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의 유적과 초기 기독교 역사 (2)

2023. 3. 15. 16:13세상의 모든 풍경/Türki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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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부터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에 자리잡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들을 살펴보고 있다. 오늘은 두번째 포스팅으로 지난 번에 이어 에베소의 고대유적들과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마지막 3편에서는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생을 마감한 사도 요한에 관한 이야기와 그를 기념하는 교회에 관한 내용을 다루도록 하겠다.  에베소의  유적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지난 번에 이어 계속 소개하도록 한다.


 

먼저 에베소 유적지의 전체적인 배치와 구조도를 소개합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오른쪽 출입구에서부터 왼쪽 아래로 쭈욱 내려오며 셀수스 도서관 앞까지 좌우편의 유적들을 소개했지요. 오늘은 셀수스 도서관 앞 광장부터 에베소 항구에 이르는 유적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아르테미스 사제의 거리인 크레테스의 공중화장실 근처의 목욕탕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게 바로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메두사의 부조이다. 지금쯤은 복원이 완료되어 깨끗한 화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메두사가 악귀와 불행을 쫓아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회랑을 장식하고 있는 섬세한 부조작품들, 날개를 단 천사도 보이고 근육질의 남성과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인도 보인다.

이 부조에는 주로 로마제국의 전사들과 기마병이 조각되어 있다.  

이곳이 유명한 로마의 공중화장실이다. 24시간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는 시스템이어서 엉덩이를 내리고 앉으면 배설물이 냄새 없이 그대로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물론 이곳은 남자 귀족들이 앉아 볼 일을 보던 곳이다. 

화장실을 보면서 든 의문! 로마인들은 소변을 먼저보고 앉았을까? 통상 변기에 앉아 대소변을 함께 보는데, 이 구조로는 그게 불가능할 것 같다. 칸막이도 없어서 옆사람의 소리도 다 들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소리들을 커버하기 위해 이곳에서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했다니....^^

이곳 화장실은 목욕탕과 이어지기 때문에 목욕탕 고객들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했을 것 같다. 목욕안하고 화장실만 이용하면 돈 내야하나? 별게 다 궁금해진다..ㅎㅎ

겨울철에는 대리석이 무척 차가웠기 때문에 노예들이 미리 앉아 덮여 놓았다는 썰도 있는데,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이곳은 어떤 장소인지, 기억이 도통 나지 않는데, 이 좁은 공간에 멋진 대리석 기둥이 빙 둘러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호화스러운 건물이었음은 틀림없다.

드디어 멀리 에베소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셀수스 도서관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셀수스 도서관에는 당시에 5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놀랍다. 요즘처럼 인쇄로 만든 책이 아니라 모두 필사본이라는 점에서 그 규모로 친다면 오늘날의 5십만권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곳은 3세기 기독교 공인 이후에 건축된 예배당 건물의 유적지일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예배당의 역사와 관련된 주요 기록들이 새겨져 있는 대리석판들.

셀수스 도서관 앞쪽에 자리잡고 있는 대리석 비문들이다.

셀수스 도서관 앞 광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은 수많은 사람들로 늘 붐비는 곳이었고, 많은 기념비와 중요한 건축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셀수스 도서관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던 건물의 터에 남아 있는 잔해들.

셀수스 도서관은 비록 건물의 전면부만 남아 있지만, 어떤 현대 건축물에 비교해도 그 미학적 아름다움이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층은 이오니아식, 2층은 코린트식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두 가지 양식의 조합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질만큼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광장 왼쪽편에 흩어져 있는 건물 잔해들은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 건물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항구로 이어지는 메인 게이트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공공시설물의 폐허.

도서관 오른쪽의 원형극장쪽으로 향하는 출입문.

많은 건물의 명문이 그리스어 대문자로 쓰여진 에베소지만, 이 게이트의 상단 명문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다.

항구로 이어지는 마제우스와 미트리테다스 게이트의 웅장한 모습. 온전한 형태의 셀수스 도서관과 주변 건물, 그리고 이 게이트가 어우러진 풍경은 에베소를 로마제국 제 2의 도시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을 것이다.

 

무너져 내린 거대한 회랑 난간에 적힌 그리스어 명문들... 

셀수스 도서관과 큐레트 거리 

켈수스로도 발음되는 셀수스 도서관은 본래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아시아 주의 총독이었으며 대단한 애서가였던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의 웅장한 무덤과 도서관이 통합된 형태로, 그의 아들 율리우스 아퀼리아에 의해 지어졌다. 납골당은 1층 아래에 있으며, 대리석으로 된 무덤 안에 납으로 된 유골함이 담겨 있다.

