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③ - 더르바르 광장 풍경과 꾸마리 여신 이야기

2023. 1. 11. 10:33세상의 모든 풍경/Nep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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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인들에게 가장 역사적인 장소를 하나 꼽는다면 바로 하누만 도카 궁전이 있는 더르바르 광장(Durbar Square)이다. 더르바르라는 말은 사실 왕궁이 있는 광장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네팔의 또 다른 왕조의 수도였던 박타뿌르에도 역시 두르바르 광장이 있다.

더르바르 광장은 하누만 도카 궁전(Hanuman Dhoka Palace)을 마주보고 있다. 이 광장은 19세기까지 네팔 왕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네팔 왕들의 대관식을 위한 무대였다. 필자가 방문했던 당시 정교한 나무 조각과 장식용 창틀, 마헨드라 박물관과 트리부완 왕 박물관이 있는 국빈실을 대중들에게 개방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2015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복구가 이루어졌을지 궁금하다. 네팔의 어려운 경제여건을 고려하면 복구작업은 아마도 긴 세월이 소요될 것이다.

더르바르 광장 남쪽에는 네팔 왕조를 수호하는 탈레주 여신의 살아있는 화신, 쿠마리 거르(쿠마리의 집)가 있다.


 

광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따뜻한 온천수가 나오는 공동 야외목욕탕이 있어 담았다.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지만 사진에서 보다시피 모두 옷을 입고 씻거나 머리를 감는다.

그 옆으로는 공동 빨래터라고 할 수 있는 도비가트가 자리잡고 있다.

백년 이상 되었을 법한 빛바래고 허름한 벽돌 건물들이 이어지는 거리... 저곳에는 오랜 세월 수 많은 이들의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애닯은 삶의 이야기들이 서려 있으리라. 이런 벽돌건물들은 아마도 2015년 4월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다 무너졌을 것이다. 켜켜이 쌓여 벽돌 하나하나에 녹아들었을 그들의 사연들도 함께 무너져 내렸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더르바르 광장으로 올라가는 언덕위로 과일장수가 야채와 과일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간다. 짐꾼들 뿐 아니라 주변 청년들이 몰려들어 뒤에서 밀어준다. 흐뭇한 장면이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가 비교적 한산하다. 문을 닫은 가게들도 많다.

뿌자에 쓰는 초를 가지고 노는 소녀들과 모자 쓴 소년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초를 파는 것 같지는 않은데 주변에 신상도 없는 걸 보면 용도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마로 무게를 지탱한 채 바랑을 지고 가게로 들어서는 남자의 모습은 네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꾼들의 그것이다.

광장에 가까워지자 화려하게 장식된 목조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르바르 광장 입구의 풍경이다. 좌우로 족히 100년 이상 되어 보임직한 목조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수많은 현지인들과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자전거에 과일을 싣고 다니며 파는 행상의 모습. 인도나 네팔에서는 저런 파란색 바나나를 사다가 익혀 요리를 해서 먹는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더르바르 광장의 모습. 

광장의 입구 쪽에 신상을 안치한 누각처럼 생긴 탑이 있는데 사다리로만 올라갈 수 있다.

탑 아래에서는 뿌자(기도) 드릴 때 함께 바치는 촛불을 판매한다.

유럽의 성당이나 정교회 예배당에서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초를 파는 걸 보면 기도시에 초를 사용하는 문화는 개신교를 비롯한 현대적인 종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

사진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들의 서로 다른 옷차림과 포즈가 흥미롭다.

역시나 지나치려던 분홍빛 사리를 입은 여인도 초를 구입한다.

이런 큰 불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일까. 이미 사용한 잔들도 다 재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각 위의 풍경과 누각 아래의 풍경, 같은 세상이지만 다른 세계다.

왕궁과 유적들이 있는 두르바르 광장에는 말을 탄 경찰들이 순찰을 도는데, 오늘은 정부의 중요한 행사가 있어 경비가 삼엄하다.

광장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붐비는데, 왼쪽과 오른쪽 건물에 종이 달려 있는 곳들은 힌두교 사원이다. 보통 제물을 바친 다음에 신에게 자신이 제물을 드렸음을 알리기 위해 종을 친다고 한다.

오늘의 행사를 촬영하기 위해 수많은 기자와 사진작가,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행사를 준비하는 수도 경비대 병사들이 하누만 도카 앞 광장의 열병식장에 도열해 있다. 흰색 기둥들로 웅장하게 장식된 저 테라스에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네팔에도 여군이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한 여군 병사가 앞으로 나가고 있다.

