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독교 이야기(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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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기독교사상 6> 인도신학의 틀거리 - 케샵 찬드라 센
1833년에 람 모한 로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한동안 뛰어난 역량을 지닌 지도자가 없었던 브라흐마 사마즈에는 얼마 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아버지인 데벤드라나트 타고르(Debendranath Tagore, 1817-1905)가 출현했다. 하지만 기독교와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로이의 뒤를 잇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는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보게 될 케샵 찬드라 센(Keshab Chandra Sen)이다. 센은 영적인 열정과 더불어 뛰어난 웅변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1857년 19세의 나이로 브라흐마 사마즈에 합류했다. 많은 선교사들은 센이 기독교적인 삶에 대단한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세례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고, 기독교의 편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
2020.11.12 -
<인도교회사 인물열전5> 시리아교회 수호를 위한 몸부림 - 마르 아브라함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은 인도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고아와 코친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자신들의 정착지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와 더불어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파드로아도(Padroado)에 힘입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교와 교세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주로 프란시스교단과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신부와 수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지요. 이들과 주로 네스토리우스파에 속한 시리아교회와의 만남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양자 모두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형제들로 여기며 좋은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로를 알아감에 따라 서로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지요. 특히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들의 존재에 대하여 교황청..
2020.11.09 -
<인도기독교사상 5> 인도 르네상스 – 람 모한 로이
라자 람 모한 로이(Raja Ram Mohan Roy)는 기독교 신학의 주제들에 대해 진지하고도 광범위한 글을 쓴 최초의 인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인도 역사에서 매우 존경받는 이름이다. 그것은 그가 선구적인 힌두 사회개혁가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열정적인 호소가 없었다면 남편이 죽은 후 그 시신, 옷과 함께 그의 아내도 산채로 화장하던 풍습인 사띠(sati)제도의 폐지같은 사회개혁조치들이 오랜 세월 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현대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데, 이는 그가 강조한 바 있는 여러 가지 신학적 태도들이 인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람 모한 로이는 뱅갈인 브라만이었다. 그는 집에서 자신..
2020.11.02 -
<인도교회사 인물열전 4> 열정의 개척자 - 프란시스 사비에르
포르투갈의 인도진출과 파드로아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한 후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무역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고아에 거점을 확보한 후 다마운, 살세떼, 봄베이, 크랑가노르, 코친, 퀼론 등 서해안은 물론 동해안의 투띠코린, 네가파탐, 마일라포르에 이르기까지 정착지를 확대하였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에 이어 두 번째 총독으로 부임한 알부케르케(1509-1515)는 정착지의 포르투갈인들과 인도인들 사이에 혼혈결혼을 장려하였습니다. 인도에 진출한 포르투갈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교역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포르투갈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들어온 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려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2020.10.28 -
<인도기독교사상 4> 원천③ - 개신교 전통
17세기 초반, 서구의 여러 무역회사들이 인도에 들어옴으로써 인도에서는 다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인들에 이어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 영국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캘커타와 수라트, 마드라스, 봄베이와 같은 중심지에 자신들의 무역 거점을 설치했다. 거기서 그들은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무역활동을 수행했으며,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 사제들을 데려오고 교회를 건축했다. 1608년에 수라트에 첫 번째 공장을 설립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50년이 지난 후 사목을 임명했으며, 그렇게 파견된 채플린은 단지 그 회사의 직원들을 돌보는 제한적인 책임을 맡았다. 당시 인도인들의 눈에 비친 유럽인들의 삶과 태도는 인도인들에게 그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하는 데 ..
2020.10.25 -
<인도교회사 인물열전 3> 쥬르댕과 타나의 순교자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에 걸친 십자군 전쟁, 그리고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에 의한 가공할만한 유럽침략은 그동안 막연한 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었던 동방의 나라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과 모험심을 고조시켰습니다. 특히 몽골제국의 유럽침략에 큰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교황청은 동방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몽골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동방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를 위해 교황청은 당시 몽골제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에게 여러 차례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인도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교황이 보낸 대사들은 정치적인 식견은 물론 이민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로서 주로 프란시스 교단이나 도미니칸..
2020.10.21 -
<인도기독교사상 3> 원천② - 드 노빌리
인도신학의 두 번째 원천을 꼽는다면 드 노빌리(De Nobili)와 로마 가톨릭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초반에 본격 시작된 로마 가톨릭의 인도선교는 1542년, 예수회에 속한 한 위대한 개척자가 고아에 도착함으로써 크나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가 바로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로서 그의 사역은 인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섬, 코로만델 해안까지 확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552년에 중국을 향해 떠난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력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역했다. 여기서 사비에르와 그의 포르투갈 예수회 동료들, 그리고 그의 계승자들이 사용했던 복음전도 방법들까지 논의를 확대할 필요는 없다. 그 뒤에 이어진 선교는 불행히도 서구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형태로서,..
2020.10.19 -
<인도교회사 인물열전 2> 가나의 도마와 시리아교회 이민자들
우리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서 사역하고 순교한 직후 첫 두 세기 동안 말라바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공백기의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18세기의 역사학자인 밍가나(Mingana)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 바는 사도 도마의 순교 후 인도와 말라바르에는 설교자나 지도자가 없었으며 목회자 없이 남녀 신도들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록된 말씀이나 예전, 신앙과 관습을 지도해줄 목회자나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교신앙을 가진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켜나가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 없이 방황하던 도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직자가 파송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주후 295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20.10.14 -
<인도기독교사상 2> 원천① - 시리아 전통
인도교회가 지닌 가장 오랜 전승에 따르면 사도 도마가 주후 52년에 말라바르(Malabar)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 전승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아마도 3세기,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남인도에 교회가 설립됐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이 전승은 주후 345년, ‘가나의 도마’(Thomas of Cana)라고 불리는 시리아 그리스도인 상인이 일단의 시리아 이민자들을 데리고 말라바르에 왔음을 전해준다.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과 이주자들 역시 대략 4세기 후반 이후, 즉 네스토리우스파의 아시아 선교의 황금기 동안에 인도에 들어왔다.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로 알려진 이른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사실상 페르시아교회였으며, 그 기원은 네스토리우스 논쟁 ..
2020.10.12 -
<인도교회사 인물열전 1> 인도교회의 뿌리 - 사도 도마
인도교회 역사를 서구교회와 동일하게 2천년으로 잡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바로 사도 도마에 의해 설립된 교회라는 전승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교회들, 특히 시리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들은 이 도마전승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도교회사의 인물들을 다루는데 있어 첫 번째는 당연히 사도 도마여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했다고 하는 도마전승은 그동안 인도기독교 역사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토론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이 전승에 대한 여러 논란과 진위여부를 따져보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시리아 기독교인들 사이에 한결같이 전해져 온 이 전승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
2020.10.07