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우상과 쾌락의 도시에 복음이 전파되다

2022. 12. 12. 10:42세상의 모든 풍경/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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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을 배경으로 펼쳐진 고대 고린도 유적지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64km,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아카이아 주의 수도였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해상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각 나라와 민족의 우상이 총집결한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B.C. 3천년 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곳은 B.C. 8세기 초부터 폴리스, 즉 도시국가가 발달하였으며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고린도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는 이 도시 안에 로마인과 그리스인, 유대인, 이집트인, 투르크인, 시리아인 등 각 식민지에서 온 노예들을 비롯하여 자유인이 25만 명, 노예가 40만 명이 거주했다고 하니, 오늘날 고린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3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시대, 즉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 이 도시에는
2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존재했고, 고대의 운동경기들이 그곳에서 치뤄졌다고 한다. 또한 구 고린도를 내려다보는 바위언덕인 아크로고린도에는 1천 여 명의 신전 여사제(창녀)들이 소속되어 있는 아프로디테(사랑의 여신) 신전이 있어 온갖 음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신약성서에서 고린도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방문하여 1년 반 동안이나 머물며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한 도시이자, 최소한 두 차례(세 차례 이상일 수도 있음) 긴 편지를 써서 보냈던 곳으로 등장한다.
오늘은 이 아가야 지역의 중심도시이자 지중해 무역의 핵심도시인 고린도의 유적들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과 문화를 살펴보고 그곳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과정을 추적해 볼 것이다. 



고린도 운하 (The Corinth Canal)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이동하는 동안에 보아야 할 중요한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고린도 운하이다.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 버스로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가 되는데, 고린도 도착 직전에 운하 옆의 정류장에 잠시 내려 운하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고린도는 고대 해상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병목 부분에 위치한 도시였다. 따라서 이 도시에서 아테네를 비롯한 동쪽 도시들로 해상운송을 하려면 반도를 멀리 돌아서 가야했고 그 거리가 700km에 달했다. 따라서 고대 로마시대로부터 그 거리를 단축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침목을 깔고 배를 바퀴를 단 수레에 실어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 반대편 해변까지 약 6.4km를 끌어 운반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1881-1993), 거의 12년 여의 공사 끝에 드디어 코린트 만과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1869년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열리자 그 다음 해인 트라시볼로스 아이미스 총리 때 고린도 운하 건설 법안이 통과되었고,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총리 시절에 대공사를 완성했다. 물론 운하가 건설된 일차적인 목표는 경제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아테네까지 이르는 700km 가까운 해상운송로를 고린도 운하의 건설로 6.4km로 단축시킨 것이다. 운하의 폭은 좁은 곳이 21.3m, 최대가 24.6m이며 깊이 8m, 운하의 정확한 길이는 6.346km다.

이 운하로 인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는 지리적으로 분리되었으며, 이 두 반도를 잇는 다리가 건설되었다. 운하의 건설은 성공적인 프로젝트였지만 폭이 좁고 깊이가 얕아서 바람이 강하거나 간조가 심한 날에는 선박을 이동시키는데 있어 큰 위험이 따랐다. 더군다나 석회암 지형으로 무너질 위험이 높아 선박 회사들은 코린트 운하를 통과하는 것을 꺼렸다. 따라서 현재는 관광용으로 오히려 더 인기가 높다고 한다.

 




고대 고린도의 유적지

 


고린도의 고대유적지는 현재 해변에 세워진 신도시에서 약간 안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린도 운하에서 시내를 통과하여 달리다 보면 좌측으로 유적지에 들어가는 팻말을 볼 수 있다. 이 고대도시는 해발 575m의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아래 건설되었고,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은 고린도 만과 사르니코스 만 양쪽 바다는 물론 아테에서 들어오는 육로와 해변으로 이어지는 평지를 두루 전망할 수 있는 곳으로서 군사전략적으로,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정상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헌정된 신전이 있었는데, 기독교화된 후에 교회로 변모했다가, 한 때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모스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로마시대 당시 이 신전에는 1천명 이상의 여사제(신전창녀, sacred prostitutes)들이 종교적 매음행위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고린도시에 살던 소녀들 가운데서 선발되었다고 한다. 고린도인들은 제사의식의 일환으로 이들과 함께 온갖 종류의 음란한 행위들을 자행했다.

