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의 유적과 초기 기독교 역사 (1)

2023. 3. 10. 15:41세상의 모든 풍경/Türki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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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에 자리잡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늘은 첫번째 포스팅으로 에베소의 고대유적들과 사도 바울의 에베소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 두 번째 포스팅에서 셀수스 도서관을 비롯한 에베소의 남은 유적들과 AD 431년에 에베소 공의회가 열린 성모 마리아 대성당 및  공의회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편에서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생을 마감한 사도요한 기념교회에 관한 내용을 다룰 예정이다. 



사도 바울의 에베소 사역

에베소는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의 핵심 사역지로서 바울이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체류했던 도시이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 안디옥과 도불어 또 하나의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아시아 주의 수도이자, 상업과 학문의 중시미였고, 육상 및 해상 수송의 중심지로서 수리아 안디옥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특히 에베소 사람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즉 아데미(Artemiss) 신전이었다. 에베소인들은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제우스의 딸인 아르테미스를 수호신으로 삼고, 그 여신을 위해서 신전을 건축했다.  BC 356년에 한 미치광이의 방화로 인해 이 신전이 불타게 되자, 때마침 에베소를 방문한 알렉산더가 이 신전을 복구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에베소인들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신전을 재건하였다.

그렇게 완성된 신전은 전면의 길이가 130m, 폭이 70m,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아테네 파리테논 신전의 4배에 이르는 이 건물의 둘레에는 127개의 이오니아식 석주가 둘러서 있어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고, 이 신전에 바쳐진 막대한 제물과 아데미 여신과 관련된 사업으로 에베소인들은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AD 53년 경 사도 바울은 그의 제2차 선교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를 방문했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대로 3차 전도여행에서 이곳을 다시 방문, 집중적으로 사역하였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제자(그리스도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과 성령세례를 알게 해주었고, 그들과 더불어 에베소 사역을 시작했다(행 19:1-7).  그 후 바울은 자신의 관례대로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자 바울은 그곳을 떠나 제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이년 동안 강론했다(행 19:8-9).  서원은 강당, 또는 강의실을 의미하는데, 두란노(Tyrannus)는 저명한 수사학자로서 이곳에서 강의를 담당했던 스승의 이름이거나 해당 건물의 소유주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의 두란노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안 아시아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행19:10).  그런데 에베소의 어떤 유대인들 중에 바울의 기적을 흉내내는 주술사도 있던 것 같다.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들에 의해 제압당하고 말았다. 귀신은 그들을 장악하여 상하여 벗은 몸으로 집에서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바울을 흉내내던 주술사들이 오히려 귀신들에게 망신을 당한 것이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의 실패는 바울의 능력을 보다 더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에베소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에베소의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다고 전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고, 그 표현으로 수많은 마술사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살랐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주술과 마술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래서 주술서들을 가리켜 "에베소의 문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복음의 능력이 에베소라는 한 도시의 주술적인 문화까지도 변혁시킨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활동이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바울 사역의 성공은 아데미 여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에베소 지역경제에 막대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자 아데미 여신의 모형을 제작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이어가던 은장색 데메드리오(Demetrius)가 동료들을 선동하였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한 바울의 말을 빌미로 직공들과 지역 상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동료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극장으로 끌고 갔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시작된 소요는 다행히 시의 서기장의 중재로 진정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야 했다. 여기서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이 일단락되고 바울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향한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게 된다.

이처럼 바울이 오랜 기간 활동했고, 애정을 가졌던 이 도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현재 에베소에는 훗날 에베소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온 사도 요한과 성모마리아의 유적들만 남아 있다. 순례자들은 거대한 사도요한 기념교회와 성모 마리아의 집터라고 알려진 유적을 만나볼 수 있다.  에베소는 바울이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도시가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한 헬라도시였는지를 보여주는 유적들로 가득차 있어, 이같은 당시의 최고로 발전된 대도시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운 선교사 바울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 지금부터 에베소의 풍경과 주요 고대유적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에베소가 자리잡고 있는 셀축(Selchuk)에 방문하기 위해 우리가 묵었던 도시 쿠사다시 항의 풍경, 아름다운 에게 해가 펼쳐진 이 항구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쿠사다시 항구의 풍경이다. 단체 여행이 아니라면 며칠 머무르며 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에베소 고대유적지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유적이다. 이곳은 당시 소아시아를 통치하는 주요 관공서가 모인 주 아고라 광장 상가에 있던 목욕탕시설이다. 요즘의 사우나 시설과 각종 유흥시설까지 갖춘 당시 귀족과 부유층들을 위한 목욕시설이었다고 한다. 
 

측면에서 본 목욕탕과 주변 시설의 모습이다.

당시 20만 명 이상이 거주했던 에베소는 도시 전역에 이와 같은 토관으로 상수도 시설을 만들어 물을 보급했다고 한다. 에베소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수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소한 6개의 다양한 크기의 수도교를 통해 도시 안에 있는 많은 목욕탕 단지를 포함하여 물방앗간, 톱방앗간 등의 시설물과  도시의 다른 지역에 물을 공급했다.

발굴된 상수도 시설을 위한 토관들을 모아 놓았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이 복원공사가 끝나있지 않을까? 유네스코에서 진행하는 복원공사여서 아마도 가장 본래의 모습으로 잘 복원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당시 도시를 지키던 병사들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주사위 놀이를 했음을 알려주는 주사위판이 대리석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아고라 광장 주변으로 형성된 중심가는 에베소가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오니아식 석주들이 회랑을 이루고 그 아래를 거니는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에베소의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바실리카 스토아는 그 웅장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수많은 이오니아식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거대한 회랑은 세 곳의 통로를 가진 2층 구조물이었다.  도로를 향하는 전면부만 해도 6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이 바실리카의 거대한 규모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섹틸리우스(C. Sextillius)에 의해 헌정된 이 회랑은 A.D. 11년에 완공되었다. A.D. 53년에 에베소에 도착한 사도 바울 역시 아마도 이 회랑을 거닐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형적인 이오니아 양식의 대리석 기둥들을 볼 수 있다. 