이 위풍당당한 도서관은 로마 시대, 그중에서도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은 방대한 건축 계획으로 명성이 높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스렸던 서기 2세기의 유적이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에베소에 왔을 당시에는 이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울이 가르쳤던 두란노서원은 이 셀수스 도서관이 건립되기 전에 에베소의 학문과 철학이 꽃피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미와 덕, 특히 지식을 통한 내재적 가치의 완전한 실현을 상징하는 아레트의 대리석상이 셀수스 도서관 정문의 한 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셀수스 도서관을 설립한 로마제국의 집정관 셀수스는 이 도서관이 지혜와 지식의 전당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정문입구 오른쪽 벽에는 지식을 상징하는 아레트의 상을, 그리고 왼쪽벽에는 지식을 상징하는 소피아의 대리석상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스어 에피스테메(episteme)는 인간의 탐구정신, 인식, 과학과 질서를 의미한다. 셀수스 도서관 정문 중앙의 아레트, 좌측의 소피아와 더불어 우측의 에피스테메의 상은 이 도서관이 추구하는 목적과 학문의 본질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에베소에는 일년 내내 관광객이 붐비는데, 여름에는 온도와 습도가 모두 높아서 걸어다니기에 무척 힘들다고 한다. 우리는 늦가을에 접어든 11월 중순에 가서 그래도 쾌적하게 유적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에베소에 수많은 유적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셀수스 도서관과 항구로 이어지는 게이트가 지닌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단연 압권이다. 다시 되돌아가 두 건축물을 함께 담았다.

에베소 항구로 이어지는 게이트를 나서면 좌측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아고라 광장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이른바 유흥업소,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윤락업소들이 자리잡은 구역이 있다.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을 나서면 항구까지 이와 같은 완벽한 대리석 포장도로가 쭉 뻗어 있다.

앞에서 본 윤락가, 유흥업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미성년자 출입불가 지역이다. 요즘처럼 주민등록증이 없던 시절, 미성년자인지 여부를 가리기 쉽지 않았을 터.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나이가 좀 어리다 싶으면 불러세워, 이 그림에 발을 대어보게 했다고 한다. 이보다 발이 적으면 "뒤로 돌아이 갓!", 이보다 발이 크면 "오케이, 컴인!" 했다는 것.

오른쪽으로는 지금도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데, 앞쪽에 거대한 규모의 원형극장이 보인다.

항구쪽으로 이어지는 도로 왼 편으로는 넓은 아고라 광장이 펼쳐진다. 이곳의 유적들도 계속 복원중인데, 지금쯤은 상당히 복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고라 광장을 둘러썬 대리석 회랑은 로마의 귀족과 철학자, 젊은이들,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이 누비던 공간이요, 대규모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던 장소이다.

아고라 주변의 화려한 건물과 시설들이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물들을 분석하고 관리하고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작업이 긴 세월 동안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관리팀에서 이 일을 맡고 있다고 한다.

2천년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대리석 조각.

원형극장 주변의 구조물들도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1만 5천 명에서 최대 2만 5천 명까지도 수용할 수 있었던 에베소의 원형극장은 그 규모와 시설에서 로마의 콜롯세움에 비견할 만 하다.

원형극장 전면부의 웅장하고 화려한 시설들이 복원되면 이곳은 에베소의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곳은 검투사들이 경기장에 들어오는 입구로서, 안의 쇠창살 문이 열리면 검투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을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를 하늘을 응시하며, 그리고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마지막 햇살일 수도 있는 그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자신이 믿는 운명의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검투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관중석으로 입장하는 원형극장의 출입구. 규모가 정말 웅장하다.

마지막으로 멀리서 원형극장의 전경을 담았다.

여기서부터는 항구로 이어지는 대로.  이 대로의 주변에 수많은 상인들이 좌판을 펼치고 지중해 각지에서, 또 대륙의 먼 곳에서 가져온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판매했을 것이다.

마침, 당시 귀족과 사제의 행렬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펼쳐졌다. 숲에서 행진해 나오는 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황제와 왕비가 좌정하고 시위대장들이 경비하는 가운데, 공연이 펼쳐진다.

공연이 끝날 때쯤 오늘의 검투사 두 명이 황제에게 절을 하고 생사를 건 검투 시합을 벌인다.