고대 고린도시의 유적은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을 포함하여 둘레 약 10km의 원형 성벽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주요 유적들은 대부분 로마시대의 것이지만 아고라가 당시의 형태와 규모를 갖춘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B.C. 4세기의 일이었다. 하지만 구 고린도의 고대 고린도 유적들은 1858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던 건물과 구조물들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 곳곳에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속도는 무척 더딘 것 같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라고 할 수 있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헌정된 신전이 그 입구 기둥만 남아 있다. 화려하고 섬세한 고린도식 기둥 문양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고린도 양식의 섬세한 문양을 담은 대리석 기둥의 머리부분이다. 이는 난간을 떠 받치는 부분으로서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들을 보여주는 기둥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다. 맨 뒷줄 첫번째와 두 번째는 도리아식, 세번째는 이오니아식, 네번 째부터는 고린도식 기둥양식이다.

고린도의 폐허 위에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 B.C. 6세기에 세워진 이 신전은 원래 38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는데, 수십차례의 지진으로 현재는 7개만 남아 있다. 그리스의 많은 신전들 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신전은 전통적인 도리아식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기둥들은 기단부분에서 난간하부까지 하나의 돌로 가공된 통기둥이다.

정밀하게 가공된 돌기둥과 난간 파편들... 

도시의 서쪽 아고라 지역에 자리잡은 상점들로서 유흥과 환락을 즐기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고린도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성을 사고 팔 수 있었다. 이런 고린도의 성적 타락상은 '코린디아조마이'(korinthiazomai)라는 당시의 유행어로 대표되는데, 이는 ‘고린도인처럼 되다’, ‘고린도 방식으로 산다’는 뜻이다.  B.C. 4-5세기경에 그리스 시인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성적()으로 타락하고 부도덕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처음 사용한 용어였다. 이런 배경에서 영어 ‘Corinthian’(고린도 사람)은 ‘사치하고 방탕한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실제 사용되었다고 하는 우물 피레네 샘터 공중목욕탕.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6개의 물 저장소가 서로 흘러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한 시간에 무려 1만 1천리터의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화에 따르면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피레네의 애절한 사랑이 지금까지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고 한다.

공중목욕탕인 피레네 샘터 주변으로 많은 상가와 음식점, 술집 등이 자리잡고 있었던 듯 하다. 남아 있는 유적들이 당시 고린도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지붕을 받치고 있던 난간에 새겨진 화려한 장식은 당시 고린도의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해상무역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고라 주변의 상점들은 모두 우물을 파서 다양한 종류의 육류와 생선 등 고기를 시원한 물속에 냉장보관하여 판매했다고 한다. 이중의 상당량은 우상에게 먼저 바쳐지고 난 후에 시장에 나와 판매되는 것들이었고, 초기 고린도교회 내에서는 이처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서로를 정죄하고 비난했다.

지금은 이렇게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다른 로마시대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대극장과 체육시설, 도기 제작소, 거대한 개선문 등 다양한 시설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아고라 일대의 유적들은 1896년부터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다.
 

아마도 당시에 관공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앞에 목이 떨어져 나간 대리석상이 인상적이다.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 북동쪽 흑해 연안지역인 본도(Pontus) 출신의 유대인, 아굴라(Aquila)를 만나게 된다. 아굴라는 본도 출신이지만 이탈리아 로마 인근에서 아내 브리스길라(Priscilla)와 함께 천막을 제조하는 비즈니스를 하던 사업가였다. 하지만 클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아굴라는 아내와 함께 이곳 고린도에 와서 사업을 일구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교제하며 협력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들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내려와 사역에 힘을 보탰고,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설교하면서 유대인은 물론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도 힘써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랬듯이 주로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도에 대해 비방하고 반대했고, 바울은 옷을 털면서 그들을 향해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고 선언했다.


5세기부터 사도바울 기념교회가 된 재판정(Bema)에 있는 머릿돌. 고린도후서 4장 17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은 자신의 숙소를 회당 옆에 사는 경건한 사람 디도 유스도(Titus Justus)의 집으로 옮겼고, 얼마 후 회당장인 그리스보의 가정이 예수를 영접하면서 이를 기점으로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바울은 환상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이 말씀으로 힘을 얻은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고린도교회의 토대를 든든히 세웠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하던 당시 유대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비방하고 고소하여, 그를 법정으로 끌고갔다.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거꾸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한다고 참소했다. 바울이 이들의 참소에 답하려고 하자 갈리오가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이여,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관련된 일이면, 내가 여러분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그러나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여러분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면, 여러분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재판정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과 협력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구타하였으나, 총독 갈리오는 자신이 선언했듯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여 관여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이 재판을 받았던 재판정, 즉 베마(Bema)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갈리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주후 5세기 이후로 이곳은 사도바울 기념교회로 바뀌어 사용되어 왔으나, 지진으로 무너진 후에는 잔해만 남아 있다.