행사를 앞두고 막바지 점검이 이루어지는 중...

왼쪽 군복차림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이가 아마도 군 사령관이나 참모장 정도 되는 직급인 것 같다. 2층 베란다 창문 안쪽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행사장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재밌다.

영국 식민지 시절, 가난하고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수많은 네팔 젊은이들은 영국군의 용병으로 지원하여 복무했다. 그들은 1차대전이나 2차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자신들이 직접 처리하기에 부담이 되는 현장에 네팔 용병들을 활용했다.

실례로 1919년, 암릿차르에서 있었던 잘리안안왈라 박(공원) 대학살도 영국군 지휘관 다이어 장군 아래 있던 네팔인 용병들에 의한 것이었다. 다이어는 부하들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목표를 정한 뒤 조준하여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총격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영국은 397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인도인들은 8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그곳에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총격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우물로 뛰어 내리는 바람에 100여명 이상이 우물에서 압사를 당했다고 한다. 잘리안왈라 박 공원의 벽면에는 아직도 수많은 총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런 무섭고 야만적인 학살이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문명화된 1980년대에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저질러졌고, 아직도 그 발포명령자와 최종 책임자가 가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가슴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곳곳에 힌두교의 신상을 안치한 오두막처럼 생긴 사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암릿차르 와가보더의 국기하강식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계단 위에 관람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곳에 방문한다고 해도 항상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기에 상당 시간을 머물며 사진을 촬영했다.

더르바르 광장 좌우로 네팔 전통양식의 목조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아무래도 나무가 많은 히말라야 지역이다보니 건물을 목조형태로 많이 지었던 것 같다. 사실 목조건물이 지진에도 잘 버틸 수 있고 각종 기후변화에도 거주환경이 좋기 때문에 오늘날 목조주택이 지닌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대 서사시 라마야나 신화에서 라마신의 충실한 호위대장으로서 라마의 아내인 시타를 구출하는데 일등공신이 된 원숭이 신 하누만. 하누만은 시타를 납치해 랑카로 데려간 악마 라바나와 결전을 벌이는데, 이 사진의 흉측하게 생긴 형상이 바로 라바나이다. 

네팔과 인도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힌두교 신화와 전설을 듣고, 축제에 참여하면서 그 신들을 숭배하는 믿음이 내면화된다.

마침 날씨도 화창하여 더르바르 광장의 하누만 도카 궁전의 위용이 잘 표현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광장의 끝부분. 흰색으로 솟아오른 탑은 힌두교 사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흉측하고, 괴기스럽고, 한편으로는 지저분하기까지 하지만 힌두교도들에게 이곳은 성스럽기 그지없는 장소이다.

이곳을 지나는 많은 이들이 제물과 초를 구입하여 기도를 바친다.

주변을 돌아보는 동안 이제 드디어 의장대가 도착하고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된다.

말을 탄 병사의 모습이 무척 늠름하다.

네팔에서 군인은 선망의 직장이다. 군에 입대하려면 치열한 선발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사진에서도 보듯이 모두 키도 크고 건장하고, 잘생겼다. 착검까지 하고 마지막 준비를 마친 상태로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번호판에 별이 네 개나 그려진 것으로 보아 군의 최고지휘관 또는 대통령일 것이다.

오늘의 VIP를 영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계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입추의 여지가 없다. 그 앞으로 늠름한 기마병이 말을 타고 지나간다.

이곳이 바로 살아있는 여신으로 불리는 꾸마리가 거처하는 곳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처녀'를 의미하는 까우마리아(Kaumarya)에서 파생된 꾸마리(Kumari)는 '살아있는 여신'을 의미한다. 네팔에서는 보통 결혼하지 않은 여자아이를 꾸마리라고 부르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힌두교의 고대 여신 탈레주의 화신으로 인정된 여자아이를 꾸마리 데비(Kumari Devi), 즉 처녀여신으로 부른다. 사진의 소녀가 바로 현재의 여신, 꾸마리 데비이다.

마침 꾸마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안으로 들어가 짧은 시간이지만 촬영했다.