이 흥미로운 장면을 보기 위해 여기 저기서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름 치열한 결투가 벌어진다...^^

서로 짜고 하는 결투지만 표정만큼은 비장하다.

드디어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다. 황제가 패자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시간이다. 엄지 손가락이 아래로 향하면 죽음이요, 위로 향하면 삶이다.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관객들과 인사를 나눈다. 당시 보라색 옷은 황제와 그 가족만 입을 수 있었고, 귀족들은 자주색 옷감을 사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다. 사도행전의 루디아가 당시에 이 자주색 옷감을 판매하는 여성 사업가였다.

에베소쯤 되는 유적지라면 이런 이벤트가 매일 몇 차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공연장을 떠나는 배우들.

오늘의 검투사 두 사람을 소개한다. 둘 다 잘생긴 터키 청년이다. 

황제의 행차 행렬이 자못 화려하다.

이 엄청난 유적들을 복원하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은 걸려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 우리는 항구로 향하는 길의 오른편에 자리잡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 유적을 찾았다.

이곳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열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에베소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제단 전면부 유적

이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열린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유명한 '테오토코스' 논쟁이 그 핵심의제로 다루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설교 중에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테오토코스)가 아닌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크리스토토코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 이 논쟁은 당시의 동로마제국의 정치권력과의 관계와 얽혀 매우 복잡하게 흘러갔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를 원했던 네스토리우스의 의도와 달리,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시릴(Cyril, 키릴)은 네스토리우스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중대한 결함을 가져올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지위를 격하시킨다고 비난하면서 네스토리우스의 교리는 정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곳이 에베소 공의회가 열렸던 장소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었다. 당시 제국내 기독교는 5대 관구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로마교회가 주도권을 잡았으나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면서 황제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은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와 일종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고, 자신이 기독교 세계의 주도권을 쥐기를 원했다. 그러던 차에 테오토코스 논쟁이 발생했고, 이는 키릴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에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문제로 세번째 공의회를 에베소에서 소집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스토리우스는 중간에 여러 상황이 얽혀 회의가 열리는 제 날짜에 이곳 공의회 장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당연히 네스토리우스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공의회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의회는 처음부터 분열회의가 되어, 시릴을 지지하는 세력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파면을 결의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안디옥 교구의 주교 요하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릴의 파면을 결의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재가로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되었고, 시릴과 요하네스는 433년에 서로 화해했다. 이 에베소 공의회, 즉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주도한 이 회의에서는 325년 니케아 회의의 교리와 신경을 재확인했고, 새로운 신조의 작성을 금지했으며, 마리아에 대해 테오토코스를 공식 존칭으로 인정했다. 

에베소 교회의 세례조가 거대한 예배당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발굴된 유적을 기초로 당시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시대별로 재구성해 놓은 그림이다. 맨 아래가 4세기, 가운데가 6세기, 맨 위의 그림이 에베소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해가던 10세기 성당의 모습이다. 

세례조에서 바라본 성모 마리아 대성당 제단의 모습.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면,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멈추면 그저 관광객들이 스쳐지나가는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테오토코스 논쟁으로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지금 이렇게 폐허가 되어버린 예배당에서 그런 논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방치된 에베소교회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 복음의 생명령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 그런 교회는 결국 이렇게 폐허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베소 유적지에는 유난이 이런 냥이들이 많았다. 최근에 다녀오신 분들 얘기를 들으니 지금도 그곳에 고양이들이 많다고 한다. 보통 고양이들이 사람을 피하고 까칠한데, 이곳 고양이들은 무척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랐다. 아마도 자신들에게 호의적이고 늘 먹을 거리를 던져주기에 그렇게 길들여졌을 것이다.

냥이들을 만날 때마다 증명사진 한 장씩을 남겨 주었다.  사랑스러운 포즈 아닌가?

이 친구는 흰 바탕에 주황색과 갈색, 검정색이 어우러진 참 예쁜 냥이였다. 넌 왜 이리 예쁘게 생겼냥?

방금 전 그 녀석과 형제나 자매쯤 되는 냥이일 것이다. 주황색이 더 많이 섞여있다. 물을 먹는 모습도 귀엽다.

성모마리아 교회 근처에서 만난 마지막 냥이도 인사를 빼놓을 수 없지..! 냥이들의 수명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이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긴 포스팅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베소 유적에 관한 포스팅은 한 번 더 남았습니다.

바로 이곳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자신의 생의 마지막까지 지냈던 사도 요한의 이야기와
그를 기념하는 기념교회 이야기입니다.
다음 포스팅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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