재판정 위에 올라가서 담은 풍경.

레카이온 보도의 표지석. 레카이온 보도는 도시의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대로로서 다음 사진의 주인공 때문에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에라스투스 명문(文)이다. 이 명문은 1929년에 발견되었는데, 에라스투스가 고린도 시의 고위관료(재무관)으로 임명된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재산을 출원해 이 도로를 건설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에라스투스가 임명된 연대를 볼 때 이 에라스투스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23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 시의 재무관 에라스도(Erastus)와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나와 온 교회를 잘 돌보아주는 가이오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도시의 재무관인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로마서 16:23)

당시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집필했기 때문이다. 이 두 곳에 언급된 인물이 동일인이라고 한다면 당시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가 이 도시의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로마 시민들에게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겠다.

대리석 돌로 포장된 이 도로가 바로 에라스도가 재산을 출원하여 완공한 도로라니..., 2천년 전 성경의 기록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감동은 현지에서 직접 그곳을 밟을 때가 아니면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면, 바울의 사역 이후 고린도교회에서의 복음사역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고린도의 복음화가 진행될수록 유대인들의 방해도 가열되었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로 귀환했다. 이후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볼로(Apollos)가 사역했으나, 유대에서 건너온 자들로 인해 점점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고전 3:1-15).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접하고 서신(고린도전서, 55-56년경)을 발송하였다. 그후 마게도냐(빌립보)에서 다시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고린도후서, 56년 말경). 그리고 바울은 귀환 길에 고린도에 들러 3개월을 체류하며 교회를 지도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에 속하고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였지만 또 가장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교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문제 많고 말썽 많은 현대 교회에 좋은 답안을 제시하는 모델이 되고 있다.

레카이온 도로 주변에 자란 올라가 쉬기 좋아 보이는 나무 주변으로 고대 유적들이 펼쳐져 있다.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요 설립자인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 교회에는 분파가 생기고 분쟁이 심해졌다(고전 3:3).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소개하듯이 이 분파는 크게 네 부류의 그룹들로 대표된다.

바울파 - 설립자인 바울을 지지하며 추종하던 분파. 언변이 뛰어났던 아볼로와 달리 바울은 말재주가 다소 부족했는데(고후 11:6), 아볼로파 사람들은 이를 빌미로 삼아 바울파를 공격하며 바울의 사도성을 문제삼았다.

아볼로파 - 바울의 후임자로 고린도교회를 지도한 유대출신 학자인 아볼로를 추종하는 무리(행 18:24-28)로서 아볼로가 지닌 구약에 관한 뛰어난 지식과 논리적인 설교에 매료된 이들이다. 주로 철학적 깊이와 체계적 사고를 좋아했던 그리스(헬라) 출신 성도들이 이 분파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바파 -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사도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게바’는 그의 아람어 이름)를 추종하는 부류로서, 생전에 주님과 동행하여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12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야말로 바울이나 아볼로를 능가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유대 출신 성도들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스도 - 스스로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부류로서 주님의 가르침이나 교훈을 직접 들었거나,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체험했거나, 아니면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거나 하는 등 주님의 공생애 기간 중 주님과 직간접으로 관계가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파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발굴된 고대 고린도 유적지의 조감도이다. 도시의 핵심시설들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대부분의 주거지역과 서민층, 노예들이 생활했던 곳은 이 성 주변부터 해변에 이르는 넓은 들판이었을 것이다.

구 고린도 유적지 입구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는 고린도의 주요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진으로 인해 목이 떨어져나간 석상들이 마당에 줄지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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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1> 박물관 안에 전시된 유적들을 슬라이드로 구성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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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쇼 2>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린도의 고대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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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쇼 3>  고대 고린도의 유물전시관 유적 모음 세 번째

 



지금까지 고린도의 고대유적과 사도바울의 발자취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성경 기록들의 진실성을 역사적 유물 속에서 확인하는 감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앞으로 계속되는 연재에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찾아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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