인접하여 광장 남쪽에 건축된 바실리카 B는 바실리카 A보다 훨씬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지름 47m, 높이 67 미터의 돔을 가진 건물은 콘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의 돔보다 더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돔을 받치는 기둥들이 없이 설계된 이 거대한 돔은 결국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완공도 되기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하네요.  

결국 최초의 돔을 가진 예배당이란 명예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 대성당)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아야 소피아 역시 이 예배당 돔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설계를 변경한 끝에 완벽한 돔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실리카 B에는 부속실로 세례식을 위한 빌딩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복도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무니가 선명한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세례조가 위치한 방은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바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자이크에 새겨진 문구에 의하면 성세르디카 공의회에 참석한 보브리오(Prophyrios) 주교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바울 대성당은 주후 343년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먼저 루디아라는 이름은 자주색 비단의 생산지로 유명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입니다. 따라서 빌립보 사람들이 자주비단을 파는 이 여인을 그냥 루디아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정하기는 빌립보서 4:2에서 바울사도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는 빌립보교회의 두 여성지도자의 이름, 유오디아(Euodia)와 순두게(Syntyche) 중 하나가 루디아의 본명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이 바로 바울 사도와 그의 선교팀이 루디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 '강가'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기도할 곳을 찾던 바울과 그의 일행이 이곳 강가에 나와서 여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고, 성령께서 그 여인들 중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하셨고, 그녀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구원을 얻고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당시에 이곳은 빌립보 시내를 싸고 도는 상당히 규모가 있는 강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개울로 변해 있네요. 루디아를 기념하여 만든 이곳은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던 장소에서 지금도 세례식을 베풀고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루디아의 가족은 이곳에서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세례터입니다.

마침 주일이어서 당시 바울이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제가 예배를 인도하고 간단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룹에서 온 목사님 한 분이 대표기도를 하셨지요.

이곳에 작은 크기로 만든 루디아를 기념하는 성화와 양초와 꽃을 놓는 곳이 있었습니다.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루디아의 집터에 세워진 기념교회입니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네요. 


예배당 입구의 모습입니다.
중앙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 좌측은 루디아와 가족, 우측은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예배실 내부전경입니다.

루디아와 관련된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을 묘사한 성화들로 장식된 돔 하단부입니다.

드로아(트로이)에서 선교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바울에게 나타난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그린 성화입니다.

소아시아의 드로아 항구를 출발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압볼리에 상륙하는 바울과 그의 선교팀.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큰 배에 탔겠지요?
그 먼 항해를 선장도 선원도 없이 직접 노를 저어오지는 않았을테니까요...^^


빌립보 감옥에서의 바울과 실라를 묘사한 성화입니다.

강가에서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 누가 등 선교팀. 후광이 그려진 여인이 루디아겠지요?

강가에 나와 세례를 받는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글을 읽지 못하던 시대에 예배당 안에 그려진 성화들은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내면화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상을 만들어 예를 표하고 심지어 숭배하기까지 하는 로마 가톨릭과 달리 정교회는 성상숭배를 금지하고 성화를 통해 성경의 이야기와 복음을 설명하고 교육하며,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후세에 전승해왔습니다. 

성화로 화려하게 장식된 루디아 기념교회의 원형 돔.

이곳은 주로 유아세례나 유아헌신예식을 거행하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아직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인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창문.
왼쪽은 사도 바울, 오른쪽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입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이자, 위대한 사도 바울의 초상입니다.
위에 사진으로 소개한 유아세례조의 완성을 위해 초(1유로)를 구입하여 헌금에 참여해 달라는 메시지가 붙어 있습니다.





이상으로 오늘은 빌립보의 고대 기독교 유적과 바울 일행의 빌립보 사역,
루디아와 그녀의 가정에 임한 구원의 역사,
그리고 빌립보교회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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