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의 겨울, 그 청명함과 순백의 미에 대하여

2022. 12. 20. 21:04아름다운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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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 대학시절 처음 찾은 변산반도.
광주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그 시절 나는
채석강의 풍경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 이후로 이런저런 일로,
때로는 촬영을 위해 최소한 열 번 이상은
변산반도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소사를 한 번도 찾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소사의 울창한 전나무 길과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에 대해 듣긴 했으나
어쩐 일인지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사찰을 방문하는 일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요일 밤에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주일 저녁에도 눈이 예보되어 있어
월요일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설경을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던 중에 문득 생각난 곳이 내소사였다.
작년 겨울 설경을 담은 백양사와 내장사의
강렬한 기억이 나를 내소사로 이끌었다.

그래서 늘 나의 촬영여행에 함께 해주시는
고향교회 선배님, 그리고 후배 목사님 부부와
행복한 한 나절의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내소사의 역사와 유래, 문화재 등은
다른 분들이 쓰신 글들을 참고하시라.
여기서는 오로지 내소사의 겨울풍경이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청명한 겨울,
그리고 순백의 아름다움만을 느껴주시기 바란다.

2022. 12. 19


 
 

내소사 주차장 옆에서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붉은 열매를 만났다. 이게 무슨 열매인지 궁금했는데, 수원에 계시는 시인이자 수필가이신 권사님이 '이나무'라고 가르쳐 주신다.
 

소나무와 호랑가시나무, 한 겨울에도 그 청청함을 잃지 않는 강인한 나무들... 푸른 잎파리, 빨간 열매와 하얀 눈의 대조가 아름답다.

겨울이 되도록 따지 않아 까치밥으로 달려있는 홍시의 붉은 빛이 파란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이곳 까치는 굶어죽지 않을 것 같다. 

하얀 눈 때문에 빠알간 열매가 더욱 도드라져 보여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드뎌 전나무길에 접어들었다. 입장료까지 선배님이 내주셔서 난 그냥 셔터만 눌러댔다.

눈 덮인 호젓한 전나무 길을 걸으며 즐거운 대화는 끝이 없고...

누군가 벤치마다 이런 눈 오리를 만들어 올려 놓았다. 눈 사람을 만들어 본 것이 언제인지....

아름다운 눈꽃을 담느라 여념이 없는 후배 목사님 내외...

눈이 그치고 맑게 개인 하늘에 순백의 눈꽃이 너무나 아름답다. 아침 일찍 왔더라면 더 아름다운 눈꽃을 담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조금은 남았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눈송이... 잠시 후면 녹아 떨어져 내리겠지만 나의 앵글에서는 아마도 오래도록 이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일주문에서 약 600미터를 걸어 들어오니 본격적으로 내소사 경내로 들어서는 천왕문이 나온다. 불국정토를 수호하는 사대 천황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이 사대천황이 이 절의 문지기인 셈이다.

들어가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 불가에서는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것도 전생에 천년의 인연이라던가?

선배님은 아직도 눈꽃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과거 대학시절 선배님의 펜탁스 카메라를 보며 얼마나 사진기가 갖고 싶었던지... 군 장교로 임관하고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바로 니콘 FM2 카메라였다. 그 시절 FM2로 눈꽃을 담고 현상소에 맡긴 다음 결과물을 기다리던 설레임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 하다.

내소사 경내에 들어서니 순백의 아름다움이 눈을 가득 채운다. 내소사의 처마 단청은 청록빛으로 단장되어 있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해서 절이라는 느낌보다는 편안한 사당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계단을 오르는 커플의 다정한 모습이 순백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내소사를 둘러싼 산이 능가산인데, 불경 가운데 <능가경>의 이름에서 따온 듯 하다. 높지 않아 차분히 올라 산책하기에 좋을 것 같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직소폭포가 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찾아보고 싶다.

아빠와 딸이 눈길을 걸어 겨울 내소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왔다.

내소사의 상징과도 같은 노거수 느티나무이다. 둘레가 7.5미터에 20미터 높이의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무려 1천년에 이른다고 한다. 천년 전이면 후삼국시대나 고려초부터 이 자리에 서 있었던 셈이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동종을 보관하는 보종각이 마치 가분수처럼 아담하고, 그 옆의 봉래루도 여느 사찰과 달리 소박하다.

천년이 된 느티나무가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으리라는 말 그대로 소박한(?) 믿음으로 수많은 이들이 달아놓은 작은 연등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부처님을 의지하고 발원하는 그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돌보시는 신이라면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이미 다 아시지 않을까? 그분을 믿는다면 굳이 이렇게 표현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분께 겸허히 나를 맡기는 것이 더 지혜로운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느티나무 주변으로 눈덮인 야트막한 건물들이 위압적이지 않아서 좋다.

보종각의 가분수 체형을 안전하게 지탱하기 위해 세워놓은 네 개의 기둥이 이채롭다.