꾸마리라는 탈레주의 화신을 선정한 것은 1757년부터, 그리고 지금처럼 꾸마리를 사원에 모셔서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부터이다. 왕과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위원회에서 4세에서 7세까지의 소녀들을 후보로 선발하는데, 꾸마리의 후보가 되는 여자아이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소라고둥과 같은 목
소 같은 속눈썹
사슴 같은 허벅지
사자 같은 가슴
오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목소리
새카만 머리카락
앙증맞게 작은 손과 발


꾸마리 후보는 외모에서만 32가지에 대해 심사받으며, 예언 능력도 심사의 대상이 된다. 꾸마리가 되는 소녀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은 평온함, 그리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가짐이다. 탈레주가 용감하고 무서운 여신이기에 더욱 그렇다.


심사는 네팔의 가장 큰 축제인 ‘다사인(Dasain) 축제’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사인 축제는 고대 신들이 인간을 괴롭히던 악마를 물리친 것을 찬양하며 15일 동안 펼쳐지는 가을축제다. 신화에 따르면 이때 전사로 나선 신이 바로 탈레주 여신이었다. 탈레주는 싸움을 시작한 지 10일째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를 거두기 이틀 전의 밤, 곧 축제의 여덟 번째 밤은 ‘깔라띠(Kalratri, 검은 밤)’라고 불린다. 깔라띠는 탈레주와 ‘전쟁과 파괴의 신’ 깔리(Kali)를 위한 밤이다. 이날 밤 탈레주 사원 안마당에 54마리의 버펄로와 54마리의 염소가 이들을 위한 제물로 바쳐진다.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은 고대 악마를 상징한다. 그래서 목이 잘려져 그 피를 신상(神像)과 주변에 뿌리게 된다.

어린 꾸마리 후보는 이때 탈레주 사원 안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마당에는 깔리 여신의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의 잘려진 머리 그림자가 촛불에 일렁인다. 무서운 형상의 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춤을 춘다. 탈레주의 화신이 될 능력이 있는 후보라면 그 으스스한 시간을 침착하게 이겨내야 한다. 더욱이 버펄로와 염소의 머리들이 놓여 있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물론 두려워하는 건 금물이다. 끝으로 자신 앞에 놓인 여러 물건들 중에서 전임 꾸마리의 소지품을 가려내는 시험이 기다린다. 모든 과정을 통과한 아이에게 꾸마리의 자격이 주어진다.

까다로운 자격 요건과 심사를 거쳐 선발된 꾸마리는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언제나 빨간 옷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야 한다. 이마에는 인도 힌두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아그니(Agni)’처럼 ‘불의 눈’을 그린다. 불의 눈은 꾸마리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통찰력의 상징이다. 꾸마리는 일상적으로 가족과 떨어져서 생활한다. 공식적인 여신으로의 임무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네와르족 중에서 그녀의 친구를 선발하기도 한다. 일단 꾸마리가 되면 ‘신성한’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가마를 타고 다닌다. 

사람들은 꾸마리의 발을 만지며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네팔인들은 신통력을 가진 존재인 꾸마리가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네팔의 많은 사람들은 자주 꾸마리 사원 앞에 모여든다. 3층에 있는 방의 창문을 열고 꾸마리가 자신들에게 시선을 보내주기를 기원하면서.

얼핏 꾸마리의 생활은 무척 화려해 보이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초경이 시작되거나 몸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린 경우에는 부정을 탔다는 이유로 꾸마리를 그만둬야 한다.

전통적으로 꾸마리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최근에야 꾸마리가 원하면 학교에 갈 수 있게 됐다. 꾸마리 역할이 끝난 여성들 중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꾸마리를 지낸 여성과의 결혼은 불행으로 끝난다.’는 속설 때문이다. 물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전직 꾸마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네팔의 고유한 관습, 그리고 특이한 존재 꾸마리. 하지만 여자아이를 상대로 한 가혹한 심사 과정, ‘살아 있는 여신’이란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등 많은 제약들 탓에 꾸마리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루 세 번, 꾸마리는 저 창문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며 손을 흔들기도 하고, 사람들의 인사와 숭배를 받기도 한다.

광장에서 나오는 길에 설치된 공동 수도에서 물을 받는 일가족.

네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꿀리의 모습. 60kg 이상 무게가 나가는 무거운 짐들도 저렇게 이마와 어깨, 허리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운반한다. 어지간히 훈련되지 않으면 쌀가마 하나도 제대로 운반하기 힘든 우리와 비교하면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카트만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더르바르광장과
그 주변을 돌아보며 담은 사진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요즘 날씨가 좀 풀렸네요.
즐거운 날들 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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