이오니아 양식 석주의 지붕을 떠받치는 상단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의 말린 부분이 꼭 양의 귀와 뿔을 보는 것 같다. 

이곳은 주로 귀족들이 이용하는 소규모 원형극장이다. 대형 원형극장에서는 주로 검투경기나 동물들의 싸움, 대규모 군중대회 등이 열렸던 반면, 이곳에서는 연극이나 음악 등의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관중석의 모습은 오늘날 경기장의 관중석과도 별반 차이가 없다.

약 1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이 극장은 상류층 전용 극장이었기 때문에 아고라 구역 뒤편 산기슭에 건설되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아고라 구역의 모습이다.

아고라 주변에는 다양한 부속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은 아마도 원형극장에 딸린 부속실들이었을 것이다.

아고라 광장으로 이어지는 회랑 뒤편의 좁은 길인데, 중앙에 배수로를 설치해서 빗물이 빠지도록 했다. 

부유한 도시였던 에베소는 여러 개의 아고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것들은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었고, 규모가 큰 것들은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며 각종 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베소 유적지 곳곳에서 조심스럽게 복원되고 재건되고 있는 많은 아고라들을 볼 수 있다.

석주에는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작품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목동의 신으로 알려진 헤르메스이다. 헤르메스가 자기 양을 끌고 가는 장면이다.

'뱀과 횃불의 구원'이란 제목을 단 부조이다.

1세기 말에 로마제국을 다스렸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신전 터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유명한 기독교 박해자였으며, 제국 내 주요도시에 이와 같은 자신의 신전을 세워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하게 했다.

이곳은 로마의 독재자이자 황제였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137-78 B.C)의 손자인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로서 BC. 50년에서 3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대리석 기둥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곳에는 곳곳에서 길냥이들이 멋진 포즈를 취해주는데, 끝부분에 냥이들만 모아서 한 번 소개해 보겠다.


나이키 상표의 모티브가 된 "니케여신의 구원"이란 제목이 붙은 대리석 부조이다. 니케 여신의 흩날리는 옷자락을 형상화한 것이 나이키 상표라고 한다.

기독교도들을 가장 극심하게 박해했던 로마제국 제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AD. 81-96) 신전의 터에 남아 있는 기둥이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는 로마제국 시대의 10대 박해 가운데서도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온 박해 중 하나였다. 사도 요한도 이 박해 기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신전,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칙령을 내렸고, 제국 내 주요도시마다 곳곳에 황제의 신전을 건축했다. 

하드리안 신전 내부의 기둥들과 조각상들.

동쪽 출입문에서 유적들을 보며 내려오는 쿠레테스 거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멀리 셀수스 도서관이 보이고 주변에 수많은 유적들이 줄을 지어 있다.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하니, 에베소야말로 세계 최대의 고대유적지가 아닐까...
 

목이 떨어져 나간 대리석상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자세히 보면 라틴어로 대리석에 조각된 글씨들이 보인다. 흙을 잘 털어내면 그 내용도 충분히 해석 가능할 것 같다.

트라얀 황제 신전 주변에 파손된 채 누워있는 회랑의 대리석 조각과 기둥. 지금도 글씨와 무늬 조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로마시대 초중기까지만 해도 그리스어가 대부분 대문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신약성경 사본들 가운데서도 대문자로만 필사된 사본들이 그 가치와 권위를 더 인정받고 있다. 이 대리석도 사도바울이 이곳에 방문했던 1세기 전후에 존재했던 건물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트라야누스의 샘. 트라얀 황제에게 바친 저수조로서 2층의 중앙 받침대 위에 선 황제의 동상 발목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받침대와 동상의 오른발만 남아 있다.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해독에 어려움이 좀 있겠지만 이 정도 상태면 내용을 해독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듯 하다.  

아래 중앙부분에 받침과 동상의 발이 보이는가? 그 아래서 물이 흘러나와 트라얀의 샘에 넘쳐 흘렀을 것이다.

정면에서 좀 더 확대하여 담아보았다. 중앙부의 음각으로 된 라틴어가 보이는가?

도로변의 건물 뒤로 일반 시민들의 집터가 이어지고 있다.

귀족들의 가옥이 늘어서 있는 지역이다. 당시의 일반 주택 건축방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귀족의 집 안에는 이와같은 화려한 타일들로 장식되어 있다. 색체와 문양이 최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명하다.

당시 귀족들의 삶이 얼마나 화려하고 호화스러웠는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타일 장식. 

이곳은 바리우스 목욕탕(Varius Bath)의 유적이다. 2세기 초반에 건립된 건물로서 넓은 직사각형의 홀을 지나면 묙실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목욕탕을 지나면 아카데미 골목을 따라 공중화장실로 연결된다. 제국 말기 스콜라스티키아라는 이름의 기독교 여인이 이 목욕탕을 개조했으며, 그녀의 좌상이 지금도 홀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대리석 기둥 하나하나마다, 받침돌 하나하나마다 수천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일반 거주구역에서 발견된 유족들은 당시 귀족들이 거주하던 가옥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셀수스 도서관을 비롯한
에베소의 나머지 유적들과 에베소 공의회가 열린
성모마리아 대성당에 대한 포스팅이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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