로우앵글의 사진은 우리가 평상시 보지 못하는 새롭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기에 즐겨 애용한다.

보종각 주변의 눈 덮인 풍경이 여유롭다.

보종각 옆에 상당히 큰 감나무가 있고, 빨간 홍시들이 아직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눈과 어우러지는 빨간 홍시는 가을과 겨울 어디메쯤의 시간 속을 헤메게 한다.

 

앞만 보지 말고, 땅만 내려다보지 말고,
가끔씩은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자.
혹시 홍시가 내 입속으로 떨어질 줄 누가 아는가?

스님들의 생활공간을 최근에 새로 건축한 듯 하다.

하늘을 감나무 가지와 홍시로 채우니 사진이 풍성해진 느낌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이름모를 어떤 분과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선배님도 내 사진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 

겨울 까치 한 마리가 여기에 날아와 앉아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 될까 상상하며....^^

자그마한 홍시 위로 눈사람이 앉았다.

따먹지 않고 남겨둔 빨간 홍시... 누군가의 입속에 들어가면 순간의 즐거움을 줄 수 있겠지만, 여기에 매달려 있음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오랜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나도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오래오래 누군가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이런 풍경을 정말 담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담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고풍스런 전통을 간직한 건물, 나뭇가지에 소복히 쌓인 하얀 눈, 그리고 빨간 열매.... 내가 담았어도 참 좋다.

마치 한 폭의 그림같지 않은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풍경이다.

고드름이 열린 처마, 눈이 수북이 쌓인 돌담, 그리고 나뭇가지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쌓인 눈....  낭만이란 이런 것이다.

삼층석탑 뒤로 보이는 대웅보전... 우리나라 사찰 중 유일하게 이곳 대웅보전만 처마에 단청이 없이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놓았다. 대웅전의 창살과 기둥 역시 칠이 없는 본래의 나무 그대로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화려함보다는 자연스러움, 검소함에 초점을 두고 꼭 필요한 공간만을 효과적으로 건축하면 좋을 것 같다. 누가와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건물,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하며, 그러면서도 경외감과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건물을 지어보고 싶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가 전통적인 샤머니즘(무속신앙)과 만나 서로 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칠성각. 절에 따라서는 삼성각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역시 삼성각으로 되어 있다. 정통 불교신앙에 속한 건물이 아니기에 보통 사찰 가람배치에 있어서 맨 뒤쪽이나 구석에 자리잡는다.

스님들의 생활공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여름에는 한 낮의 더위를 식혔으리라.

무설당(無設堂)... 설법(말)이 없이 수행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굳이 설법을 듣지 않고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보고,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묵상하고 수행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굴뚝 위에, 그리고 기와의 골을 따라 소복히 쌓인 눈, 부드러운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의 푸른 이파리 위에 소복히 쌓인 눈... 눈이 덮인 세상은 모두가 하나이다. 

시멘트가 아닌 돌과 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 위에 하얗게 덮인 눈... 그리고 청명한 하늘... 이것이 순백의 미다.

눈을 인 소나무 위로 보이는 청명한 하늘... 마음까지 깨끗해진다.

이제 돌아나가는 길... 들어올 때가 있으면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아쉬움에 한 번 더 담아두고 싶은 풍경들.

수평의 안정감과 수직의 존재감, 변화와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더하는 삼각형과 부드러운 곡선들... 지나치게 높지 않고 포근하게 품어주는 능가산까지.. 내소사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이분들의 소원을 다 이뤄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천왕문으로 나서기 전에 한 컷을 더 담는다...

노출차이가 지나치지 않은 날에만 담을 수 있는 액자형 구도이다.

우리나라에도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에서 느꼈던 평온함과 경건함, 영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기독교 시설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늘 갖는다. 30대 초반에 찾았던 태백의 예수원이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내소사는 우리나라의 기존 사찰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박함과 검소함,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통해 불교의 본래적인 구도정신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물론 들어올 때 4천원의 다소 비싼 입장료와 경로할인이 70세부터라는 점은 논외로 치고...^^

다시 전나무 숲길이다. 사실 오기 전에 카메라의 버튼 세팅이 바뀌는 바람에 조작이 서툴러 들어오면서 좋은 장면을 많이 놓쳤다. 다시 세팅을 맞추니 한결 촬영이 편해졌다.

가족과, 연인과 함께 추억을 만드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아내와 함께 오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순간...^^ 이미 다 커버린 아들들은 따라와 줄리 없지만 말이다.

언제 철새 무리를 담고 싶다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누군가가 오리 떼를 모아놓았다...^^

마침 전나무 위에서 눈이 쏟아져 내린다. 자연스럽게 햇빛 속에서 눈내리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내소사 입구, 일주문을 나서며 두 시간 여 방문을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제 포스팅에는 사진이 많습니다.
사진을 담다보면 한 두장만 쓰고 다 버리기에는 아깝지요..^^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한 번의 포스팅에 보통 50장 내외의 사진이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도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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